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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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100년 만에 되돌아온 북관대첩비

새샘 2015. 10. 15. 13:52

<2005년 반환되어 2006년에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의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1592년 임진왜란 함경도 일대에서 벌어진 최대 육상전 북관대첩!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쟁의 신 가토 기오마사 부대 2만 2천여 명' vs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 200명'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패퇴한 왜군!

   <왜군의 함경도 침략 당시 북평사 정문부의 활약상을 그린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1905년 러일전쟁 중 북진하던 일본군은 함경북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다.

"이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이케다 쇼우스케(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소장)"

비석은 강제로 떼어져 콘크리트 더미에 몸체를 박고 무거운 머릿돌로 눌린 후 비석의 내용을 부정하는 안내판까지 설치된다.

그리고 70년 후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강제로 뽑혀 온 비석 하나

한 한국인 사학자의 공개로 밝혀진 북관대첩비의 존재

<야스쿠니 신사에 서 있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1979년 한국 정부, 일본에 반환 요구

1996년 일본 승려 가키누마 센신, 야스쿠니 신사에 반환 촉구

2000년 한일 불교계, 반환운동 공동추진 합의

2004년 북관대첩비 환국 범민족운동본부 발족

한결같은 야스쿠니 신사의 답변

"비석은 북한의 길주에 있던 것이니 남북이 통일되면 돌려주겠다."

 

2005년 강제로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되던 해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 중에서-

2006년 북관대첩비는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朝鮮國咸鏡道臨溟大捷碑

 

북관대첩비의 정식 이름은 비가 서 있던 지명을 따서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이며, 비문의 첫 줄에는 '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朝鮮國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북관대첩비는 말 그대로 북관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북관은 오늘날의 함경도로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1565-1624)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크게 무찌른 일을 기념해 1709년(숙종 35년)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1669-1720) 현재 비석이 서 있는 함북 길주군 임명면에 건립한 것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의 비석에는 1,50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의병들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서 넘긴 국경인을 처형한 전말 등이 소상히 적혀 있다. 

 

그런데 왜 비석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세워질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 초기 지역마다 '의로 뭉친 군인' 의병이 나타났고 북관도 여지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북관대첩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문부는 무사의 재능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하려 해도 군사가 없어 산골짜기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병이 궐기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용기를 내 기꺼이 여기에 참가했다."

 

스물여덟 살의 정문부는 북평사라는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민의에 부응해 그보다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함경도의 의병투쟁은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남쪽의 왜군과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북쪽의 여진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내부의 적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모인 의병부대는 조직으로 보면 오합지졸이었고, 상대해야 할 적장은 가토 기요마사였다. 하지만 정문부를 비롯한 북관의 의병들은 1592년 9월부터 반년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의 왕자들을 왜국에게 넘겨준 역적들을 소탕했고, 경성, 임명, 단천, 백탑교에서 여덟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해 함경도에서 몰아냈다. 하급 무관이 이끈 200여 명 의병부대가 명장 지휘하의 2만 명 정예부대를 크게 깨부순 것이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승기를 잡았다면, 육지에서는 정문부가 왜군의 기세를 꺾어놓은 것이다. 이 시기 지상에서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해상에서 퇴로가 막히면서 엄청난 약탈과 강도짓을 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역설적이게도 육지에서 왜군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정문부의 의병이 해결한 것이다.

 

하지만 조정은 정문부 의병장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북관의 최고 관직자인 북변순찰사 윤탁연이 계속 왜곡된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후 정문부는 혼탁한 당쟁의 와중에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투옥되었다. 인조반정 직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문부는 병석에 누워 있어 왕명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탄핵을 받고 말았다. 60세에 그가 숨을 거둔 곳은 감옥 안이었다.

 

정문부의 억울한 사연은 44년 후에야 밝혀졌고 그에겐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생전에 조명받지 못했던 그의 공도 서서히 드러나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주민의 뜻을 모아 함경북도 길주에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북관대첩비의 주인공 정문부는 그 공적에 비해 후대에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된 데는 남북분단이란 상황도 한몫했다. 정문부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은 북한 소설가 리유근의 '관북의 병장' 하나 뿐이다.

