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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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청풍계"

새샘 2016. 4. 10. 21:58

인왕산 동쪽 기슭 청운동 골짜기를 일컫는 청풍계淸風溪는 진경문화를 주도한 선비들의 자취가 스민 맑은 계곡이다.

<淸風溪, 정선, 비단에 담채, 133.0×58.8㎝, 간송미술관>

 

겸재謙齋 정선鄭(1676-1759)은 우리나라 회화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긴 거장으로 칭송받는다. 그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칭송하고 기리는 이유는 단지 중국풍의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실제 우리의 산천을 그렸다는 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겸재는 우리 산천을 사실적으로 사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자긍에 찬 시각으로 온전하게 화폭에 옮겼다. 자신과 주변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이를 형상화시켜 낼 수 있는 이론과 실기 능력이 겸비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겸재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과 화풍으로 한양 일대와 금강산, 관동, 영남 지역 등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사생을 하여 다수의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한양과 그 주변의 경관을 담은 그림이 가장 많다. 특히 인왕산 기슭에서 백악산 계곡에 이르는 승경지를 많이 그렸는데, 당시에는 장동壯洞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현재의 서울 효자동과 청운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겸재 역시 지금의 경복고등학교 근처에서 나고 자랐다.

 

 

<청풍계, 정선, 종이에 담채, 33.7×29.5㎝, 간송미술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 장동의 여덟 승경을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들어 있는 작품. 비교적 작은 화면이라 청풍계 내의 건물들을 한편으로 몰고 주변 봉우리들로 에워싸 청풍계의 전모를 드러냈다. 세로 축으로 긴 화면을 가진 본문의 청풍계와는 또 다른 시각법을 적용한 화면 구성이다. 겸재는 이처럼 다양한 형식으로 청풍계를 여러 차례 그렸다. 겸재가 얼마나 자주 이곳을 드나들었으며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만하다.>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그린 <청풍계淸風溪>도 그중 하나이다. 청풍계는 겸재가 가장 즐겨 그리던 장소 중 하나이다. 청풍계를 그린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만도 다섯 점이 더 있. 겸재의 진경산수화 중 금강산을 전도全圖식으로 그린 작품을 제외한다면 수적으로 가장 많다. 이처럼 겸재가 유독 청풍계를 많이 그린 데에는 청풍계의 경관이 빼어났던 탓도 있지만, 남다른 사연이 있다.


  청풍계는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경관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놀며 즐길 만하다.

  집 안에 태고정과 늠연당이 있어 선원의 초상화를 모셨다.

  후손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창의동 김 씨라 한다.

  시냇물 위 바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실린 청풍계에 관한 글이다. 청풍계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초상화를 모셨으며 창의동 김 씨라 불리는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부분이 바로 겸재가 청풍계를 자주 그린 의문을 풀어 주는 열쇄이다.


겸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사대부 출신의 문인이었다. 겸재의 광주 정 씨 집안은 명문가 중 하나였지만, 겸재 대에는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하고 만다. 겸재의 증조부가 벼슬을 사양하다 40세에 요절하고, 조부와 부친이 출사를 하지 못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런 겸재가 당대 문예계를 선도하는 당당한 문인화가로서 발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장동 김문의 역할이 지대했다. 장동 김문은 16세기 이후 서울에 세거한 안동 김 씨 가문을 가리킨다.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들 대에 명문의 기초를 다진 뒤, 조선 후기 정치·사회·학예에 중추적인 문벌로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


겸재는 김상헌의 손자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제자였다. 겸재가 조선 최고의 가문에 당대 최고의 문명을 떨치던 삼연의 문하에 들어가 장동 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광주 정문과 장동 김문 두 집안 사이에 오랜 교제가 있었던 덕분이다. 겸재의 고조부와 삼연의 고조부는 인왕산 일대에서 이웃하고 살며 당대 명사들과 더불어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당나라 문인 백거이가 조직한 모임으로 은둔한 선비들의 고상하고 우아한 풍류를 상징)를 본뜬 구로회를 결성했을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겸재가 속한 학파인 백악사단白岳詞壇의 본거지이자, 스승 가문의 세거지이며, 자신의 가문와 스승의 가문이 오랫동안 친교를 나누었던 현장이 바로 청풍계이다. 이런 곳이니 청풍계는 겸재에게 그저 경치가 좋은 승경지가 아니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지닌 사회적 위상을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현전하는 여섯 폭의 청풍계 그림은 겸재의 이런 인식과 경험의 산물이다. 그중 여기에 소개하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는 크기도 가장 클 뿐만 아니라, 품격과 수준에 있어서도 단연 압도적이다.


바위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 안에 버드나무,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여 계곡의 맑은 바람이 눈에 잡힐 듯하다. 이곳을 왜 청풍계라 했는지 알 만하다. 김상용의 초상화를 모셨다는 늠연당이 그림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 띠풀로 지붕을 올린 정자는 정조가 들러 잠시 쉬어 갔다는 태고정이며, 담장 안 누각 형태의 건물은 청풍지각이다. 함벽지를 비롯해 곳곳에 자리한 연못들은 육중한 인왕산 암벽, 창연한 노거수들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여유롭고 안온한 정취를 자아낸다.


복선 쓴 선비가 막 나귀에서 내려 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현존하는 청풍계 그림 중 유일하게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어쩌면 겸재 자신이거나 타계한 스승 삼연을 떠올리며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어떤 청풍계 그림보다 현장감과 실재감이 두드러진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각인 고원高遠법을 적용하여 경물들을 수직으로 쌓아 놓음으로써 창대한 느낌을 연출했다. 과도하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진경문화를 주도했던 장동 김문의 격조와 기품이 절로 느껴진다. 평소 청풍계에 대한 겸재의 생각과 느낌이 이러했을 것이다.



<청풍계 부분-복건을 쓴 선비가 나귀에서 내려 청풍계 경내로 들어서고 있다. 겸재 자신이거나 타계한 스승 삼연의 생전 모습을 그린 듯하다. 작은 부분임에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겸재가 산소 못지않게 인물에도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기미년 봄에 그렸다 기미춘사己未春寫'는 관서가 있어, 겸재가 64세 되던 해인 영조 15년인 1739년에 그려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법이 본 궤도에 올라 절정으로 치달아 가던 시기이다. 부벽찰법斧劈攃法(도끼로 쪼갠 단면처럼 붓으로 쓸어내려 절벽을 묘사하는 기법)으로 대담하게 쓸어내린 바위와 단순명쾌한 나무의 묘사, 음양을 적절히 조화시킨 화면 구성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겸재의 문예 기반과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줌과 동시에 겸재의 특징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최상의 걸작이다.

 

정선鄭敾(1676~1759)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 겸재謙齋.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하고 성행시켰다는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를 정선파라고 부른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4.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