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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최고의 문화 선진국 통일신라

새샘 2016. 5. 31. 21:00

660년에 백제,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당나라와 7년(670~676) 전쟁을 치르고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백제의 전 영토와 고구려의 남쪽 땅을 차지하면서 신라의 국력은 전에 없이 강해졌다. 영토와 인구 면에서 코리아의 원형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신라가 한반도 지역을 통일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 국가를 붕괴시키고, 만주 벌판을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당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같은 민족으로 보았을까? 민족이란 아주 근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백제는 무왕 때인 607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고구려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수나라 양제에게 했고, 위덕왕 때는 고구려를 칠 때 길잡이를 자처했다. 당시 삼국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이웃 국가들이었을 뿐이다.

 

태종무열왕릉비-경북 경주시 서약동에 있다. 비문을 새긴 돌인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지금은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비신 위에 얹혔던 비의 머리인 이수螭首만 남아 있다. '태종무열대왕지비' 여덟 글자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라고 한다.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재위 681-692)은 즉위 12년에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묘호廟號(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가 당 태종과 같은 것을 문제 삼아 이를 고치라고 하자 당에 보낸 답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왕 김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생전에 훌륭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하여 '삼한일통'을 이루었으니 그 위업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왕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손자이자 676년에 당나라 세력을 몰아니고 실질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재위 661-681) 김법민의 맏아들이다. 이를 볼 때 신라인들이 한반도의 남부 지역(삼한 지역)을 통합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같은 권역내 이웃 국가를 정복했다는 개념이지 민족을 통일했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삼한 지역을 통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고려 인종(재위 1122-1146)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 '삼국사기'는 신라의 역사를 상대(시조~28대 진덕여왕, BC57~654), 중대(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 그리고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로 분류하고 있는데 신라의 전성기는 중대였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걸출한 두 군주,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국학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왕 중심으로 정치 조직을 다시 짰다. 새로이 병합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9주州로 나누고 그 밑에 군郡과 현縣을 두었으며, 지방 요지에 5소경小京을 만들었다. 신문왕은 이를 통해 왕권을 대폭 강화했다.

 

이후 8세기에 이르러서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개방된 시대였다. 또한 신라를 다스렸던 왕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덕왕 32년(733) 8월 보름에 왕이 월성(신라의 왕궁)에 올라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다가 윤중允中(김유신의 손자)을 불러오게 하니 좌우에서는 소원한 신하를 부르른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자 왕은 '나와 그대들이 모두 안평무사한 것은 유신의 공'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권43 열전列傳 제3 김유신 하下 편>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친형인 효소왕(재위 692-702)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덕왕(재위 702-737)이 스스로 자신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신라 제35대 왕이 된 경덕왕(재위 742-765) 때는 신라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과 다보탑, 석굴암을 비롯하여 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력하는 월정교, 황룡사 대종, 성덕여왕 신종(에밀레종), 월지(안압지), 경주 남산의 불상 등 지금 남아 있는 세계적인 명품 예술품과 건축물들이 이때 만들어 졌다.

 

삼층석탑 -일명 석가탑. 신라 불교 미술의 정점에 있는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서 따서 무영탑 이라 부르기도 한다.

 

월성 동북쪽에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당시 경주는 인구가 20만(70만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달하는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높이 80미터의 황룡사 9층 목조탑을 중심으로 대로변에는 2층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서역인들이 활발하게 거리를 오가는 국제도시였다.

신라의 대표적인 예술품인 황룡사구층목탑 복원도 -황룡사구층목탑은 서라벌의 랜드마크였다.

 

 

서역 상인의 모습을 표현한 당삼채唐三彩 -중국 당나라 시대(618-906)의 시대의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작품을 말한다

 

그무렵 신라인들은 신라를 벗어나 해외를 뻗어나갔다.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신라는 세계화된 국가였다. 신라인들은 중국 연안에 신라방을 만들어 동중국해와 황해, 남해의 국제 교역망을 손에 쥐었고, 신라의 많은 학생들과 승려들이 당으로 몰려갔다. 당나라에 유학 온 아시아 각국의 학생들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뛰어난 재질을 보인 것이 바로 신라 학생들이었다. 또 신라의 승려들은 당나라와 인도를 넘나들면서 당나라 불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불교 철학을 완성했다.

 

당나라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문화 선진국이자 초강대국이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아시아의 모든 길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시아 곳곳에서 학생과 승려들이 당나라로 왔고, 멀리 아랍과 페르시아의 상인들까지 해로로, 육로로 당나라를 찾았다. 장안은 단순히 당 왕조의 수도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국제도시로 당시 지구문명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 당나라가 아시아권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고 평가한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당나라 현종은 신라 제33대 왕인 성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오래도록 안타까워하여 좌찬선대부 형숙을 보내 보내 조문하게 했다. 이때 태자 이하 관료들이 다 애도의 시를 지어 보냈는데 당 현종은 형숙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글을 잘 알아 중국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 무렵 중동에서는 사라센 제국이 새로이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사라센 제국은 7-15세기에 마호메트와 그 후계자들이 아라비아의 메디나를 중심으로 세운 중세 이슬람 국가이다. 그러나 8세기 사라센 제국은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여전히 중세의 암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문화 수준이 중국과 거의 동등했던 신라는 당시 가장 개방된 국가의 하나였고 동시대 기준으로 선진국임에 틀임없었다.

 

※이 글은 안형환 지음, '국경을 넘은 한국사(김영사,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5.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