새샘(淸泉)

2015. 6/7 여주 세종 영릉 세종전과 야외전시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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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7 여주 세종 영릉 세종전과 야외전시물

새샘 2015. 8. 14. 19:54

경기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에 있는 영릉에는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능인 영릉英陵, 그리고 17대 임금인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寧陵이 있다.

 

영릉 배치도

 

 

이 글은 세종대왕 영릉 둘러보기로서 효종영릉의 남서쪽에 있는 세종영릉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세종영릉 주차장에서 매표소로 향한다. 앞에 보이는 로터리 바로 뒤로 보이는 기와지붕 건물이 매표소이고, 매료소 오른쪽의 큰 건물이 관리사무소.

 

관리사무소 오른쪽으로 넓은 잔디마당이 있다.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터와 유물로 미루어 제사와 관련도니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건물인 영릉의 재실터.

 

세종영릉 안내판 오른쪽에 서 있는 영릉 사적비(제195호).

 

영릉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는 세종영릉을 그대로 옮겨본다.

 

영릉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훈민정음: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 농사직설(농업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윤리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한국의 지리책), 석보상절(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위(의학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 영릉 정문 오른쪽엔 영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이 유네스코에서 지정된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화강암표지석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기와지붕의 세종전이 보이고, 세종전 주변의 잔디밭에는 세종대왕 시대의 각종 발명품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혼상渾象-세종 19년(1437) 경복궁 내에 만든 혼상은 오늘날 천구의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 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 위치를 살펴볼 수 있게 만든 천문기기.

둥근 혼상의 회전축은 지구 자전축인 북극(북극성방향)과 남극 방향이 일치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혼상에 그려진 별자리도 시간에 따라 지평환의 동쪽에서 떠오른다. 또한 천체가 남중(자오선을 통과)할 때는 자오환을 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평환 밑으로 지는 모습이 재현되어 하루밤 동안 별들의 운행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종 때의 혼상은 물이 흘러내리는 힘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하루에 1번씩 회전시킴으로써 하루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같게 하여, 이 혼상을 이용하면 밤의 시간과 1년 동안의 절기변화를 측정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세종 때 만든 혼상은 현존하지 않지만 문헌자료를 근거하여 야외에 전시할 목적으로 실제(지름 71.6cm)보다 크게 지름 120cm 청동으로 제작하여 1,464개의 별을 새겨 복원한 것이다.

 

간의簡儀-간의는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

세종대왕은 재위기간 중 천체를 관측하고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한 왕립천문대인 간의대를 설치하고 많은 천문기구들을 만들게 하였는데, 세종 14년(1432) 먼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목木간의를 시험제작하여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한 후 청동으로 간의를 제작하여 간의대 위에 설치하였다.

원래 간의는 1276년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처음 만든 천문관측기기로서 오늘날의 천체망원경식으로 해, 달, 오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소간의小簡儀-소간의는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고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측기기.

세종 16년(1434)에 이천, 정초, 정인지가 제작하여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설치하였다.

소간의는 간의보다 크기가 작고 이동이 편리하도록 하여 더욱 간편하게 만든 것으로 눈금이 새겨진 둥근 고리 모양의 환, 즉 사유환, 적도환, 백각환, 규형, 기둥과 밑받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도좌표계와 지평좌표계로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관측기기로 해, 달, 행성과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를 측정할 수 있다.

소간의는 세종시대에 독창적으로 창제된 세계 유일의 천체관측기기이나,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국내 최초로 복원한 것이다.

 

천평일구天平日-세종 19년(1437)에 제작된 해시계 중의 하나.

용주로부터 남쪽 못까지 연결된 실은 하늘의 적도면과 일치하도록 설치되어 있는 시반면時盤面(해 그림자를 받아 시각을 읽는 둥근 반구형의 면) 중앙을 수직으로 통과하며, 태양빛에 의해 시반면 위에 맺힌 실그림자로 그때의 시간을 알 수 있다.

시반에는 하루를 12시로 매시를 초·정 눈금(2등분)으로 나누어 사용하였는데, 시반 앞면은 하절기에, 뒷면은 동절기에 사용하였다.

