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히틀러의 최후 본문
톰 크루즈 Tom Cruise(1962~)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 Operation Valkyrie>는 히틀러 Adolf Hitler(1889~1945)에 대한 15번의 암살 시도 중 가장 큰 파장을 몰고 왔던 '발키리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Claus von Stauffenberg 대령(1907~1944)은 히틀러의 광기가 독일과 유럽을 파멸시키기 전에 그를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한쪽 눈, 오른손, 그리고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은 그는 독일사령부로 발령받으면서 비밀 저항세력에 가담,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된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옆 탁자 아래에 슈타우펜베르크가 숨겨둔 폭탄이 터졌다.
히틀러는 바지가 찢어지고 온통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상처는 거의 없었다.
몸을 기대고 있던 무거운 상판 덕분에 보호를 받은 것이다.
암살을 모면한 그는 흥분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안도하는 듯했다.
그의 침착함은 무엇보다도 '기적적인 구원'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명 의식'을 더욱 강화시킨 듯했다.
그날 오후,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무솔리니와 함께 폭발 현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보니 우리의 위대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의무가 내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이 전보다 더 강하게 듭니다."
강한 인상을 받은 무솔리니가 한마디 보냈다.
"이것은 하늘의 계시였군요."
연합군의 공세로 전황이 불리해졌지만 히틀러는 '7월 20일 사건'에서 확인된 '섭리'를 믿었고, 깜짝 놀랄 만한 국면 전환을 믿었다.
9월 초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겠노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듬해인 1945년 4월 13일 히틀러의 벙커를 휘감고 있던 짙은 어둠 속에 갑자기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히틀러에 맞선 고약한 동맹의 중심축이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가 조지아 주의 웜 스프링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4월 12일 운명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괴벨스는 신이 나서 히틀러에게 전화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2주일 전 선전장관 괴벨스는 지도자(히틀러)의 운세가 포함된 점성술 자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4월 중순 이후로는 독일의 전세가 호전된다는 예상이었다.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다시 한 번 섭리가 그에게 신뢰를 전하는 듯이 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기를 읽고 있던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격려가 되는 역사적 사실을 들려주었다.
7년전쟁(1756~1763)에서 패배를 목전에 둔 프리드리히가 1763년에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왕이 급사하는 바람에 기적과도 같이 자신의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 주변에는 안도, 감사, 신뢰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까지 뒤섞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감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이 그러한 믿음에 매달리게 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루스벨트의 죽음은 전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4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4월 17일, 32만 5천 명의 독일군과 30명의 장군이 미군에 투항했다.
4월 20일이 되자 소련군 전차가 수도 베를린 외곽까지 당도했다.
그날 오후 베를린은 포격을 당했다. 그날은 마침 히틀러의 쉰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벙커의 분위기는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까웠다.
소련군이 베를린 입구까지 진격한 상황에서 맞이한 생일은 히틀러에게 난감한 일이었다.
생일 축하를 하러 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난감해했다.
4월 29일, 히틀러는 정부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히틀러는 결혼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자신은 인생을 독일에 바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아내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정치를 하는 데도 불편했다.
그러나 에바 브라운은 제발 떠나라는 히틀러의 애원도 물리쳤다.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를 버릴 때 에바 브라운은 자기 한 몸을 미련 없이 던졌다.
이제는 결혼을 해도 히틀러는 잃을 것이 없었다.
히틀러는 에바가 가장 원했던 선물을 주려고, 에바를 그저 기쁘게 해주려고 결혼을 결심한 것이었다.
4월 30일 새벽에는 무솔리니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4월 28일 파르티잔 Partizan[정식 군인이 아닌 이탈리아 무장 전사를 말하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La Résistance에 해당]들이 스위스로 도주하던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를 체포해 총살한 것이다.
파르티잔들은 두 사람의 시체를 다른 15명의 파시스트 간부들의 시체와 함께 트럭에 실어 밀라노에 갖다 버렸다.
다음날 모여든 군중은 처음에는 호기심에 이끌려 길가에 버려진 시체 주위를 에워쌌다.
갑자기 사람들이 미친 듯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달려 나와 무솔리니의 머리를 발길로 차니까 사람들은 춤을 추며 시체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한 여인이 엎어진 무솔리니 시체에 다섯 발의 총탄을 쏘았다. 전쟁에서 잃은 다섯 아들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무솔리니의 셔츠를 찢어 불을 붙인 다음 그의 얼굴에 비벼댔다.
파르티잔 간부가 부하들 10여 명에게 공포탄을 쏘게 하며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미친 듯 날뛰는 군중들은 진정되지 않았다.
마침내 소방대의 물줄기가 그들의 증오의 불길을 껐다.
시체들은 하나씩 하나씩 폭격으로 다 타버린 주유소 대들보에 거꾸에 매달렸다.
무솔리니 바로 옆에 매달려 있던 클라라 페타치는 치마가 뒤집어지면서 치부가 드러났다.
지나가던 노파가 혀를 끌끌 차면서 드리워진 치마를 다리 사이로 끌어올려 치부를 가려주었다.
히틀러는 4월 30일 새벽 베를린의 벙커에서 무솔리니 사망 소식을 들었다.
정부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치른 후 몇 시간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제대로 음미할 틈도 없었다. 소련군 탱크들이 불과 800미터 밖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신임하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항복을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벙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날에 있을 비참한 최후를 대비한 마지막 인사였다.
1945년 4월 30일 정오, 히틀러는 보좌관 알베르트 보어만을 불러 때가 되었다면서 오후에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했다.
"에바 브라운도 자살한다. 둘의 시신은 불에 태워달라."
그러고는 수행원인 돌격대 지도자 오토 권셰를 불렀다.
히틀러는 모스크바에 밀랍인형 같은 것으로 전시되기는 싫다면서 화장을 준비해달라고 이르고 반드시 지시한 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는 측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서 가볍게 몇 마디 던졌고, 몇 분 뒤 아무런 공식 의전 없이 서재에 들어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에바 브라운도 곧 뒤따라 들어갔다. 오후 3시 반 조금 전이었다.
10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보어만이 살명시 문을 열었다.
비좁은 서재 안에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작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의 왼쪽에 쓰러져 있었다. 몸에서 청산가리 냄새가 훅 풍겼다.
히틀러의 관자놀이에 난 총알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발치에는 7.65밀리 발터 권총이 놓여 있었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8. 2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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