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세계 권력에 가장 가까웠던 글로벌 교양인 고려 충선왕 본문
<출처: http://typhon.pe.kr/208>
고려 제26대 국왕 충선왕忠宣王(1275-1325, 재위 1298년, 1308-1313년)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한국인 가운데서 세계 권력에 가장 가까이 가 있었고 가장 국제화된 인물이었다. 한국 왕자와 원제국 황제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충선왕은 그 탄생부터 평범하지가 않았다. 아버지 충렬왕忠烈王과 원元나라 초대황제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본명은 쿠틀룩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 시호는 장목인명莊穆仁明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선왕은 몽골로부터 고려를 지키기 위한 24대왕 원종元宗의 선택과 결단의 산물이었다. 몽골이 침범해오자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면서까지 대제국 몽골과 맞서던 고려는 40여 년간의 항쟁 끝에 결국 1270년 몽골에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 있는 동안 고려의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몽골군에 학살당하거나 끌려갔다. 따라서 당시 백성들을 포기하고 결사항전을 선택한 고려무신정권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당시 태자이던 원종은 23대 국왕 아버지 고종高宗의 대리인 자격으로 몽골 수도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北京)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몽골 제4대 칸 몽케夢哥가 원정지인 중국 사천四川(쓰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딴 곳으로 돌렸다. 황제가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남쪽 악주岳州(지금의 웨양岳陽)에서 북쪽으로 돌아가던 쿠빌라이를 찾아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조 황제(쿠빌라이)가 강남에서 군사를 돌릴 때 우리 4대조 충경왕(원종)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6천 여리 산을 넘고 물을 건머 양초梁楚의 땅에 가서 절하고 맞이하니 세조 황제께서 큰 포상을 베푸시고 즉시 성훈聖訓을 내려 '국속國俗을 고치지 말고 예전처럼 관리하라'고 하셨다."
원종이 쿠빌라이를 택한 것은 사실상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크부카와 황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아직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종은 권력을 장악할 인물은 쿠빌라이일 것이라 판단 했던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쿠빌라이 수렵도-쿠빌라이 칸이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중앙에 쿠빌라이 칸과 황후가 있고 양쪽 황가 시위대에는 남아시아인도 있고 중앙아시아인도 있다. 원나라 유관도 劉貫道의 작품:
쿠빌라이는 "고려는 1만 리 밖에 있는 나라로 당 태종도 친히 쳤으나 정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라다"라며 반갑게 원종을 맞이했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원종을 한 나라의 국왕으로 대우하며 자신의 진영에 머물도록 했다. 1260년, 마침내 황위에 오른 쿠빌라이는 고려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원종에게 고려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쿠빌라이는 이와 함께 두 나라가 한집안이 될 것을 약속하였다. 뒤에 쿠빌라이는 약속을 지켜 자신의 딸과 원종의 태자 왕심王諶(충렬왕)을 결혼시킴으로써 원종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또한 고려는 쿠빌라이의 약속대로 독자적인 왕호를 사용하며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국토가 줄어들고 내정간섭을 많이 받긴 했지만 몽골이 정복한 나라 가운데 국가의 이름과 왕실을 유지한 곳은 고려뿐이었다. 고려가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원의 무종武宗이 1310년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조서詔書: 임금의 명령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적은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다.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 우리의 선왕 때로부터 그 후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서로 장인과 사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며 어떤 나라보다 먼저 국교를 맺었으니 추숭追崇(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하는 예절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원종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6천여 리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을 하고, 판단이 어려운 상황에 현명한 결단을 내려 고려를 살릴 수 있었다. 만약 원종의 결단이 없었다면 고려는 원나라의 일개 성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민족의 역사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었다. 지도자의 현명한 판단과 결단이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1274년 5월 원나라 황궁에서 고려 왕세자 왕심王諶(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쿠틀룩켈미쉬)의 결혼식이 열렸다. 당시 왕심은 39세의 기혼남이었고 제국대장공주는 16세의 어린 처녀였다. 왕심이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것이다. 쿠빌라이는 칭지즈칸의 손자로 몽골제국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원나라의 초대황제 세조世祖가 아닌가!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왕심은 결혼 직후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고려 제25대 충렬왕이다. 황제의 사위가 됨으로써 원나라에서 충렬왕의 정치적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원 황실이 연회를 열 경우 서열에 따라 자리를 앉게 되는데 충렬왕의 서열은 7위였다. 