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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 발굴 양상, 그리고 강남 개발과 구제발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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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 발굴 양상, 그리고 강남 개발과 구제발굴

새샘 2021. 6. 23. 16:26

<1970년대 발굴된 서울의 유적지(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 양상

 

1960년대 순수한 학술발굴 위주로 이루어졌던 발굴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변화를 보인다.

사실 이런 변화 양상은 1960년대 후반에 이미 보이기 시작한다.

1969년 고려대박물관의 가락동 1·2호분 발굴조사가 그것이다.

발굴자인 윤세영에 따르면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이 백제 관련 지역 유적조사 계획에 의한 사업의 하나로 발굴 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이제 서울의 도시화를 위한 발굴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처음으로 이루어진 발굴은 석촌동 가옥에 대한 발굴이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의 제보로 이루어졌는데, 위치는 한강변으로 시기는 초기 삼국시대에 해당하며, 발굴자인 김원룡은 잠실지역 개발사업을 고려하여 학술 정보를 얻기 위한 학술발굴조사와 구분되는 구제救濟발굴조사[개발 사업으로 인해 유적이 파괴될 상황에 처한 경우의 유적 발굴]라고 표현하였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차에 걸쳐 암사동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앞서 1960년대에 대학박물관들이 실시한 발굴의 결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쏟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경주 등 다른 지역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처음으로 서울 지역에 대한 발굴을 시작한 것이다.

 

1974년 실시한 석촌동 3·4호분에 대한 발굴은 잠실지구개발사업에 대한 학계의 대응 발굴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져 있는 석촌동 고분군들이 이 지역 개발로 인해 소리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울대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후 1970년대 대표적인 구제발굴조사라 할 수 있는 잠실지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물론 안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광범위한 조사지역을 생각한다면 발굴조사가 얼마나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는지는 굳이 얘기를 안 해도 분명하다.

그나마 잠실지구는 지역의 역사적 특성상 발굴조사라도 이루어졌지만 최초의 '강남 개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영동지구(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 대부분이다)는 형식적인 발굴조사조차 없었다.

 

이에 반해 1976년 사당동 가마터(요지窯阯)에 대한 발굴은 잠실지구에 대한 구제발굴과 대비되는 순수한 학술발굴이라 이채롭다.

이미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좀더 그 성격을 파악하고자 발굴이 이루어졌다.

서울 지역에서 흔하지 않은 신라 관련 유적지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글자 내용을 통해 남북국시대 서울 지역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77년에는 잠실지구 일대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의 일환으로 화양지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이 지역에서 발굴한 유적은 발굴 당시에는 분묘 관련 유적으로 이해하였으나 20년이 지난 이후 종합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유적을 구의동 유적이라 부르고 그 성격을 군사유적으로 변경한 매우 흥미로운 발굴조사라 할 수 있다.

 

강남 개발과 불행스러운 구제발굴 사이

 

1970년대 암사동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서울 지역 발굴조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진 암사동 유적은 1960년대에 대학 발굴단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암사동 지역은 국가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1971년, 1973년, 1974년, 1975년 등 4차에 걸쳐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서울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한 유적이다.

이런 사실은 국가 차원에서 암사동 유적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암사동 유적 발굴에서 의미를 둘 수 있는 점은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개발을 위한 구제발굴이 중심인 1970년대에 국가 차원에서 순수한 학술발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1970년대 국가적 노력의 결과로 암사동 유적은 서울의 오래된 역사성을 보여주는, 서울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암사동 유적은 지속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진다.

 

아쉬운 점도 있다.

발굴보고서 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까지 발굴 후 발굴보고서 발간은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국가기관이 발굴을 했음에도 발굴보고서가 바로 발간이 되지 않았음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1971년 제1차 발굴보고서는 2006년에, 1973년 제2차 발굴보고서는 2007년, 1974년 제3차 발굴보고서는 2008년, 1975년 제4차 발굴보고서는 1994년에 발간되었다.

빠르면 20년만에, 늦게는 35년만에 보고서가 발간된 것은 물론 만사지탄이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모든 발굴보고서가 발간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강남 개발'에 따른 잠실지구의 구제발굴은 1970년대 서울 지역 발굴조사를 대표한다 할 수 있다.

즉 서울의 특수성은 잘 보여주는 발굴이었다.

서울의 도시 발달사에서 가장 큰 변화는 '강남 개발'이다.

즉 1963년 한적한 경기도 지역이던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고, 1966년 영동 1지구와 영동2지구로 지정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잠실지구에 대한 개발이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발굴조사도 이루어진다.

이런 강남 개발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에 해당하는 영동지구 개발 과정에서는 전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과는 다른 당시의 문화 인식 수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히 잠실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루어진다.

이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의 석촌동과 방이동, 가락동 지역 백제 관련 유적들의 존재가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잠실지구 발굴 바로 이전,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순수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흥미롭다.

서울대 박물관 등 당시 고고학자들이 혹시라도 잠실 지역 개발로 유적들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발굴조사를 체계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유적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는 조사였다.

 

이러한 당시 고고학자들의 유적에 대한 관심과 애착, 그리고 아쉬움은 당시 발굴보고서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총 3차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개발 지역의 범위를 생각한다면 그 조사가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이미 국가적 사업으로 당시 잠실지구 일대의 정리와 개발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당시 존재하고 있고, 알려져 있는 유적조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잠실지구 최종 발굴보고서인 1976년 제3차 보고서의 마지막 종합의견서에서 발굴단은 '이 불행스러운 조사작업'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조사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우리들의 조사는 서울이의 확장에 따른 강요된 탐색 및 정리를 위한 사업이고, 없어질 것을 전제한 한 유언·유물 받아두기식 구제조사였다"라는 내용을 통해 당시 참여했던 고고학자들의 학문적 고뇌를 생생히 읽을 수 있다.

발굴단은 보고서에서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에 대한 원형 보존도 건의하였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군의 모습은 당시 발굴단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이다.

 

1970년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발굴조사 내용으로는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당시 1977년 화양지구 유적 발굴의 결과가 20년만인 1997년 종합보고서에서 바뀌었다는 것이다.

발굴 당시에는 분묘 유적으로 추측하였지만 이후 군사 관련 유적으로 성격을 바꾸었다.

유적명도 화양지구 유적에서 구의동 유적으로 변경되었다.

서울 지역 유적 발굴조사에서 이렇게 발굴 결과를 바꾼 경우는 이 사례밖에 없었다.

 

사실 이미 발간된 발굴보고서의 결과를 바꾸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고, 흔한 경우도 아니다.

특히 그것이 저명한 학자와 관련이 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문헌연구 성과를 고려한 제자 고고학자들의 과감한 결정이었다 할 수 있다.

 

이처럼 1970년대는 서울의 도시화를 위한 발굴의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이 시기 발굴한 중요한, 의미 있는 유적들이 많이 사라졌다.

잠실지구의 가락동 고분군과 가락동 주거지, 화양지구의 구의동 유적은 발굴보고서에서만 확인되고 지금은 볼 수가 없다.

 

특히 지금은 사라져버린 가락동 고분군은 서울의 한성백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 중의 하나이고, 구의동 유적은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남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유적의 발굴임을 생각한다면 한없이 아쉬울 뿐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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