 

100년 뒤에 드러난 진실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혼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가지 못하고 한 차례 기구한 운명에 처한다. 200여 년 세월이 흘러 다시 북관은 전쟁의 포연에 휩싸인다. 1904년 일본이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키면서 발발한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함경도 지방에 잠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여단장 이케다 쇼우스케는 북관대첩비에 적힌 비문을 읽게 된다. 일본군의 치욕스러운 패전 기록을 본 그는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가져가버렸다. 북관대첩비는 히로시마를 거쳐 도쿄로 이송됐다가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도쿄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그야말로 방치됐다. 북관대첩비의 잃어버린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한국인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1887-1958)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그는 구한말 도쿄 한국인 유학생의 잡지인 '대한흥학보'에 비의 발견 경위와 비문 전문, 애통한 소감을 '함경도 임진의병대첩비문'이란 제목으로 투고했다.

 

조소앙 선생 다음으로 이 대첩비를 찾아본 제2의 발견자도 있다. 익명의 이씨이다. 1926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 그해 9월 16일, 이씨라는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북관대첩비를 확인하고 자세히 보려다가 일본 헌병에게 금지를 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당시 이 비석 옆에는 안내문이 있었는데, "이 비에 대첩이라 했지만 사실과는 상반된 것이니 믿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이 소중한 비가 일본에 의해 혹시 없어질까 봐 안타까워 한국 사람에게 알려 달라고 언론을 통해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도 응답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시기를 거치면서 북관대첩비의 존재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고구려의 왕계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광개토왕비와 왜적과의 싸움을 증언한 북관대첩비는 이렇게 쌍생아처럼 외세의 손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일본은 북관대첩비를 강탈해 치욕적인 과거를 숨기려 했지만 역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북관대첩비는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함경도에서 약탈한 지 70년이 지난 뒤,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 박사는 잡지에 실린 조소앙 선생의 글을 접하고 이를 근거로 야스쿠니 신사 경내를 뒤져 찾아냈다. 정태수 종친회장은 최서면 박사에게 소식을 듣고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북관대첩비를 처음 봤을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너무나 초라하게 모셔져 있었다. 신사 정면에서 우로 또 우로 꺾으면 2층짜리 비둘기집이 있고, 그 옆의 나무 숲속 어두컴컴한 담 옆 숲이 있다. 그 속에 서 있었다. 비신碑身만 빼앗아갔던 것이라, 일본 현지의 모양 없는 돌로 비대碑臺를 받치고 비모碑帽가 씌워져 있었다. 거의 방치되어 비둘기 똥을 둘러쓰고 있었다."

 

이때부터 의병장 정문부의 후손인 해주 정씨 종친회 등 민간 차원에서 반환운동이 전개됐다. 북관대첩비 환국을 위한 범민족운동본부가 발족했고 비문에 적힌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냈다. 일본은 계속 발뺌했다. 북관대첩비의 원래 소재지는 북한인데 반환을 요구하는 측은 한국이라는 점을 이용해 일본은 비의 반환을 계속 미뤄왔다. 일본 정부는 비의 현 소재지가 야스쿠니 신사라는 점을 들어 민간소유 재산은 정부의 권한 밖이라고 했고,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이 있어야 한다면서 서로 책임을 회피했다.

 

27년 동안 각계의 끈질긴 반환 노력이 계속됐다. 민간 차원에서 성과를 바탕으로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정부는 "남북이 합의해 한국측이 정식으로 반환을 요청하면 비석을 보관 중인 야스쿠니 신사에 말해 반환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남북은 공동으로 반환 운동을 벌였다. 드디어 북관대첩비가 고국을 떠난 지 곡 한 세기가 흐른 2005년 한일 양국은 '북관대첩비 반환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 서명 8일 후 한국에 도착한 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돼 일반인에게 공개되다 2006년 3월 현지 복원을 위해 북한에 전달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 북한은 이를 기념하는 120원짜리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 귀환 축하행사를 가졌다. 이 과정은 남과 북이 하나의 역사로 서로 만나고 뜻을 통한 사건이기도 했다.

 

북관대첩비 환수는 지난 1세기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다. 단순히 문화재를 되찾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잃어버렸던 역사를 남북한이 힘을 합쳐 되찾았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북관대첩비 환수는 남북교류사, 특히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 반환과 관련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우리는 왜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아야 하는가?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궤 등 강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중심 역할을 맡은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 사무처장 혜문스님은  문화재 반환운동을 추진하면서 수없이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가 찾은 대답은 이렇다.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일은 우리의 슬픈 역사와 짓눌린 역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시 찾는 것과 진배없다. 문화재 반환은 자기 상실을

극복하는 첫 단계다.

 

이 글은 EBS·국사편찬위원회 공동기획, 역사채널e 지음,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e'((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13)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5. 10.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