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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후족, 백제향, 그리고 고선지와 이정기

새샘 2016. 2. 17. 12:03

패망한 나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 귀족들을 대거 중국으로 끌고 갔다.

물론 나머지 백성들은 그 땅에 그대로 남아 신라인이 되거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인들도 대부분 그 땅에 남아 발해의 국민이 되었고 이후에는 만주에서 일어난 여러 국가의 국민들로, 지금은 중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는 중국 본토로  끌려간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의 흔적을 이야기해 보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669년 4월에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인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3만 8,300호의 주민을 강회江淮의 남쪽과 서쪽 여러 주의 비어 있는 넓은 땅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경우 660년 멸망할 때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만 2,807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이들, 즉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은 점차 중국에 동화되어 현재는 중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 운남성雲南省 서남부, 미얀마 서북부와 태국 북부, 라오스 서북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라후족拉祜族이다.

라후족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닭을 옆에 두고 결혼식을 올리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등 고구려와 유사한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라후족이 입는 옷이나 몸에 하는 장신구 등도 고구려 구분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들도 명절 때면 우리처럼 색동옷을 입는다.

식생활에서도 음식물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먹고, 채소를 소금으로 절인 후 물로 씻어내고, 밥을 으깨 넣어 발효시켜 먹는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는 "라후어는 문장을 이루는 낱말의 배열 순서가 주어+보어+술어로 한국어와 일치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라후어 '너레 까울리로 까이베요'는 '너는 한국으로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너레'의 '너'는 우리말 '너'와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

또한 '레'는 북한 사투리 '내레'의 레처럼 주격 조사로 볼 수 있다.

'~로' 역시 '서울로', '광주로'와 같은 움직임의 방향을 나타내는 우리의 격조사와 형태나 기능이 같다.

'까이'도 우리말 '가다'와 뜻과 발음이 유사하다.

'까울리'는 중국이나 태국 등지에서 '고구려'나 '고려'를 뜻하는 말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라후족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감숙甘肅과 청해靑海 지역에 살았던 민족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청해성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이 주둔했던 곳.

따라서 라후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에 잡혀갔다가 오지에 버려졌던 고구려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백제가 멸망한 후 하북河北 지방의 서주徐州와 연주然州로 끌려갔던 1만 2천여 명의 백제인들은 다시 복건성福建省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복건성에서는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나 북방의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몰려들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때문에 백제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6년 9월 15일 KBS 1TV <일요스페셜>에서는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속續 무령왕릉, 잊혀진 땅-백제 22담로의 비밀>을 방영했다.

프로그램을 만든 제작진은 베트남과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 광서장족廣西壯族 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이름을 찾아 냈다.

백제향의 중심 마을 이름은 백제허百濟墟이다.

허는 성터 또는 옛터를 뜻하니 이 지역은 백제의 옛 도시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곳 사람들은 백제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방아를 사용하고 명절 때는 강강술래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에 산둥山東 지방에서 왔다고 말한다.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있던 고구려, 백제 후손들이 1,300년을 훌쩍 뛰어넘어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뿌리를 찾는다는 차원에서도 역사의 피해자들인 이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두 사람이 있다.

바로 고선지高仙芝와 이정기李正己다.

고선지는 중국의 변방인 감숙성甘肅省 무위武威로 끌여온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고사계高界의 아들이다.

고사계는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단결병團結兵(단련병團練兵: 상비군의 보조로 조직한 민병)의 책임자로 지금의 신장新疆 지방인 투르판, 쿠차 등지에서 근무했다.

아버지를 따라 활동했던 고선지는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20여세의 나이에 안서도호부의 유격장군이 되었다.

747년 고선지는 1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소발률굴小渤律國(길기트국)을 기습 공격해 정복했다.
이곳은 당나라와 티베트 왕국 모두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특히 당나라에게는 서방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인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고선지 군대가 소발률국을 정복하자 이슬람 72개국이 당나라에 항복해왔다고 한다.

당시 고선지 군대가 4천~5천 미터의 파미르고원을 넘은 것을 두고 실제로 이 지역을 탐사했던 영국의 고고학자 오럴 스타인Marc Aurel Stein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은 것을 능가하는 일이다"라고 평했다.

