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1 - 한반도 말갈의 성격1: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 말갈의 정체와 변천 본문
1. 들어가며
열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격을 알아보자.
≪삼국사기≫에는 말갈靺鞨이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기록이 많이 보이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어느 문헌에서도 한반도에 말갈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갈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강원도 지역에 있었던 동예를 말갈로 잘못 기록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말갈은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말갈과는 달리 가짜 말갈일 것으로 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말갈이 신라의 북쪽 변경으로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북쪽에는 동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말갈은 신라보다는 백제와의 관계에서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백제의 북쪽 변경도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북쪽이라면 동예가 있었던 강원도보다는 황해도 남부 지역이어야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 외에도 고구려에 속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말갈과 중국 당나라에 속했던 말갈도 등장한다.
그리고 중국 문헌에는 고구려의 북쪽, 오늘날 내몽골자치구 동부에서 몽골 동부와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던 말갈도 등장한다.
따라서 말갈은 매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말갈들은 거주 지역이 전혀 다르고 서로 다른 세력을 이루었거나 다른 정치집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말갈이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쟁에 능하다고 표현되거나 전쟁과 관계된 기록에 군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지역의 말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의 성격을 살펴보고, ≪삼국사기≫와 중국 문헌에 보이는 말갈들의 기원과 기본 성격을 확인한 다음,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격에 대해 고찰해 보자.
이 글은 말갈, 특히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격 그 자체를 밝히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지만 열국시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주민 구성의 실태를 확인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도 목적이 있다.
2.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
≪삼국사기≫에는 네 종류이 말갈이 보인다.
첫째는 고구려에 속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말갈이며, 둘째는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이고, 셋째는 중국 당나라에 속해 있었던 말갈이며, 넷째는 발해의 말갈이다.
이들은 그들이 속해 있었던 정치세력이 다르고 거주지가 달랐는데도 모두 말갈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삼국사기≫에서 말갈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서기전 37년으로 「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조에 고구려의 땅이 말갈부락과 연접했다는 것이다.
이 말갈은 고구려 건국 초에 고구려와 연접된 곳에 있었으므로 그 위치가 오늘날 요동 지역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고구려는 오늘날 요동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므로 이 말갈 지역도 고구려의 영토 안에 들어왔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속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말갈이 보이는데, 그들은 위 기록에 나오는 말갈일 가능성이 있다.
만주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 말갈에 관한 기록은 영양양 때인 598년, 보장왕 때인 645년과 654년에 고구려가 수나라나 당나라 또는 거란과의 전쟁에 동원했던 말갈이므로 네 종류 말갈 중 첫 번째인 고구려에 속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말갈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인 백제와 신라의 북쪽 즉 한반도 중부 지역에 있었던 말갈은 백제와 신라를 침략했던 말갈이다.
말갈 기록은 백제와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온조왕 때인 서기전 17년 백제의 북쪽 경계에 연접해 있는 말갈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 말갈에 대한 첫 기록인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말갈과의 전쟁 기록은 온조왕 때 7회, 다루왕 때 6회, (근)초고왕 때 2회, (근)구수왕 때 3회, 진사왕 때 2회, 동성왕 때 1회, 무령왕 때 3회 등 모두 24회에 이른다.
말갈이 쳐들어간 백제 지역이 지금 어느 곳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말갈이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실은「백제본기」의 여러 기록에서 말갈이 모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거나 공격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말갈은 신라의 북쪽 변경도 자주 침략했다.
신라와 말갈의 전쟁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지마 이사금 때인 125년으로, 말갈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이후 395년, 468년, 480년, 481년, 655년에 북쪽 변경을 침략·습격·침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말갈은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말갈이 신라를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는 백제를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보다 140여 년이나 늦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하다.
즉 초기에는 지리적으로 말갈이 백제와 가까운 곳에 있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신라와도 가까워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백제와 신라의 건국지는 임진강 유역과 경주 지역으로 백제의 건국지가 훨씬 북쪽이었다.
따라서 신라 초기 기록에 말갈과 접촉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말갈과 신라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며, 그 후 신라 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되면서 말갈과 맞닿게 되면서 말갈이 신라 북쪽 경계를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갈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인 중국 당나라에 속했던 말갈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고구려 보장왕 때인 643년과 644년,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거란과 말갈을 시키거나 거느린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인 발해의 말갈은 신라 성덕왕 때인 733년 발해말갈과 말갈발해란 이름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유민들이 건국하여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와 연해주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말갈은 발해가 건국된 뒤에는 발해말갈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는 다른 성격을 지닌 네 종류 말갈들이 등장한다.
