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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보다 신용을 중요시한 바렌츠 선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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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보다 신용을 중요시한 바렌츠 선장

새샘 2019. 12. 27. 21:25


<빌렘 바렌츠>(출처―위키백과>


1653년 7월 30일, 네델란드 하멜 Hendrik Hamel 일행을 태운 상선 스페르베르 호가 대만을 떠났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도중 태풍을 만났다.

닷새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제주도에 표류한 것은 8월 16일이었다.

조선에 상륙한 '최초의 서양인 집단'이었던 하멜 일행은 그 뒤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 배의 서기였던 하멜은 조선 땅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보고서 형식으로 집필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하멜 표류기》다.


하멜의 조국 네델란드는 조선보다도 작았지만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다.

수도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항구이자 20세기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맞먹는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다.

당시 유럽이 보유한 선박의 4분의 3이 네델란드 국적이었다.

그들의 배는 오대양을 누비고 다닐 만큼 크고 성능도 좋았다.

러시아의 개혁 군주 표트르 대제가 신분을 숨기고 조선 기술을 배워간 곳도 네델란드였다.

프랑스 역사가 브로델의 말처럼 17세기 유럽사의 주인공은 네델란드였다.

이 무렵 네델란드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방법서설》을 쓰고 있었고,

유대인 스피노자는 렌즈를 연마하면서 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네델란드는 막강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북아메리카 허드슨 강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중심지를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이라 칭했다.

17세기 후반 영국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네델란드와 경쟁을 벌인 끝에 이 도시를 장악하고

이름을 뉴욕 New York으로 바꾸기 전까지 뉴암스테르담은 번영을 누렸다.

네델란드인은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대만, 일본 등과도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이면서

아시아 무역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우리가 20세기 후반에 들어 겨우 눈 뜬 '세계경영'을 그들은 이미 17세기에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하멜 일행은 선진국 선원답게 제각기 기술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술, 소총·대포 제작, 축성, 천문학, 의술 등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 기술들은 조선에 쓸모가 큰 것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왕이던 효종과 그의 신하들에게는 그들의 쓸모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었다.

조정은 하멜 일행이 십 수 년이나 억류되어 있었는데도 어느 나라 사람인 줄 몰라서 남만인이라고만 부르다가,

그들이 탈출한 뒤 일본 정부에서 보내온 외교 서한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네델란드[아란타阿蘭陀] 사람인 것을 알았다.

네델란드인이 전 세계를 누비며 말 그대로 '세계경영'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다.


한양으로 끌려온 세계 일등 선진국 선원들은 기껏 국왕 호위에 장식품으로 동원되고,

사대부 집에 불려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주면서 푼돈을 벌었다.

조선 조정이 그들의 표착을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한국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선조에서 효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국왕과 신료들은 무능한데다 국제 감각도, 역사의식도, 국가 전략도 없었다.

못난 조상들이었다.



<빌렘 바렌츠 선장의 배>(출처Wikipedia)


<북극곰을 사냥하는 게리트 드 베어> (출처Wikipedia)

<네델란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있다. 빌렘 바렌츠 선장이 이끄는 네델란드 선박이 북극해를 지나던 중 바다가 얼어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바렌츠 선장과 17명의 선원들은 북극해 근처에서 무려 수개월 동안 겨울을 보내야 했다.

선장과 17명의 선원은 동토에 올라 배의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겨울을 보냈다.

그들은 식량이 떨어져 여우와 북극곰을 사냥해 가면서 허기를 달랬다. 바렌츠의 선원으로서 항해일지를 담당했던

게리트 드 베어 Gerrit de Veer가 북극해에 갇힌 배와 북극곰과 싸우는 선원들의 모습을 그렸다.>


우리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동안 네델란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멜 표류 사건 반세기 전인 1596년 여름,

네델란드의 선장이자 지도제작자, 모험가였던 상인 빌렘 바렌츠 Wliiem Barentz(1550년 경~1597)는

1596년 세 번째 북극항로 개설에 나선다.

이미 두 번의 항로 개설에 실패했으므로 이번에는 어느 누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두 척의 작은 배를 구입하여 다시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단지 1개월 정도를 버틸 수 있는 빵이 고작이었다.

대신 그 두 척의 배에는 소금에 절인 쇠고기, 버터, 치즈, 빵, 호밀, 콩, 밀가루, 기름, 식초, 겨자, 맥주, 와인,

훈제베이컨, 햄, 생선, 모포, 옷 등 러시아 시베리아의 고객들에게 배달할 무역상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고객들에게 물자를 가져다주기 위해 항해를 계속하던 도중

노바야젬랴 섬 근처에서 빙하에 갇히게 된다.

이윽고 식량이 떨어졌고 그들은 여우와 북극곰을 사냥하면서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이것도 여의치 않아 끝내 식량 부족으로 17명의 선원 중 8명이 굶어죽었다.

그 사이 다행히 빙하가 녹아 살아남은 선원들은 배를 돌려 네델란드로 향했다.

그러나 배가 항해를 다시 시작한 지 1주일 만인 1597년 6월 20일 선장 바렌츠도 먹지 못해 사망했다.


그들은 그 후 러시아 선박에 구조되어 4개월 후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돌아가게 된다.

그러데 그들의 조사를 맡았던 네델란드 공무원들은 뜻밖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고객들에게 전달할 식량과 모포와 옷들은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식량의 일부를 먹었더라면 그들은 사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굶어 죽을망정 화물은 손대면 안 된다는 상인정신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목숨 걸고 신용을 지켜 후세에 길이 남을 상도덕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 덕분에 네델란드인들은 17세기 유럽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다시피했고 번영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사진을 제외한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1>(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9. 12. 2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