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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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사정 "양귀비와 벌 나비"

새샘 2016. 6. 28. 15:05

덧없거나 황홀하거나

<심사정, 양귀비와 벌 나비, 조선 18세기, 종이에 채색, 28.7×18.3㎝, 간송미술관>


양귀비꽃 피는 오월이다.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투정할 꽃이 양귀비다. 모란이 '후덕한 미색'이라면 양귀비는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 고혹적인 자태는 그러나 쉽게 보기 어렵다. 함부로 키우다간 경을 친다. 열매에서 나오는 아편 때문이다. 무릇 아름다운 것은 독이 있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이 그린 양귀비가 이쁜 짓 한다. 낭창낭창한 허리를 살짝 비틀며 선홍색 낯빛을 여봐란 듯이 들이민다. 아래쪽 봉오리는 숫보기마냥(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 숫총각이나 숫처녀를 이르기도 한다) 혀를 스스럽게(수줍고 부끄러운 느낌이 나게) 빼물었다. 벌과 나비는 만개한 꽃을 점찍어 날아든다. 그들은 용케 알아차린다. 저 꽃송이의 춘정이 활활 달아올랐다. 날벌레와 꽃의 정분이 이토록 농염하다.


청춘남녀의 사랑인들 다르랴. 끌리고 홀리기는 마찬가지다. 김삿갓은 사랑의 인력을 두둔한다. '벌 나비가 청산을 넘을 때는 꽃을 피하기 어렵더라' 하여도 안타까움이 어찌 없을 손가. 꽃은 열흘 붉기 어렵고 지기 쉽다. 양귀비의 꽃말 또한 '덧없는 사랑'이다. 고려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한숨짓는다.


      꽃 심을 때 안 필까 걱정하고 種花愁未發

      꽃 필 때 질까 또 맘 졸이네  花發又愁落

      피고 짐이 다 시름겨우니      開落摠愁人

      꽃 심는 즐거움 알 수 없어라  未識種花樂


나비는 꽃에서 꽃가루를 옮기고 벌은 꽃에서 꿀을 얻는다. 짧지만 황홀한 사랑이다. 사랑의 덧없음은 그저 인간사일 뿐, 독이 든 아름다움이기로서니 꽃을 탓하랴!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 조선 후기(숙종~영조) 문인화가.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일생동안 그림에 정진하였다. 할아버지 심익창沈益昌의 과거시험 부정과 왕세제 시해사건으로 집안이 몰락하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정선의 문하에서 직접 그림을 배웠다. 정선에게서 사사 받은 화풍을 바탕으로 진경산수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중국의 절파화풍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도석인물화에서 다양한 주제와 지두화 指頭畵라는 새로운 화법을 사용하여 18세기 도석인물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대표적인 산수화는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


이 글은 손철주 지음, 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2011, 현암사)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6. 6. 2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