천평일구의 구조는 시반, 용주, 남북을 잇는 가는 줄, 받침대, 남북쪽의 못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천평일구는 문헌과 현주일구 유물을 참고하여 7배로 확대 복원한 것이다.

 

현주일구懸珠日晷-세종 19년(1437)에 창제된 일종의 해시계.

남북을 잇는 가는 줄을 지구의 자전축 방향과 일치하도록 추를 달아 팽팽하게 당기도록 설치하여 이 줄의 그림자를 둥근 시반에 나타나게 하여 그 가리키는 눈금을 보고 하루의 시각을 측정하는 것이다.

현주일구의 시반은 양면에 눈금이 새겨져 있다.

시반에 나타나는 가는 줄의 그림자가 여름철에는 시반의 윗면에 나타나고 겨울철에는 시반의 밑면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윗면의 눈금은 춘분에서 추분까지 사용하고 밑면은 추분에서 춘분까지 사용한다.

현주일구는 세종 당시에는 휴대용 해시계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크기가 손바닥만한 것이었지만 야외전시를 위하여 문헌의 기록된 치수의 7배로 복원한 것이다.

 

정남일구定南日-정남일구는 세종 19년(1437)에 제작한 해시계의 하나로 지남침이 없이도 남쪽 방향을 결정하여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기기.

남북 기둥을 잇는 사유환 축은 지구 자전축인 하늘의 북극방향과 일치하고 동서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축 끝에 추를 달아 정남일구의 수평을 잡도록 하였다.

지평환에는 24방위와 24절기가 표시되어 있으며, 사유환 양 측면에 눈금이 새겨져 있어 정오에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할 수 있다.

사유환 안쪽에는 직거와 남북방향으로 움직이는 규형이 있어서 일년 동안의 24절기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다.

시각을 알아보려면 사유환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규형을 남북방향으로 움직여 규형의 남쪽 구멍을 통과한 태양광선이 시각선과 절기선이 그려져 있는 시반면에 닿을 때 정사각형으로 뚫린 구멍의 중앙에 나타난 시각을 읽으면 된다.

세종 당시에 제작된 정남일구는 남아있지 않으며, 이것을 세조대왕실록에 기록된 치수를 3배로 확대하여 복원한 것이다.

 

규표圭表-규표는 1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 날인가(365일 1/4날)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였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 표表가 정오에 만드는 해의 그림자 길이를 수평으로 눕힌 눈금이 있는 규圭로 재서 가장 긴 때를 동지, 가장 짧은 때를 하지로 정했다.

동지와 하지 가운데에 해당하는 날을 봄에는 춘분, 가을에는 추분이라 하고 이 4절기를 뺀 나머지 20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

하루 중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은 때는 정오이며 규를 설치한 방향은 정확하게 그 지점의 남북방향이다.

이 규표는 세종 19년(1437)에 만든 것을 1/10로 축소하여 복원한 것.

 

만원권 지폐 뒷면에 인쇄되어 있는 혼천의渾天儀-혼천의는 혼의 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천체위치 측정기로 일월오행성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천체관측기기.

혼천의는 오래 전부터 천문관측에 사용하여 왔으나 문헌상으로는 세종실록(세종15년, 1433)에 정초, 박연, 김진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처음이다.

그 후 개량을 거듭하여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는 시계와 연결하여 혼천시계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이민철, 송이영 등이 개량하여 경희궁에 설치하였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 혼천의는 현종10년(1669)에 제작된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 혼천의 부분만을 2.5배 정도 확대하여 복원한 것이다.

구조는 눈금이 새겨진 둥근 고리 모양의 환, 즉 지평환, 황도환, 백도환, 받침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천대觀天臺 위의 적도의赤道儀-관천대는 조선시대 천문관측대로 일명 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립천문기상대인 서운관을 2곳에 두었으며 특히 세종대왕은 경복궁 안 서운관에 대간의대, 북부 광화방 서운관에 소간의대를 설치하고 관원들로 하여금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모든 관측시설이 불타버려 숙종14년(1688)에 다시 관측대 2개를 세웠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보물 제851호 관천대(창경궁 소재)이며, 이것은 그 관천대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남병철(1817-1863)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인 간의와 혼천의의 천체관측 부분만 따로 떼어 적도의를 제작하였다.

