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탄은 이정 "풍죽" 본문
2009년 8월 9일 고 외우 오주석 선생이 쓴 "풍죽도"를 올렸었다.
이번 글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백인산 선생의 글로서, 두 글을 비교해서 읽으면 "풍죽"을 더욱 맛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
묵죽은 대나무가 지닌 다양한 함의와, 글씨와 상통하는 기법적 특성으로 인해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 그리던 그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북송대 문인화론의 영향으로 고려 중기부터 묵죽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유교문화가 꽃을 피웠던 조선왕조에 이르러 더욱 풍미하였다.
묵죽이 지니고 있는 군자적 상징성과 간결한 형상과 강직한 미감이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문화 전반을 주도했던 성리학자들의 이상과 지향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도화서의 화원 선발 시험에서 산수나 인물보다 대나무에 가장 높은 배점이 주어졌던 사실은 조선시대에 묵죽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묵죽은 조선 초기부터 크게 유행하여 세종, 성종과 같은 군왕과 강희안(1417-1464) 등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화원인 안견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에게 폭넓게 그려졌다.
조선 중기에는 신잠(1491-1554), 유진동(1497-1561), 신사임당(1504-1551)이 묵죽 3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는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신뢰할 만한 작품이 전해지지 않아 현재 이들의 묵죽 솜씨를 제대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조선의 묵죽을 실제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에 이르러서이다.
그가 살았던 선조-인조 연간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율곡 이이 등에 의해 성리학이 토착화되면서 문예 각 부문에서 점차 조선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문학 분야에서는 송강 정철(1536-1593)의 한글 가사와 석주 권필(1569-1612)의 진경시가 나오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1543-1605)의 석봉체가 출현했다. 그림 쪽에서는 사군자 계열의 문인화가 앞장서게 되니, 바로 탄은의 묵죽이다.
탄은의 묵죽은 이러한 문예 변동의 핵심이자 정수로,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조선 묵죽의 전범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그가 묵죽에서 이루어 낸 성취는 조선 묵죽의 본격적인 시작과 양식적 정체성의 확립을 동시에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
<풍죽風竹>은 탄은의 묵죽 중에서도 최상의 격조와 절정의 기량을 갖춘 백미라 할 수 있다.
거친 바위틈에 뿌리 내린 대나무 네 그루가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고 있다.
뒤쪽 세 그루의 대나무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요동치지만, 전면 한복판에 자리한 대나무는 댓잎만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 있게 휘어지면 바람에 당당히 맞서고 있다.
고통스럽게 견디기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바람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명하고 윤기 있는 댓잎에서는 오만하다고 느낄 만큼 고고하고 우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짙은 먹으로 댓잎을 반복하여 겹쳐 놓았지만 미묘한 농담과 필력의 변화로 전혀 답답하거나 탁하지 않다.
오히려 굳세고 상쾌하며 거센 바람에 댓잎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들릴 듯 하다.
댓잎 한 획 한 획에서 올곧고 당당한 조선 선비의 정신과 숨결이 느껴진다.
반면 그림자처럼 옅은 먹으로 처리한 뒤쪽의 대나무들은 보는 이에게 거센 바람의 강도를 느끼게 하는 한편, 화면 전체에 공간감을 증대시키고 있다.
주인공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조연들이다.
다만 대나무 아래 바위와 흙은 너무 단출하게 묘사하여 다소 어색해 보인다.
그래서 탄은의 묵죽을 무척 좋아했던 백사 이항복(1556-1618)이 바위만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농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바위가 보는 이의 시선을 오로지 대나무에만 모아지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으니, 탄은이 왜 바위를 이렇게 그렸는지를 알 만하다.
화폭 전체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정중동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엄정하고 강렬하여 숨이 멎을 것 같다.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 본래의 의미와 미감을 이만큼 잘 살려 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나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혁신과 위기, 극복으로 이어지는 당시 사회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초창初創의 건실성과 역동성, 대규모 전쟁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비롯된 절박함과 비장함,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낸 긍지 등이 이 시기 조선 문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탄은은 이러한 시대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일급 선비로, 당대의 정서와 미감을 대나무를 통해 온전하게 형상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지사의 절개를 형상화시킨 이 <풍죽>은 조선 선비의 이상과 지향을 가장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당대와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탄은과 그의 <풍죽風竹>을 아끼고 기렸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이정구(1564-1635)는
"석양공자는(이정은 세종의 현손으로서 석양군石陽君이란 이정의 작호爵號) 대나무로 이름이 나서 세상에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갔다.
그 시원스런 붓놀림으로 타고난 재주를 신묘하게 펼쳐 낸 것을 보니, 소동파의 신운神韻(고상하고 신비스러운 운치)과 문여가의 형사形似(형체가 서로 비슷함)를 겸하였다."고 하였다.
묵죽의 실질적인 시조라 할 수 있는 중국 문인 소식(1037-1101)과 문동(1018-1079)의 운치와 사생력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말이니, 묵죽화가에게 보낼 수 있는 최상의 극찬이다.
또한 선조의 부마였던 윤신지(1582-1657)는 "석양의 묵죽은 천하가 좋아하여 당시 중국인들이 한 폭이라도 얻으면 내는 값에 한정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의 보배임이 분명하다."고 상찬했다.
당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탄은 묵죽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탄은이 이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요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천부의 자질과 부단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흐름을 타면서도 중심을 지켜 내는 <풍죽風竹> 속의 대나무는 닥쳐온 시련을 담담하게 감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던 탄은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탄은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 나갈 뻔한 시련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풍죽風竹>에서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그저 붓끝의 기교로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2. 2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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