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4: 풍납토성1 본문
1964년 서울대 김원룡 교수에 의한 첫 발굴조사 이후 풍납토성風納土城에 대한 발굴이나 연구는 이상하리만큼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고대사 학계의 인식과도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
즉 풍납토성을 ≪삼국사기≫에 보이는 한강변의 사성蛇城[바람드리: 이 지역 이름 풍납리風納里는 우리말 '바람드리'의 한자어: 뱀 '사蛇'는 '배암'으로 '바람'과 음이 비슷하고, '드리'는 들일 '납納'의 뜻이 아닌 평야라는 뜻의 '들'로서 고대에는 마을 즉 성읍城邑을 '드리'라고 불렀음]으로 추정한 이후 그 위치 등을 고려하여 백제의 왕성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무관심 속에 풍납토성 내부에는 서울의 도시화와 서울 영역의 팽창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무질서하게 주택 등을 짓기 시작했다.
토성의 성벽만 사적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토성 내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성벽은 물론 내부도 점차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식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풍납토성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평소 풍납토성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보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이형구는 1996년 백제문화개발원구원의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풍납토성의 제원을 조사하였다.
조사는 풍납토성 주변 일대의 지표조사와 실측조사가 병행되었고, 토성 높이를 확인하기 위한 등고선 측량도 이루어졌다.
풍납토성에 대한 최초의 실측조사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조사과정에서 이후 풍납토성의 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계기가 된 큰 사건이 발생했다.
1997년 1월 4일 풍납토성 실측작업을 하던 이형구가 풍납현대연합주택조합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백제 토기 여러 점을 출토한 사실을 문화재관리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한 것이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즉시 현장 점검을 실시하여 공사를 중지시키고 그 대책을 논의하였다.
공사 현장은 이미 상당 부분 터파기 공사가 이루어졌고, 그 단면에서는 구운흙(소토燒土: 논밭의 겉흙을 긁어모아 그 위에 마른풀이나 나뭇조각을 놓고 태우거나, 철판 위에 흙을 펴 놓고 불을 때어 살균한 토양 또는 그 토양 소독법)과 목탄木炭 등의 구덩이(수혈竪穴) 유구와 다량의 백제 토기 파편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긴급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1997년 이루어진 풍납동 현대연합주택 재건축부지 지역과 풍납 제1지구 건축 예정지구에 실시된 조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1997년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풍납토성 인접 외곽지역에 대한 조사가 1996년에 이루어졌다.[위 발굴조사 목록(2)의 '풍납토성 주변 유적']
풍납토성 내부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는 아니지만 풍납토성 관련 조사로는 1964년 이후 무려 32년만에 이루어진 풍납토성 주변유적 발굴조사였다.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 산하 서울 중앙병원에서는 풍납토성의 서쪽 벽 인근에 병원 복지시설을 계획하였는데, 지금의 서울 아산병원 패밀리타운이다.
이에 이 지역에 토성의 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해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번 조사지역 부근에는 서울 중앙병원과 한강 극동아파트, 삼표레미콘 공장 등이 위치하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토성 서쪽 벽이 일부 남아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풍납토성의 남쪽 벽과 인접한 부분이며, 조사 당시 성벽 주변은 경작과 민가 철거 등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해자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나 출토된 여러 종류의 백제 토기는 풍납토성 연구의 한 자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비록 구제발굴이지만 오랫동안 방치했던 풍납토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시작점이었다는 점에서 그 발굴성과와는 상관없이 발굴 자체에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풍납토성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이자 뚜렷한 발굴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1997년 발굴조사 이후부터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형구 교수가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의 백제 토기 출토 사실을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시작된 긴급 조사였다.
조사지역은 풍납동 231-3번지 외 39필지 3,200여 평의 면적에 기존 연립주택 등을 허물고 아파트를 재건축하기 위한 풍납 현대연합주택조합 부지로서, 발굴보고서에는 '가 지구'로 칭하였다.[위 발굴조사 목록(2)의 '풍납동 현대연합주택 재건축부지 유적']
위치상 사적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풍납토성 동쪽 벽에서 약 100미터 안쪽에 위치한 곳이다.
발굴조사 이전 이미 전체 공사면적인 3,200여 평 중 500여 평 가까이가 지하주차장 시공을 위한 터파기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지표 아래 4미터 정도까지 파내려 간 상태였다.
