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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전쟁터에서 꽃핀 '크리스마스 평화'

새샘 2020. 7. 12. 07:57

<다이앤 크루거, 벤노 퓨어만 주연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는 1914년 12월 24일 영국·프랑스·독일 병사들 간에 실제로 있었던 기적과도 같은 '크리스마스 휴전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군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을 함께 부르면서 극적으로 평화의 날을 맞이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병사들에 의한 '자발적인 크리스마스 휴전'은 삭막하고 참혹한 전쟁을 치르던 그들에게 잠시나마 인간다운 삶과 평화를 맛보게 해주었다. 사진 출처- https://thisway9.tistory.com/44>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그해 10월 말부터 연합군과 독일군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서부전선'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서 적을 노려봤다.

어느 쪽도 상대방을 압도하지 못한 채 참호전은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참전한 영문학도 존 로널드 로얼 톨킨 John Ronald Reuel Tolkien(1892~1973)은 땅굴 세상을 겪으며 문학적 상상력을 키웠다.

그는 지하세계에도 주민이 있으며, 땅 위와는 달리 사람이 아니라 작은 요정이 산다고 상상했다.

나중에 그는 이 생명체에 '호빗 Hobbi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소설 《호빗 The Hobbit》,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은 플랑드르 Flandre 전선에서 이렇게 잉태되었다.

 

이 전쟁으로 많은 영국 귀족 가문의 대가 끊길 정도로 전사자가 속출했고, 독일에서는 전쟁 발발 당시 18~22살이었던 청년 가운데 37퍼센트가 목숨을 잃었다.

회색의 영역은 사라지고 흑백의 시대가 왔다.

양쪽 언론은 서로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을 증폭시키면서 이성을 마비시켰다.

영국의 일부 애국주의자들은 독일 개라는 이유로 닥스훈트 dachshund를 죽였고, 독일에서는 에른스트 리사우어 Ernst Lissauer가 작곡한 영국을 증오하는 '증오의 찬가 Hymn of Hate'가 유행했다.

 

하지만 증오와 저주만이 전쟁터를 지배한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 구역에서조차 양쪽은 잠정적이나마 특정 임무를 보복의 두려움 없이 수행할 수 있게 하자는 합의를 도출하곤 했다.

이런 비공식적 휴전은 특히 전투가 끝난 후 부상자와 사망자를 거두어갈 때 자주 시행되었다.

병사들은 노출된 적병을 살해할 기회가 있으면서도 전쟁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종종 이를 거부하곤 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역시 휴전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양쪽 병사들 사이에 의사소통 문제는 없었다.

상당수 독일 병사들이 영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영어를 할 줄 알았다.

독일 자원병들은 김나지움 Gymnasium[독일의 중등교육기관]에서 적국의 언어인 영어를 공부하다가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쟁 전에 유럽 각국의 상급학교에서는 주요 외국어인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친교행위는 시신을 옮기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지 대항 축구 경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영국군 소총수 터너는 카메라를 들고 이 친교 장면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국적을 불문하고 병사들이 전선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 독일군, 프랑스군 중에는 작은 코닥 카메라를 배낭 속에 넣어가지고 온 병사들이 많았다.

하물며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상부의 규정을 고지식하게 지킬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1차 세계대전 당시 플랑드르 전선에서의 크리스마스 - 1차 세계대전 때인 1914년 12월 25일 플랑드르 전선에서 영국군 병사 터너가 오후의 축구 경기가 있기 전 독일군·영국군 병사들의 사진을 찍었다. 피켈하우베 Pickelhaube(독일군 병사들이 썼던 창끝 모양의 뾰족한 쇠가 붙은 가죽 헬멧)를 쓴 독일군 병사가 담배를 입에 물고 있고, 오른쪽 끝에 독일군 장교가 옅은 미소를 띠고 서 있다.>

영국군 병사 터너가 1914년 크리스마스에 찍은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은 매우 유명해졌다.

양쪽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에서 몇 명의 병사들을 담은 사진이었다.

1914년 12월 25일 오전, 그러니까 오후의 축구 경기가 있기 전 독일군과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이다.

서로 만난 양쪽 병사들은 담배와 통조림, 계급장과 주머니칼, 목도리와 장갑을 교환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통역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손짓 발짓으로, 아니면 그저 자신의 아내, 아이들, 부모의 사진을 내밀면서 자신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전쟁 전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럼으로써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을 경우를 위해 그들은 서로 주소를 교환했다.