이는 세종시대에서부터 꾸준히 변화 발전해 온 혼천의와 간의를 충분히 검토화고 연구한 끝에 가장 손쉽고 편리하게 관측할 수 있도록 고안된 천문기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존하는 유물은 없어서 남병철의 동생인 남병길(1820-1869)의 저서 '성경星鏡'에 남아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문헌을 참고하여 적도의를 복원 제작하였다.

적도 관측법은 먼저 사유환을 이용하여 관측하려고 하는 천체의 방향을 정한 다음, 규형의 두 구멍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천체에 맞춘다.

그 후 눈금을 읽어 천체들을 측정할 수 있다.

 

앙부일구仰釜日-앙부일구는 세종16년(1434)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말까지 사용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해시계의 일종.

앙부일구란 시반의 모형이 솥을 받쳐 놓은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그림자를 받는 면이 오목하다고 해서 일명 오목해시계라고도 한다.

영침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24절기와 시각을 측정할 수 있다. 

이 앙부일구는 보물 제845호 앙부일구(국립고궁박물관 소장)를 본뜨고 오늘날 시제를 적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일구대日-앙부일구를 올려놓는 받침대로 화강암에 아름다운 조각을 해 놓은 것이다.

세종대왕은 서울의 혜정교와 종묘 앞에 일구대를 만들고 그 위에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시각선 위에 12지 동물모양을 그려 놓은 앙부일구를 설치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는데 그 의의가 크며 세종대왕의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는 어진 치덕을 알 수 있다.

이 일구대는 왕실에서 쓰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앙부일구대를 그래로 본떠 제작한 것이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일성정시의는 세종19년(1437)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고안하여 낮과 밤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측기기.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은 낮에는 해시계의 원리로, 밤에는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규칙적으로 회전하는 별시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 구조는 십자거,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정극환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세종시대에 모두 4개의 일성정시의가 만들어졌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될 때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일성정시의는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복원 제작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의 형체를 본떠 황도 부근을 12지역으로 나눈 12차와 이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역인 분야에 맞추어 별자리의 위치와 크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천문도이다.

앞면은 태조4년(1395)에, 뒷면은 세종15년(1433)에 제작되었으며, 검은색 돌 양면에 새겨져 있다.

천문도의 윗부분에는 해와 달에 관한 기록이 있고, 가운데에는 1,467개의 별이 커다란 원 안에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 부분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의 이름과 천문도 작성의 역사적 배경, 제작자, 제작 연원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제228호)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세종전 건물  맞은편에 서 있는 세종대왕상-동상을 받치고 있는 화강암 좌우로 훈민정음과 능역정화비가 음각되어 있다.

 

조선왕조 계보와 왕릉, 세종대왕 연표, 세종대왕 업적 그리고 각종 세종시대의 각종 발명품과 서적이 전시되어 있는 세종관(1977년 개관).

 

세종관 내부 모습

 

세종대왕 어진(김기창 작)-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무렵 곤룡포차림에 익선관을 쓰시고 용상에 앉아계시는 모습을 고증하여 그린 것으로 1973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편종編鐘-주조한 종의 두께에 따라 음이 결정되는 12율 4청성의 아악기로서 음색이 웅장하다.

고려 예종11년(1116)에 중국에서 처음 들여온 것을 세종11년(1429)에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명하여 개량한 것이다.

지금도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등에 사용되고 있다.

 

지자총통地字銃筒(보물 제862호)과 포탄-총통은 조선태조때 처음 나타났으며, 세종때 개량되어 사용되었으나, 불씨를 손의로 점화발사하는 유통식으로 천지현황 순으로 크기가 작아진다.

따라서 지자총통은 천자총통에 이어 2번째로 큰 총통이다.