첫째는 고구려에 속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말갈, 둘째는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자리잡고 한반도 중부에 있었던 말갈, 셋째는 중국 당나라에 속해 있었던 중국 지역의 말갈, 넷째는 발해에 속해 있었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말갈 등이다.
이 가운데 발해말갈은 이전에 만주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말갈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말갈의 정체와 변천
말갈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를 알 필요가 있다.
말갈은 어떤 종족이었으며 어떤 연유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해 지금까지는 대체로, 말갈靺鞨은 원래 숙신肅愼이었는데 읍루挹婁와 물길勿吉로 불리다가 말갈이 되었다고 보아왔다.
먼저 말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옳은지부터 살펴보자.
중국 문헌에서 말갈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563년[북제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 말갈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 이전에는 중국 문헌에서 말갈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 전에는 말갈이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데 북제 이후의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 는 <말갈전>이 독립된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수·당시대에 이르러 중국인들에게 말갈이 하나의 종족 이름으로 분명하게 인식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말갈에 대해 ≪수서≫「동이열전」<말갈전>에 기록된 내용은,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읍락마다 추장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아 모두 7종 -속말부粟末部, 백돌부伯咄部, 안거골부安車骨部, 불열부拂涅部, 호실부號室部, 흑수부黑水部, 백산부白山部-이 있으며, 이 중 흑수부가 가장 굳세고 건장했다는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의「동이열전」<고(구)려전>에도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말갈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과는 다른 곳에 거주했던 말갈로서 ≪삼국사기≫에 등장한 말갈보다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갈이라고 하면 바로 이 말갈을 말한다.
이들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과 다른 곳에 거주했음은 위 문헌들에서도 확인되지만 ≪구당서≫에 <말갈전>과 <발해말갈전>이 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이를 분명하게 해준다.
그런데 ≪구당서≫「북적열전北狄列傳」<말갈전>에 말갈은 이전에 숙신이 거주하던 곳에 위치했는데 북위(후위) 때에는 이들을 물길이라 불렀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갈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기 위해 ≪위서魏書≫「물길전」과 ≪북사北史≫ <물길전>을 볼 필요가 있다.
≪위서≫에는 물길국이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 숙신국이라고 했고, ≪북사≫에는 물길국이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고 했으므로, 숙신이 물길로 불리다가 다시 말갈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말갈은 원래 숙신이었는데 읍루로 불리다가 물길로 불렸고 마지막으로 말갈로 불렸다고 보아왔는데, ≪위서≫와 ≪북사≫에는 숙신이 물길로 불리다가 말갈로 불렸다고 말할 뿐 읍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동이전」<읍루전>을 보면 읍루는 옛 숙신이라 했으므로 읍루라는 이름이 숙신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위서≫와 ≪북사≫에는 읍루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는 것이다.
한편 ≪신당서≫「북적열전」<흑수말갈전>에 흑수말갈이 읍루로도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숙신 가운데 일부가 읍루가 되었으며 이들을 흑수말갈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숙신 가운데 일부는 물길이 되었다가 말갈로 변했으나 다른 일부는 읍루가 되었다가 물길을 거쳐 흑수말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갈은 앞에서 확인한 ≪삼국사기≫에 보이는 여러 종류의 말갈 외에도 거주지를 달리하는 일곱 부의 말갈이 고구려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들이 흩어져 있었던 지역은 대체로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의 북쪽 지역에서 몽골 동부와 연해주 지역까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거주지는 ≪구당서≫와 ≪신당서≫「동이열전」의 <고(구)려전>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구당서≫를 보면 말갈은 고구려의 평양성 북쪽에 있었는데, 평양성은 옛날 한사군의 낙랑군 지역으로 그곳에서 동쪽 바다 건너에는 신라가 있었고 남쪽 바다 건너에는 백제가 있었으며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면 영주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신당서≫에도 보인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 평양성은 옛날 한사군의 낙랑군이 있었던 곳으로 신라와 백제의 서북쪽 바다 건너에 있어야 한다.
이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일 수 없다.
왜냐면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이다.
신라와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 서북쪽은 오늘날 요서 서부 지역이 되어야 한다.
고대의 요수는 오늘날 난하였으며 한사군의 낙랑군 위치는 오늘날 난하 동부 유역이었다.