 

많은 군인들이 적군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영국군은 독일군 작센 부대와 축구 시합을 했고, 3:2로 승리했다.

영국군의 한 장교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보아 매우 훌륭했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나는 독일 사람들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증오가 분출되는 전장에서 병사들이 만들어낸 크리스마스의 작은 평화였다.

 

전쟁 초기부터 전선에서는 이따금 전투가 중지되곤 했다.

모두가 시체에 질렸고, 죽음에 지쳤다.

숨을 돌리기 위한 짧은 휴식은 언제나 있었다.

아군 부상자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기까지 몇 시간 동안 비명을 질러댈 때는, 무인지대 너머로 소리를 질러 부상자를 옮기겠노라고 알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휴전을 하는 것은 묵인되었다.

여러 달 동안 병사들이 소리치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던 참호전에서는 나름의 법칙이 있었다.

실제로 병사들 간에는 친밀감이 존재했다.

양쪽 병사들은 사령부에 있는 최고 사령관들보다는 반대편의 비슷한 계급의 병사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사령관들이 특정 계급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이곳의 병사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또 다른 특정 계급에 속해 있었다.

 

전쟁 초기의 몇 달 동안 서부전선 전체 참호들에서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볼일을 보러 갈 때는 공격하지 않았다.

바지를 벗은 상태에서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식사할 때도 공격하지 않았다.

막대기에 고정해서 참호 위에 높이 세운 표지판으로 각자 식사 시간을 알렸다.

대략 1시간 정도는 사격을 중지했다.

표지판을 내리면 다시 전투를 계속했다.

이 약속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1914년 크리스마스의 휴전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이 우리 땅에서는 영화 속에서 전개된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이병헌·송강호·이영애 출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남북 병사 간 총격사건의 진실을 추리극 형식으로 그린 영화로,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과 분단의 아픈 현실을 그렸다.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다 우거진 갈대밭에서 지뢰를 밟아 대열에서 낙오한 남한 병사 이수혁은 북한 병사 오경필과 정우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를 계기로 이수혁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 초소에서 북한 병사들과 만나며 우정을 키운다.

그러나 어느 날 북한군 고위층에게 발각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마침내 북한군 초소에서 총성이 울린다는 내용이다.

 

유럽 각국 지휘부는 1914년 크리마스에 있었던 무인지대에서의 친교 행위 보고를 받고 비상이 걸렸다.

장군들의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토록 열광하여 노래를 부르며 벌떼같이 모여들던 전쟁에 왜 모두가 질렸단 말인가?

이유는 자명했다.

 

이 전쟁이 병사들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병사들이 알아챈 것이다.

1914년 8월의 열광은 오래전에 죽어버렸다.

그들은 서로를 소리 내어 부르고 마주볼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살고 죽었다.

이런 가까움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병사들은 1914년 크리스마스에 새로운 사실을 인식했다.

자신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들 중에는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총을 쏜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다 같은 불쌍한 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전쟁을 주도했던 자들은 1914년의 평화 무드가 지속될 경우 양쪽 정부가 붕괴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 지휘부는 전선의 장교들에게 두 번째 크리스마스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지침을 내려보냈다.

1915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친교 행위가 있을 경우 모든 장교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했다.

모든 소대장, 중대장, 연대장에게는 친교 행위를 철저히 막을 의무가 있었다.

지위가 강등되고 군 경력이 끝장나는 경고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최고 사형선고까지 받을 수 있었다.

 

전선은 1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상부로부터 협박을 받은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명령서를 읽어주고 그에 따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914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명령은 진영을 막론하고 모든 사령부가 매한가지였다.

양쪽 군부는 평화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에서는 입장이 같았다.

그들은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증오가 적에 대한 증오보다 크다는 것을 경험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영국군, 프랑스군, 독일군 지휘부는 흉벽 위에 나타나는 적군 병사를 즉각 사살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참호 안의 초소를 떠나 적진 쪽으로 가는 모든 병사는 이유를 불문하고 곧바로 총살하고, 적진에서 평화의 사절이 몰래 접근할 경우 총을 난사하라고 지시했다.

적군과의 모든 친교 행위 시도, 예를 들면 서로 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협정이나 상호 방문, 뉴스 교환 등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거역하는 행위는 국가반역죄로 간주되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1914년의 '방종'이 재현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크리스마스의 작은 평화는 이렇게 끝났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으로, 일부 내용은 보완하거나 수정하였다.

 

2020. 7. 1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