터파기 공사 구간의 토층 단면을 볼 때 지표 아래 2미터 정도 곳에 백제시대 유물포함층과 주거지 또는 움집터로 추정되는 유구 단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즉각적으로 아파트 공사를 중지시키고 정확한 유구 성격과 분포 범위 등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시굴조사에 들어갔다.
당시 겨울이고 서민 주택조합의 사정이 긴박하여 시굴조사 위주로 조사를 실시하고자 했지만 조사가 시작되면서 대형 주거지 등 중요 유구가 계속 발굴됨에 따라 조사기간 연장이 불가피했다.
발굴 기간은 1997년 1월 16일부터 9월 5일까지로 상당히 장기간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시공사와의 실랑이 등으로 여러 차례 조사가 중단 사태를 겪는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상습 침수지구라는 불리함을 개선하고자 소규모 단독주택 거주자들이 뜻을 모아 지역조합을 결성, 고층아파트로 재건축할려는 열기가 한창 높았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풍납동 안에서 벌어지는 긴급 조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 한신대로 구성된 '풍납지구 긴급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풍납지구 긴급 발굴조사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런 조치의 일환으로 앞서 실시한 '가 지구'와 인접한 같은 현대건설에서 재건축을 추진 중인 풍납2동 제1지구 재건축조합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에 착수하였다.[위 발굴조사 목록(2)의 '풍납 제1지구 건축예정지구 내 유적']
행정구역으로는 풍납동 246-3 외 122필지 6,000 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이었으나 외곽 울타리 등을 제외한 실제 조사 가능 면적은 4,300여 평 정도로 보고서에는 '나 지구'라고 했다.
지금은 '가 지구'와 '나 지구' 두 지역 모두에 현대리버빌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가 지구'의 발굴조사를 하는 동안 '나 지구'의 기존 건물 철거작업이 진행되었고, 발굴 기간은 1997년 10월 13일부터 11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내용이 방대하여 모든 내용을 일일이 서술하기는 힘들어 간략하게 발굴조사 내용을 보면, '가 지구'에서는 서기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3중으로 된 환호環濠[청동기시대부터 마을(취락聚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마을 주변을 감싸는 도랑] 유구를 비롯하여 초기 백제시대의 움집(수혈주거지) 11기, 물건을 저장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용도의 구덩이 43기, 토기 가마 1기 외에 많은 토기들이 흩어져 있는 유구[토기산포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나 지구'는 조사 결과 '가 지구'와는 달리 4분의 3 정도의 면적이 홍수 때문에 교란되어 있었지만, '가 지구'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가 지구'와 같은 성격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 8기와 그보다 시기가 앞서는 3중의 환호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단은 이번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의 실체를 국민과 학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풍납토성 내부 아파트 재건축 현장의 지하 4미터 깊이에서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커다란 사건인 것이었다.
비록 아파트 터파기 공사로 유구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긴 했지만, 규모면에서나 출토유물 면에서 월등하다 할 수 있는 움집터 19기를 비롯하여 부속 움집유구, 토기가 흩어져 있는 유구, 쓰레기장 구멍 유구, 토기 가마 등 여러 종류의 유구들이 확인되었고, 특히 이들 유구보다 이른 시기의 3중 환호 유구 등도 발견되었다.
3중 환호 유구는 층위상으로는 가장 하층이었으며, 주거지 등 토성 내부에서 발견된 유구의 가장 외곽에 위치하여 마치 이들 유구를 감싸는 듯한 모양으로 확인되었다.
3중 환호는 출토 유물을 볼 때 연대는 대체로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2세기대로 추정하였다.
발굴단은 토성벽으로 대체될 때까지 그 기능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 환호와 비슷한 시기로 볼 수 있는 유구에는 한강 유역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말각방형抹角方形
주거지[네모 난 움집터의 네 모퉁이를 둥글게 만든 주거지로서 둥근 움집터와 네모 움집터의 중간 단계]와 움집터 등이 있어 서기 전후 시기에는 풍납토성에 대규모 주민집단이 정착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초기 백제시대의 전형적 주거지 17기의 확인이다.
이 주거지는 이른바 평면 형태 6각형에 앞면부 단벽에 돌출된 출입구 시설이 있고, 특별히 진흙(점토粘土)과 널돌(판석板石: 널판같이 뜬 돌) 등을 이용한 부뚜막이 설치된 특징을 갖고 있다.