그러므로 ≪신당서≫와 ≪구당서≫에 나오는 고구려 평양성은 오늘날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갈이 그 북쪽에 있었다고 했으니, 그 지역은 오늘날 내몽골자치구로서 적봉의 북쪽 지역이 된다.
그리고 훗날 흑수말갈이라 불린 읍루가 있었던 곳이 연해주 지역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갈 일곱 부가 흩어져 살았던 지역은 대체로 적봉 북쪽의 내몽골자치구 동부와 몽골 동부 및 연해주 지역을 모두 차지한 것은 아니었고, 여기저기에 집단을 이루고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까닭으로 말갈은 오늘날 내몽골자치구 동부에서 몽골 동부와 연해주 및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을까?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숙신의 위치를 확인해보자.
숙신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 있었던 거수국으로서 고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과 사신 왕래와 교역을 가졌던 것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숙신에 대해서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동북의 이吏라고 하여 숙신이 중국의 동북쪽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서주 초에 숙신·연박燕亳은 중국 북쪽 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숙신이 연나라와 가까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연나라는 중국의 가장 동북쪽에 위치하여 오늘날 천진과 북경 지역을 중심으로 난하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숙신이 그곳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사기≫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의 기록에 숙신이 오늘날 산동성 가까이에 발해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숙신은 난하에서 가까운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에 고조선의 서부였던 요서 지역에는 위만조선이 건국되었다.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의 정권을 빼앗은 위만은 오늘날 대릉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영토를 잃고 동쪽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서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을 설치하자, 이에 반대하며 그 지역의 주민 가운데 일부가 또 이주하는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 시기에 숙신의 주민들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그런 이주 과정에서 숙신족의 일부는 원주지原住地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상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오늘날 난하 서쪽은 물론 내몽고자치구 동부에서 몽골 동부·연해주·만주·한반도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이 나중에 읍루나 물길로 불리다가 다시 말갈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말갈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말갈의 어원을 밝히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추론밖에 할 수 없지만, 그 이름이 한민족에게서 불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앞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중국 문헌에서 말갈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북제시대인 563년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서기전 37년 고구려의 건국시조 추모왕 때 기록에 이미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말갈 기록과 백제·신라와 말갈의 관계에 관한 ≪삼국사기≫ 기록은 중국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백제 및 신라와 말갈 관계 기록은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전에 전해오던 한민족의 옛 문헌에 의거했을 것이다.
말갈이라는 이름이 중국 문헌보다 훨씬 일찍 ≪삼국사기≫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 이름이 한민족에게서 불려지기 시작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말갈이 ≪삼국사기≫ 기록에서 먼저 보인다고는 하지만 ≪삼국사기≫가 편찬된 시기는 중국에서 말갈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뒤이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갈이라는 이름을 말갈에 관한 초기 기록부터 사용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의 한국 문헌에 숙신 등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을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후대에 중국인들이 부른 말갈이란 이름으로 전부 고쳐 기록했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그러려면 중국인들에게 말갈이라 불린 종족이 이전에는 무엇이라 불렀는지에 대한 분명한 역사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갈이란 이름은 한민족이 숙신의 후예를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그것이 그들 자신이나 중국인들에게 전달되어 여러 지역에 거주하는 숙신의 후손 전체를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말갈족의 이름 변화는, 한반도로 이주했던 집단은 '숙신→말갈', 연해주로 이주하여 읍루를 세웠던 집단은 '숙신→읍루→물길→말갈', 오늘날 내몽골자치구 동부와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집단과 중국에 속해 있었던 집단은 '숙신→물길→말갈'이라는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한규철은 발해말갈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갈은 특정한 종족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 거주민 또는 고구려 변방인들을 이르는 범칭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한규철의 견해는 발해시대에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시대에 관한 한국과 중국 문헌에서는 말갈이라는 이름을 분명히 다른 종족의 이름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나 낙랑 또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전쟁에 참가한 말갈에 대해 별도로 구분하여 말갈이라 하고 있다.
말갈이 고구려나 낙랑 또는 당나라 군사들과 같은 종족이었다면 굳이 말갈이라 구분하여 불렀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말갈은 원래 숙신족을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 다른 종족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쟁이나 약탈을 일삼는 집단으로서 생활이 안정되지 못했고 농업마을 사람들보다 풍속이나 문화 수준이 낮았으므로 나중에는 말갈이라는 이름이 천민 또는 문화 수준이 낮은 변방인들까지를 포함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7.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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