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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회 사문, 유구국, 베트남 등지에서 귀화한 외래 성씨들

새샘 2016. 6. 8. 11:56

 고려시대에는 원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고려와 와서 살았다. 왕조가 바뀐 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조선 땅에 살면서, 또 일부는 새로 귀화해와서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상업 활동과 왕실과의 거래를 계속했다. 세종 초기의 기록을 보자

"오도리吾都里 지휘指揮,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바얀티무르)와 아하오랑합阿河吾郞洽 천호千戶 도로都老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므로, 서랑西廊에서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권7, 세종 2년 1월10일자"


특히 위의 기록에 나오는 도로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태종 때 처음 조선에 들어온 듯하다.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가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 살게 하였다.-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17일자"


도로는 수정을 채취해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쳐 왕의 신임을 받았고 왕은 그에게 전국의 수정을 캘 수 있도록 허용했다. 무슬림 도로는 조선왕조실록에 항상 회회 사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문은 일반적으로 성직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도로는 당시 조선에 있었던 무슬림 공동체에서 종교 지도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조선 초에도 무슬림들이 비교적 조직적인 집단을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전통 의식 보존에 대해 묵시적인 동의를 받아 토착 문화와 별다른 갈등 없이 15세기 초 조선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궁중 의례에까지 정기적으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다음으로 승려 및 회회인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하고 끝나면, 판통례判通禮가 끓어 엎드려 예를 마쳤다고 아뢴다. 통천通贊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9월27일자"


당시 승려들과 함께 궁중 연회에 참석한 무슬림들은 그들 고유의 의식으로 축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코란을 낭송하며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는 궁중에서 코란이 읊어지던 시대였다.


고려시대 무슬림들은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원은 물론 고려에서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개성 인근에서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지키면서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조선 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만 해도 무슬림들은 고려시대의 개방적, 국제적 분위기를 이어 받은 조선의 포용 정책에 힘입어 조선인들과 마찰을 빚지 않는 범위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점차 무슬림들에게 동화 정책을 쓰기 시작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들이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래로 따랐다.-세종실록 권36, 세종 9년 4월4일자"


이후 무슬림들은 조선의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아마도 이들은 조선에 동화되어 조선인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 가운데는 바로 이들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들이 있다.



세종 때에는 일본의 막부와 호족이 보낸 사신과 상인 집단이 대거 조선으로 들어왔다. 일본인들은 서울에 오면 왜관倭館(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그들은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정월 초하루 의식에 참석했는데 조선 국왕을 황제 또는 폐하라 부르고 자신들은 신이라고 칭했다. 조선을 대국으로 받드는 외교문서도 가지고 왔다.



이들 막부나 호족이 보내는 사신이 매년 1천여 명이 넘자 조선 정부는 이들을 접대하는데 부담을 느끼기 시작해 중기에 이르러서는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손실이 너무 컸던 것이다. 사실 조선은 겉으로는 일본 막부와 대등한 교린 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기피의 대상으로 보았다. 특히 세종은 막부는 물론 유력한 다이묘대명(지방영주)들과 동시에 통교를 맺는 다원 정책을 썼다. 한마디로 여러 세력들에 대해 기미정책을 쓴 것이다.



조선이 여진이나 일본처럼 대우한 또 다른 나라가 있다. 바로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 제도에 있던 나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에 대한 기사가 437건이나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유구인들은 계속 사신을 보내 종공을 하고 발달된 조선의 문물을 배워가려 했다. 그리고 표류한 조선인들을 잘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유구국은 1879년 일본에 귀속되기 전까지는 독립국이었는데 유구는 한반도와는 선사시대부터 꾸준한 교류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소바다식曾畑式 토기와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석관묘가 발견된다. 또 오키나와 각지에서 상감청자가 출토되고 고려 광종 대에 만들어진 동종과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글이 새겨진 기왓장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면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때는 유구국에서 조선 기술자를 초빙하여 병선을 짓게 했다. 배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한편 양국의 기술을 비교하기 위해서 였다. 또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홍길동이 이상향으로 선택한 율도국이 바로 유구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조선 태조 3년(1394)에 유구국의 왕이 조선에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구국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내전에서 패해 휘하 15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온 것이다. 유구국에서는 사신을 보내 산남왕의 송환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응하지 않고 온사도를 후하게 대접했다. 조회에 두 차례나 참석시킬 정도였다. 온사도는 그러나 조선에 온 뒤 4년 밖에 살지 못하고 태조 7년(1398)에 사망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후 진양(지금의 진주)에서 살았던 온사도는 비록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부하 15명의 자손들은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과 살고 있을 것이다.



온사도에 앞서 남쪽 나라에서 온 왕족 망명객이 또 있었다. 고려 고종 13년(1226)에는 베트남의 첫 독립국가인 리왕조(1009-1226)의 9대 왕인 혜종의 숙부이자 총사령관이었던 이용상李龍祥이 한반도로 망명 왔다. 이용상은 반란군에 의해 왕족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3,600킬로미터를 항해해 서해안 옹진반도의 화산에 도착했다. 때마침 몽골군이 이곳을 침입해오자 이용상은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침략군을 물리쳤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고종은 이용상에게 화산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 성을 하사했다. 이후 이용상의 장남 간幹이 예문학 대제학을 지내는 등 화산 이씨 집안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지난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에서 베트남을 찾았을 때 베트남에서는 리왕조의 유일한 왕족의 후손이 왔다며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이 환대하는 등 예우를 깍듯이 하기도 했다.



과거 우리 역사에서 귀화를 막은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성씨 280여 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0여 개가 귀화 성씨이다.


※이 글은 안형환 지음, '국경을 넘은 한국사(김영사,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6. 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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