규모가 가장 큰 것들은 평균 면적 23평이 넘는 초대형으로 특수한 바닥시설을 갖추는 등 특별한 위상을 보여주고, 수막새 등의 기와 종류가 출토되었다.
발굴단은 이번 발굴 결과를 통해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한성백제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고, 주거지 규모와 출토유물의 위상 등에서 주변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도성의 핵심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계기로 풍납동에서 행해지는 모든 개발 행위 내지는 땅파기[굴토掘土] 행위에 대해 서울시의 문화재 관계자가 입회하도록 행정조치가 강구되었고, 그 결과 발굴조사가 필요한 부분에 한해 정식조사를 실시하도록 한 실질적인 사전조사 의무화제도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풍납지구긴급발굴조사단에 의한 조사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풍납지구긴급발굴조사단의 한 곳인 서울대박물관은 남양연립 재건축조합 건축 예정부지인 풍납토성 서쪽의 유실된 성벽 부근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위 발굴조사 목록(3)의 '풍납토성 내 남양연립 재건축조합 건축 예정지구 유적']발굴 지역은 송파구 풍납동 122-1번지로, 현재 신성 노바빌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발굴 기간은 1997년 7월 21일부터 7월 30일까지였다.
트렌치 trench[바닥을 파서 설치한, 도랑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 조사를 통해 토층을 확인했지만 모든 구간에서 홍수로 인한 모래 퇴적층만 확인되었을 뿐 별다른 유구나 유물은 없었다.
이어서 풍납지구긴급발굴조사단의 또 다른 한 곳인 한신대박물관이 삼화연립 재건축사업 부지인 토성 중심 부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위 발굴조사 목록(3)의 '풍납동 삼화연립 재건축조합부지 유적']
발굴 기간은 1997년 8월 12일부터 9월 1일까지였다.
조사 이전 재건축부지에는 이미 빔 beam[건물이나 구조물의 들보나 도리]을 박는 대형 중장비와 각종 시설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일부 공사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굴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는 없었다.
전체 지역 중 고작 10%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당시 발굴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발굴이 불가능했던 지점들에 대해서는 공사 땅파기 때 입회하여 확인만이라도 하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보고서 내용에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시공사, 재건축조합과의 마찰 내지 곤혹스런 성황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 조사 지역에 들어선 것이 바로 지금의 대동아파트이다.
유구와 유물은 백제시대에 해당하는 지하 4미터 정도에 위치한 갈색 사질 점토층에서 집중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 층에서 큰항아리(대형옹大型甕) 파편들이 집중적으로 버려져 있었고, 움집터들이 확인되어 전체적으로 넓게 굴착해 들어갔다.
그 결과 파손된 주거지로 보이는 흔적, 움집터 유구 및 쓰레기장, 도랑(구構)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유구의 수는 많지 않지만 출토유물의 양은 상당하였다.
출토유물은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그밖에 낙랑토기, 중국제 시유도기施釉陶器[유약을 바른 도기], 기와, 벽돌(전塼), 돌칼, 철기 종류, 거푸집(범范)이 나왔다.
발굴보고서 맺음말에서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단의 조사 방향과 생각을 정리하였다.
즉 풍납토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정작 유구나 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소홀히 한 채 토성의 축성연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 여부, 백제의 국가형성 시점 등으로 논점이 비약하면서 학계는 물론 여론·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발굴로 인해 백제의 국가형성 시점이 얼마나 소급할지에 집중되고 있었다.
즉 고고학적 증거물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유리한 몇몇 자료만을 곶감 빼먹듯이 활용하거나, 선입견에 좌우되어 자료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일삼고, 일부 학계의 고질적인 조급증과 강박관념이 더해지고 언론의 선정주의가 가세하면서 풍납토성에 대한 비합리적인 해석이 난무한다고 하였다.
이런 발굴단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1997년 초기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경우에 따라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인 해석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발굴단의 태도는 자칫 과열될 수 있는 풍납토성 발굴 결과에 대해 냉정하고 객관적인 모습을 요청했다는 면에서 합리적인 인식이라 생각된다.
또한 초기 풍납토성의 발굴조사에서 재건축조합 측의 비협조적인 모습과 발굴 현장의 냉랭한 상황을 발굴보고서에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어 당시 여러모로 어려운 조사 현실과 앞으로 닥칠 풍납토성의 우여곡절을 미리 보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2. 2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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