 

고선지는 소발률국을 정복한 후 서역을 총괄하는 안서절도사에 올라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장안에서는 그의 용맹을 찬양하는 소발률국 정복가가 유행했을 정도였다.

고선지가 안서절도사로 있던 시절(747~751년) 당나라는 중앙아시아를 포함하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도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여기에는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단결병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750년 2차 원정에 나선 고선지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를 성공적으로 정벌하고 돌아오자, 당대의 시성 두보杜甫는 고선지 장군을 찬양하면서 그가 사랑하는 말도 함께 칭송하였다.

 

      안서대도호 고선지 장군의 푸른 애마 (안서도호호청총 安西都護胡靑驄)

      높은 명성과 가치를 싣고 느닷없이 동쪽으로 왔네 (성가훌연래향동 聲價然來向東)

      전쟁터에서는 오랫동안 대적할 이가 없으니 (차마임진구무적 此馬臨陣久無敵)

      주인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큰 공을 세웠네 (여인일심성대공 與人一心成大功)

 

고선지는 당과 함께 세계를 양분했던 사라센 제국이 동진을 계속해오자 다시 7만 대군을 이끌고 텐샨산맥을 넘어 사라센 연합군 30만과 일전을 겨룬다.

751년 7월, 두 제국의 운명이 걸린 대전투가 타슈켄트 북쪽 탈라스평원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당과 연합했던 카르룩葛邏祿군이 갑자기 배신해 고선지군의 배후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당의 참패로 끝났다.

 

이로써 실크로드는 당에서 사라센으로 넘어가고 이슬람 문화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 세력이 동쪽으로 나아갔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제지술 등 동아시아의 문물이 이슬람과 유럽 지역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고선지는 안서도호부 절도사 자리를 내놓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군 부원수가 되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오히려 반란을 꾀하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고 만다.

이때가 755년 12월이었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딛고 일어서서 서역을 개척한 영웅이 됐지만 이민족이라는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고선지는 세상을 떠났지한편으로 또 다른 고구려 유민 출신 영웅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平盧軍의 비장裨將이 된 이회옥李懷玉(이정기의 본명)은 뛰어난 활약을 펼쳐 절충장군이 되었다.

이후 758년에 평로절도사 왕현지王玄志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고종사촌형인 후희일後希逸을 절도사로 만들었다.

후희일은 이회옥을 부장으로 삼고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로 건너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나라 조정은 후희일을 평로치청절도사에 임명하였고 후희일은 이회옥을 병마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군대 내부에서 이회옥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그를 해임하였다.

화가 난 이회옥은 자신을 따르던 군사들과 함께 후희일을 쫓아내고 765년 스스로 절도사 자리에 올랐다.

그 후 이회옥은 당나라 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자 당나라 조정은 그를 평로치청절도관찰사와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 등을 겸직하게 하고 이정기李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안사의 난 이후 당 조정이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하면서 지역군사령관인 절도사들의 힘이 커졌는데 이정기는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여서 이 시기를 '번진藩鎭(지방의 권력자) 발호의 시대'라 부른다.

이정기는 다른 지역 절도사와 정략결혼 등으로 연계하면서 산둥반도와 그 주변 13개 주를 장악했다.

781년 이정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왕국은 3대까지 55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李師道 시절 산둥성 서남단 서주西周의 왕지홍은 이사도의 반대 세력을 모아 이사도를 몰아냈다.

이때가 819년 2월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사도를 공격한 왕지홍 군대의 선봉 부대인 무령군武寧軍의 하급 병사로 있다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교가 된 이가 있었다.

바로 장보고張保皐였다.

안사의 난 이후 코리아가 배출해 낸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역사의 꼬리를 물고 잇달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기 일가가 토벌된 뒤에도 많은 고구려 후손들이 산둥반도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산둥은 과거 동이족의 영역 안에 있었고, 또 신라인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화교 가운데 산둥 출신이 가장 많고 한국의 기업들이 중국에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곳도 바로 산둥이다.

 

※이 글은 안형환 지음, 국경을 넘은 한국사(김영사,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2.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