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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신사임당 "포도"

새샘 2016. 3. 1. 22:38

<우리가 아는 사임당의 이름에 가장 가까운 그림>

신사임당, 포도, 비단에 수묵, 31.5x21.7cm, 간송미술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우리 역사상 회화예술이 가장 크게 발전한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학문적 깊이와 예술적 소양을 겸비해야 제대로 된 문인이라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서화 감평과 창작 능력은 조선 문인들의 교양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기부터 많은 화가들이 배출되며 다양한 작품들이 양산되었지만, 대체로 문헌기록으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며 현전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나마 확실한 증거를 지닌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실제 작품을 보아 가며 옛 그림들의 이야기를 요모조모 풍성하게 풀어 가려면 조선 중기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

이것이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포도葡萄>를 첫머리에 내놓은 까닭이다.

하지만 사임당의 그림도 만만치 않은 난제들을 안고 있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사임당 신씨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으며, 시문과 서화에 모두 능했던 문인으로도 명성이 높다.

특히 그림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현전하는 작품도 상당하여 동시대에 활동했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들이 그녀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는 아니었다.

더구나 불과 48세에 타계한 것을 감안하면, 평생동안 그림에만 전념했던 전문 화가들보다 유작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히 않은 구석이 있다. 

사실 수십여 점을 헤아리는 신사임당의 작품 중 이론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를 지닌 기준작은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화품의 편차가 너무 커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처럼 신사임당의 그림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전문가라 하더라도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난제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언뜻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학술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그림, 그것이 바로 신사임당의 그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녀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자당께서는 묵적墨迹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했다.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것들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이 널리 전해진다."

 

율곡이 사임당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서 쓴 글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썼으니 다소의 꾸밈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임당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문인인 소세양蘇世讓(1486~1562)은 그녀의 산수화에 대해 "묘한 생각과 기묘한 종적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찬탄했고, 어숙권魚叔權(?~?)도 "산수와 포도 그림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

이것으로 보면 율곡의 글이 아니더라도 사임당이 그림에 범상치 않은 재능을 타고났으며, 생존 당시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글들을 읽다 보면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에게 신사임당의 특기로 알려진 초충草蟲(풀과 벌레) 그림에 대한 언급은 없고, 산수와 포도에 대해서만 칭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문인들이 언급한 몇몇 글을 살펴보아도 산수와 포도, 혹은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했을 뿐, 초충이나 화조花鳥(꽃과 새)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신사임당이 잘 그렸던 그림은 초충이나 화조가 아니라 산수와 포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사임당이 초충이나 화조를 잘 그렸다는 통념과 그녀의 유작으로 전해지는 많은 초충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율곡학파의 3대 수장이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쓴 글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그림은 돌아간 중찬성 이 공 李公, 이원수의 부인 신 씨가 그렸다.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자연스러워 사람의 힘으로는 범할 수 없는 것이다.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와 융화를 모아 이로써 참다운 조화를 이루셨다.

 마땅히 그가 율곡 선생을 낳으실 만하다."

 

우암에게 신사임당은 훌륭한 화가이기보다는 율곡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위상이 더 중요했다.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은 산수보다는 초충이나 화조가 제격이었다.

우암은 작품의 진위나 아름다움보다는 현모양처가 지닌 덕성의 산물로 초충도를 이해하고 상찬했다.

우암의 영향력만큼이나 그의 글이 미친 영향력은 무척 컸다. 

우암을 추종한 조선 후기의 율곡학파 문인들은 신사임당의 실체보다도 우암에 의해 규정된 모습을 진실에 가깝게 느꼈다.

이런 이유로 신사임당이 활동하던 당시와 달리 초충도가 신사임당의 대표적인 그림을 자라잡게 되었던 듯하다.

 

조선 후기는 율곡학파가 대세를 장악했고, 이와 비례하여 신사임당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율곡학파의 문인들에게 신사임당의 그림은 마치 가문의 품격과 위상을 담보하는 문장紋章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신사임당의 작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많은 모작과 위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초충도의 대가로 인식되었기에 많은 초충도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양산되었다.

이것이 그녀의 작품이 초충도 위주로 남아 있는 이유이며, 또 그녀의 작품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신사임당, 훤원석죽 萱 菀石竹(원추리꽃과 패랭이꽃), 종이에 채색, 41.0x25.7cm, 간송미솔관: 꽃밭에 원추리꽃, 패랭이꽃, 개미취꽃이 어울려 피었다. 꽃향기를 좇아 흰 나비 두 마리가 하늘하늘 날아들고, 땅에는 도마뱀이 몸을 틀어 먹잇감을 찾고 있다. 안정된 구도와 섬세하고 온화한 표현, 소박하지만 정갈한 채색에서 규방의 미감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이와 유사한 초충도 다수가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 내려온다. (사진 출처-출처자료)

 

이 <포도> 역시 사임당의 이름으로 전해 오는 대개의 그림들이 그렇듯이 낙관이나 관지가 없다.