 

왼쪽은 앙부일구(보물 제845호), 오른쪽은 정남일구

 

건고建鼓-세종 때 만들어진 이 화려한 북은 궁중 조회나 잔치 때, 좌우에 이보다 작은 북인 삭고朔鼓와 응고應鼓를 끼고 합주의 시작과 끝에 사용된 북.

아악에는 빠질 수 없는 매우 귀중한 타악기였으나 지금은 대궐 안 전정殿庭 주가 없어 사용되지는 않는다.

이 건고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모형을 기준으로 제작한 것이다.

 

특종特鐘-한 개의 큰 종을 틀에 매단 악기로 제례악의 등가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 사용.

음악을 시작할 때 먼저 특종을 한번 친 다음, 축 세 번과 절고節鼓 한번 치는 것을 세차례 반복하는데, 절고의 끝소리와 함께 특종을 다시 한번 치고 나서 모든 악기가 합주를 시작한다.

지금도 종묘와 문묘 제례악에 쓰인다.

 

특경特磬-한 개의 큰 돌인 경을 틀에 매단 악기로 제례악의 등가登歌에서 음악을 마칠 때 사용한다.

합주를 그치려면 절고를 세번 치고 그 절고 소리에 따라 어어를 세번 드르륵 긁는데, 절고의 첫소리와 끝소리에 특경을 각각 한번씩 치고 나서 합주를 그친다.

지금도 종묘와 문묘 제례악에 쓰인다.

 

편경編磬-단단한 경석으로 만들어 돌의 두께에 따라 음정이 결정되는 12율 4청성의 아악기로 음색이 청아하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처음 들여온 것을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면하여 개량한 것이며, 지금도 종묘와 문묘 제례악에 사용된다.

 

왼쪽에서부터 산조가야금, 산조아쟁, 거문고, 어, 운라

 

산조가야금散調伽倻琴-6세기초 가야국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12줄 현악기.

19세기 후반 산조라는 새로운 음악갈래를 연주하기 위해 산조가야금이 만들어졌다.

산조아쟁散調牙箏-아쟁은 현을 활로 문질러 소리내는 현악기로서 궁중음악 및 장작음악에 사용하는 정악아쟁과 민속악을 연주할 때 사용하는 산조아쟁의 2종류.

고려시대에 사용한 정악아쟁을 20세기 이후 큰 음량을 필요로 하는 공연문화가 발달하면서 산조아쟁이 등장하였다.

산조아쟁은 말총으로 만든 활을 사용한다. 7현, 8현, 9현의 아쟁이 있다.

거문고玄琴-고구려 왕산악이 만든 현악기.

16개의 쾌 위에 6줄의 현을 얹어 오른손에는 술대를 쥐고 현을 쳐서 소리를 내고, 왼손은 쾌를 짚어 무릎 위에 놓고 연주한다.

-엎드린 호랑이의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그 등에 27개의 톱니를 세운 것이다.

연주할 때는 9조각으로 갈라진 대나무 채로 먼저 호랑이 머리를 세번 치고 이어 톱니를 3번 긁어내린다.

한국에서는 고려 예종11년(1116)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온 후 문묘 및 종묘 제례악에서 끝남을 알리는 신호악기로 사용하였다.

운라雲-조선후기부터 사용한 악기로, 음정이 있는 동라銅 열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작은 망치로 연주하는 유율 타악기.

동합금으로 만든 접시 모양의 작은 동라는 크기는 모두 같고 두께로 음정을 조절한다.

 

바라 해금

바라-동서양에서 두루 쓰였고,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게 연주되고 있는 금속타악기.

무속음악과 대취타연주에 편서오디며, 궁중정재 향발무, 불교음악 바라춤의 무구로도 사용된다.

얇은 놋쇠로 되어 있으며 양손에 들고 맞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해금奚琴-활로 명주실로 문질로 소리내는 찰현악기로서 고려시대부터 사용하였다.

작은 울림통에 세로로 대를 세우고 울림통과 대를 2개의 줄로 연결하였다.

오른손은 활대로 줄을 긋고, 왼손은 두 줄을 한꺼번에 감아쥐거나 빼면서 음높이를 조절한다.

