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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용문사 은행나무

새샘 2019. 3. 8. 14:08

신라 패망의 한을 딛고 선 1,100년 나이용문사 은행나무(2013. 6. 8) 

 

양평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로 여겨졌었는데 이 나무 키에 대한 여러 의문이 있었다. 이 나무가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962년 기록에는 키가 60미터였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19년 당시 일본인들이 측정한 키는 63.6미터로서 이 기록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나무가 되었다. 또 2002년 12월에 발표한 문화재청 보고서에는 이 나무의 키가 67미터로 조사되었다. 이 정도 키는 한 층 높이가 약 3미터인 고층 건물과 비교하면 20층을 훨씬 넘는 높이가 될 정도로 높다. 아니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나무의 높이를 측정한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느 높이가 맞는지 아니 이런 높이가 정말인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나무 높이를 측정하는데 많이 사용되는 방법인 렌즈를 끼운 카메라로 얼마 떨어진 곳에서 찍은 피사체의 높이를 자동으로 계산해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나무의 높이를 측정했더니 최고 45미터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조사가 발표된 3년 뒤 2005년 KBS TV 특집 <대한민국 가치 대발견>이란 프로그램에서 이 나무의 키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측정된 용문사 은행나무의 나무 줄기 둘레는 11.19미터였고, 레이저로 측정한 키는 39.21미터로 나왔다. 당시 측정한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나무뿌리 부분에 석축을 쌓고 복토를 하는 과정에서 나무 키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27미터 두께의 흙을 복토했다는 얘긴데, 이렇게 두껍게 복토해도 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등재된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자료(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1363100300000)에는 높이 42미터, 뿌리부분 둘레 15.2미터이고, 나이는 약 1,100살로 추정된다고 나와 있다. 따라서 공식적인 나무 높이는 42미터인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는 일본 미야자키 현에 있는 48미터라고 한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하나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이리 크게 자랐다는 전설이다. 이 의상대사 전설은 신빙성이 없지만 만약 맞다면 나무 나이가 1,300살이 된다. 다른 하나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에 얽힌 전설로서 나라를 잃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은거하기 위해 경주에서부터 걸어가던 중 용문사에 들러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하면 나무 나이가 1,100살 정도가 되는데, 이 나이는 전문가들이 추정하는 생육적 나이와 거의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 이 전설을 믿는 편이다. 참고로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등재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은행나무는 강원 삼척시 도계읍 늑구리의 삼척늑구리은행나무로서 1,500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실린 용문사 은행나무 사진들(출처-http://search.cha.go.kr/srch_org/search/search_top.jsp?searchCnd=&searchWrd=&home=total&mn=&gubun=search&query=%EC%96%91%ED%8F%89%EC%9A%A9%EB%AC%B8%EC%82%AC+%EC%9D%80%ED%96%89%EB%82%98%EB%AC%B4)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은행 열매가 달리는 암나무로서 한창때엔 한해 무려 서른 가마니의 열매를 거두어들였다고 하며, 요즘도 예전 같진 않지만 많이 열리는 해에는 그냥 떨어진 것만 주워도 여덟 가마니 정도라고 한다. 용문사 스님들은 주운 은행 열매를 작은 바구니에 정성껏 포장해서 나무와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께 선물로 드린다. 천년 동안 생식 활동을 지속한 생명체가 여전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정말 놀라우며, 이 선물을 받는 이들에겐 참으로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일본 침략에 항거하여 일으켰던 1907년 정미의병 때 의병의 은거지이자 집결지로 지목한 용문사를 일본군들이 쳐들어와 불을 지르는 만행에도 이 은행나무는 살아남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 은행나무에게 하늘의 왕, 천왕처럼 나무 가운데 최고 높은 왕이란 의미의 '천왕목天王木'이란 별명을 붙여준 것도 이 같은 놀라운 생명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승하하던 날 이 은행나무는 망국의 한을 다음과 같이 슬퍼했다. 바람 한 점 없었던 그날 이 나무는 자신의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스스로 부러뜨려 바닥에 내려놓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나무는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커다란 울음소리를 냈다고 하는데, 6·25 한국전쟁 때도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정이품송보다 훨씬 전인 조선 4대 임금 세종에게 정삼품 당상관 벼슬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벼슬을 한 나무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에게 받은 보은 속리산 법주사 앞 정이품송이 아닌 바로 이 용문사 은행나무인 것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높은 키와 많은 나이만이 자랑은 아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크고 아름다우며, 멋들어진 전설까지 간직한 신령한 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큰 재산이자 자랑거리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은행나무 위용을 받아들이면서 이처럼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우리 곁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크나큰 자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을 제외한 글은 고규홍 지음,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휴머니스트, 2012)'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9. 3.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