현재는 진경시대 후반기의 대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이 수집한 그림들을 모아 놓은 ≪해동명화집海東名畵集≫ 속에 들어 있다.

 

그림 오른쪽 위에 제목에 해당하는 글이 적혀 있다.

"사임당이 엷은 먹물로 그린 포도 (사임당수묵포도 師任堂水墨葡萄)

 동계 조구명이 글을 짓고        (동계조구명제 東谿趙龜命題)

 김이경이 글을 쓰고              (김이경서 金履慶書)

 김광국이 공경하면서 다       (김광국관 金光國觀)"

 

별도의 종이에 써 놓은 제사題詞(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 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임자 윤달 15일에                         (임자윤월지망 壬子潤月之望)

 월성 김광국이 손을 씻고 삼가 배관한다  (월성김광국관수경관 月城金光國盥手敬觀)"

 

이 내용으로 미루어 정조 16년(1792년) 윤4월 15일에 처음 구득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앞에는 그림 감평에 일가견이 있던 영조시대 문인 동계東溪 조구명趙龜命(1693~1737)이 쓴 제사도 있다.

 

"우계와 율곡이 함께 유림을 머뭇거리게 했었는데 (우율병치유림 牛栗竝跱儒林)

 청송의 글씨와 신 부인의 그림도                  (이청송서신부인화 而聽松書 申夫人畵)

 모두 세상에 이름을 날린 빼어난 재주였으니     (우계명세절예 又皆名世絶藝)

 이 또한 한 가지 기이한 일이다                    (역일기야 亦一奇也)"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은 율곡과 더불어 서인을 이끌었던 문인이자 유학자였다.

우계의 부친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4)은 글씨에 빼어났고, 율곡의 모친인 사임당이 그림에 뛰어난 것이 기이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아마도 선대의 업적을 거론하며 <포도>가 사임당의 진품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것 같다.

 

포도는 빼어난 풍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훗날 다양한 상징성을 더해 가며 글과 그림의 소재로도 얘용되었다.

포도의 함의含意(말이나 글 속에 들어 있는 뜻)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다자多子' 즉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다.

알처럼 생긴 열매가 풍성하게 모여 있는 포도송이와 왕성하게 벋어 가는 줄기에서 강한 생식력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포도가 지닌 덕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줄기가 수척한 것은 청렴함이요, 마디가 굳센 것은 강직함이요

  가지가 약한 것은 겸손함이요, 잎이 많아 그늘을 이루는 것은 어진 것이요

  덩굴이 벋더라도 의지하지 않는 것은 화목함이요

  열매가 과실로 적당하여 술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재주요

  맛이 달고 평담하며 독이 없고, 약재에 들어가 힘을 얻게 하는 것은 쓰임새요

  때에 따라 굽히고 피는 것은 도이다.

  그 덕이 이처럼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마땅히 국화, 난, 매화, 대나무와 더불어 선두를 다툴 만하다."

 

명나라의 명필가이자 화가인 악정岳正(1418~1472)은 이처럼 포도를 사군자에 견줄 만한 덕성을 지닌 식물로 치켜세웠다.

이런 상징성과 더불어 단순한 색감과 형태가 문인들의 취향에 들어맞으면서 포도는 문인화의 주요한 소재로 자리잡는다.

조선의 문인들이 포도 그림을 즐겨 그리고 감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 그림도 이런 배경 아래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그림이 다소 잘린 감이 없지 않지만, 화면의 중심선을 따라 줄기를 내려뜨리고 하단부에 넓은 잎과 큰 포도송이를 배치하여 안정된 구도를 취했다.

짙고 옅은 먹을 적절히 구사하여 싱그럽게 익어 가는 포도알의 양태를 잘 옮겨 냈다.

또한 젊고 싱싱한 줄기는 진한 먹으로, 늙고 오래된 줄기는 옅은 먹으로 처리하여 생동감과 변화감을 살려 냈다.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임에도 포도의 외양과 풍취가 생생하게 전해 온다.

전문 화가 못지않은 숙련된 솜씨로, 당대 최고의 필력과 기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규방의 취미로 그림을 그렸던 신사임당이 이런 솜씨를 지니고 있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부드러운 필치와 담백하고 섬세한 묘사에서는 여성적인 우아함도 느껴진다.

이런 까닭에 이 그림이 오랫동안 사임당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간직되었을 것이다.

 

<포도> 역시 사임당의 붓끝에서 나온 작품임을 확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해 나름대로의 전거典據(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를 갖추고 있기에, 사임당의 작품에 가장 근접해 있는 그림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후대에 윤색되지 않은, 사임당 본연의 장점을 실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기억하고 싶어 했던 사임당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그림의 가치는 충분하다.

 

 

새샘이 찍은 오만원권 지폐 사진

 

현재 5만원 권 지폐에 실린 신사임당의 초상 옆에 도안으로 들어간 포도 그림이 이 작품을 모본으로 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들어가야 했다면, 이 <포도> 외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학술적인 안목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주저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이 대목에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고 싶다.

이 그림마저 아니라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더욱 자취를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3백년 전 문인들의 말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3.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