애절한 듯 하면서도 애교스러운 소리가 특징이며, 이런 음색 때문에 깡깡이 또는 깽깽이라고도 부른다.

 

각종 관악기-왼쪽에서부터 퉁소洞簫, 약, 적, 지, 태평소太平簫

 

갑인자甲寅字-세종 16년(1434)에 만든 동활자.

갑인자는 세종의 명으로 당시 정밀한 관측기기를 제작하는 기술자들이 만든 것으로 그 활자의 모양이 바르고 글자의 크기가 고르게 조립되었다.

자판의 빈틈을 납이 아닌 대나무를 사용함으로써 글자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하루에 찍어내는 인쇄량이 40여장에 달하여 이전의 경자자庚子字보다 배 이상의 능률을 올렸다.

우리나라의 활자 인쇄술은 세종 때 이 갑인자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번이 개주되었다.

 

세종 때 간행된 서적들

훈민정음訓民正音-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세종28년(1446)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의 명으로 설명한 한문해설서. 해례가 붙어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예의例義(어제서문 등),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정인지 서문에는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편년월일을 밝히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한문본 훈민정음의 예의例義만을 국역한 것으로 작자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조선 숙종 연간인 1674-1820년으로 추정).

번역 방식은 한문을 짧은 구절로 나누어 토를 달고, 한자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였으며, 그 아래에 두 줄로 한문의 뜻풀이를 한 다음, 그 구절 전체를 번역하였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보물 제 398호)-세종29년(1447)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지은 찬가.

한글을 큰 글자로, 한문을 작은 글자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며, 조선 전기의 언어와 어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고려사高麗史-세종31년(1449)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문종1년(1451)에 완성한 고려시대의 역사서.

고려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내용을 기전체로 정리한 책으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자료.

 

동국정운東國正韻-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편찬하여 세종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중국의 음운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으로 당시 혼란스러웠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 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세종전 오른편 잔디밭에 전시되어 잇는 세종대왕시대의 발명품들

자격루自擊漏-세종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하였다.

자격루의 작동원리는 파수호播水壺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수수통受水筒에 고이면 시간의 눈금이 있는 살대筒箭가 떠오르면서, 지렛대 원리의 자동조절장치를 움직여 스스로 종과 북과 징을 쳐 시간을 알려주도록 되어 있다.

이 자격루는 중종때 개량되어 사용되엇으나, 지금은 복잡한 자동시보장치가 없어지고 3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만 남아 덕수궁에 보존(국보 제229호)되어 있는 것을 본떠 제작한 것이다.

 

풍기대風旗臺-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여 기상을 예측하기 위하여 바람 깃발 즉 풍기를 세운 풍향기의 대이다.

세종시대에는 농업기상학이 발달하여 기상관측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강우량의 측정과 함께 풍향과 풍속의 관측이 중요시되었으며, 풍기대는 우리 손으로 만든 독특한 기상관측기기의 하나이다.

풍향기 석대 맨 위에는 깃대를 꼽을 수 있는 구멍이 파여 있고 여기에 좁고 긴 깃발이 달린 깃대를 세워 깃발이 날리는 방향과 세기를 관측하였다.

이 풍기대는 세종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아 18세기에 만든 보물 제846호인 풍기대(창경궁 소재)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수표水標-수표는 세종23년(1441)부터 2년간에 걸쳐 제작하여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된 하천수위 측정계이다.

수표의 발명은 측우기와 함께 강우시기가 7-8월에 치우쳐 있는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홍수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세종 때 처음 만든 수표는 나무기둥에 척, 치, 푼의 길이를 표시하고 돌기둥 사이에 묶어 하천에 세운 목재였으나 그 후 석재로 개량하였다.

이 수표는 원래 청계천 수표교 옆에 있던 것을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는 보물 제838호 수표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측우기測雨器-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23년(1441)에 세계 최초로 발명한 우량계이다.

세종은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자로 재어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철로 주조한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 강우량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확히 측정하게 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철제 측우기의 모형으로 자기나 와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작품들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측우기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금영錦營측우기를 본뜨고 대석臺石은 기상청에 보관중인 관상감 측우대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2015. 8.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