쿠빌라이의 아들이 12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렬왕은 일반 신하들은 물론 쿠빌라이의 웬만한 아들들보다 더 서열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난 후 2대 성종成宗 테무르가 황위에 오르자 충렬왕의 서열은 4위로 뛰어올랐다. 성종 테무르는 충렬왕 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조카, 즉 큰오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충렬왕은 이와 같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여러 가지 이익을 챙겼다. 그중 하나가 고려에서 대도(베이징)에 이르는 교통로에 고려인 촌락을 만든 것이었다. 충렬왕는 고려 왕과 왕후가 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고려와 원 사이에 사신이 자주 왕래하니 편의를 제공할 촌락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빌라이에게 이를 요구했다. 쿠빌라이 황제가 흔쾌히 허락하자 충렬왕은 고려 주민 400호를 이주시켜 이르겐伊里于(백성을 뜻하는 몽골어)이라는 특수 촌락 3개를 세우게 했다. 이들 이르겐은 고려가 관할했으며 후일 충선왕이 심양왕瀋陽王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충선왕은 바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충선왕의 몽골 이름은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였다. 이는 쿠빌라이의 부인, 즉 외할머니가 직접 지어준 것으로 '젊은 황소'라는 뜻이었다. 충선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아버지 충렬왕을 능가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70세가 넘은 노황제 쿠빌라이는 외손자를 끔찍이 아꼈다. 1291년 만주 지역에서 원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합단哈丹의 군사들이 고려를 쳐들어왔을 때 충선왕이 할아버지에게 말해 1만 명의 지원 병력을 받아냈고 전쟁 후에는 쌀 10만 석을 얻어내기도 했다.
1296년 충선왕은 몽골 진왕 카말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薊國大長공주(보다시리寶塔實憐)와 결혼했다. 카말라는 당시 황제였던 성종 테무르의 형이었다. 따라서 보다시리는 황제의 조카가 된다. 충선왕은 전 황제의 외손자이자 현 황제의 조카사위였다. 당연히 몽골 황실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몽골 황궁에서 열린 그의 결혼식은 3개월 동안 계속됐다고 한다.
1298년 충선왕은 고려 26대 왕이 되었다. 충선왕은 사실 고려인이라기보다는 몽골인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몽골인이고 어린 시절을 대부분 몽골 황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성종 테무르가 죽은 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을 때 개입했는데, 그가 지지했던 3대 무종武宗 카이산 황제가 황위에 올랐다. 충선왕은 카이산뿐만 아니라 카이산 황제의 뒤를 이은 4대 인종仁宗 아유르바르와다 황제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충선왕은 카이산보다는 여섯 살이 많고 아유르바르와다보다는 열 살이 위였지만, 어린 시절 황실에서 친형제처럼 지냈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로 건너간 이제현(1287-1367)은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세 사람은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며 밤낮으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썼다.
충선왕은 황제 옹립에 큰 공을 세운 대가로 중서성의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원의 황제 인종은 한때 우승상 직을 제의할 정도로 충선왕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충선왕은 대도에 머물며 원 제국의 국정과 종교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이는 충선왕이 성리학과 불교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충선왕은 제안대국 왕숙王淑에게 국정을 대행하게 하고 귀국하지 않았는데 이때 충선왕은 요동 지역을 관장하는 심양왕과 고려왕이라는 2개의 왕좌를 가지고 있었다.
충선왕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인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황태자 시디발라가 제위를 이어받으니 그가 바로 5대 영종英宗이다. 영종이 어머니인 흥성태후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자 충선왕은 강남 지역으로 도피하려다 체포됐다. 영종은 충선왕을 고려로 압송하려 했으나 충선왕은 이를 거부하고 대도에 머무르며 정세를 관망했다. 그러자 영종은 충선왕을 형부에 수감시키고 얼마 뒤에는 티베트에 유배를 보냈다. 한국인으로서 티베트에 유배된 사람도 충선왕이 처음일 것이다.
1323년 영종이 21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자 충선왕의 처남 예순테무르가 6대 진종眞宗 즉 태정제泰定帝로 추대됐다. 태정제는 즉위하자마자 충선왕을 티베트에서 불러들여 다시 고려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했지만 충선왕은 굳이 사양했다. 권력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충선왕은 귀국하지 않고 대도의 저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325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충숙왕은 충선왕의 영구를 서경으로 모셔와 장례를 치렀다.
다음은 이제현이 충선왕에 대해 평한 글이다.
"성품이 현자賢者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무엇이든지 한번 듣고 본 것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매양 선비들을 모아놓고 옛날 국가들의 흥망에 대해서와 임금과 신하들의 잘하고 잘못한 점을 논평하고 연구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이었다."
충선왕은 당시 원나라에서도 가장 세계화된 교양인이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충선왕만큼 권력을 누린 인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글은 안형환 지음, 국경을 넘은 한국사(김영사,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2. 2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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