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2: 그리스도교의 등장과 승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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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2: 그리스도교의 등장과 승리

새샘 2023. 3. 23. 21:34

예수 시대의 유다와 갈릴리(사진 출처-출처자료1)

 

1세기와 5세기 사이에 그리스도교 Christianity는 유다 Judah에서 초라하게 시작해 로마 세계의 공식 국가종교로 성장했다.

그 후 그리스도교는 오늘날까지 서양문명의 형성 과정에서 하나의 (또는 유일의) 지배적 권력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도 Christians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종교가 이룩한 비범한 성장과 영향력은 그 종교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가의 입장에서 그것은 엄청난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초대 그리스도교의 호소력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궁극적 성공을 예측 가능한 또는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 말이다.

 

이것을 규명하려면 그리스도교가 초기 역사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다양한 집단의 사람에게 호소력을 지녔으며, 그들 개개의 집단이 그 호소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처음부터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고 서기 30년 무렵 유다와 갈릴리 Galilee의 유대인 Jew에게 전파되었으며, 2세기와 3세기에 동부 지중해의 그리스어 사용 도시 주민 사이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Constantinus the Great 시대(재위 306~337)부터 그리스도교는 황실 가족의 호감을 샀고 궁극적으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생애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단계들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예수의 생애

 

예수 Jesus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사실 고대 세계에서 존재가 잘 입증된 인물에 속한다.

그러나 그에 관해 상세한 것을 알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일부 반대 세력―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테 Pontius Pilate(영어는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와 대제사장 가야바 Caiaphas 등―이 그에 대해 말한 내용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를 언급한 동시대의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언급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그의 추종자 중 하나인 사도 바울 Paul the Apostle이 50년대와 60년대에 쓴 편지들이다.

예수의 생애를 서술한 네 복음서福音書 Gospel―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와 사도행전使徒行傳은 모두 70년에서 100년 사이에 작성되었다.

이 저술들은 후대의 여러 자료들과 함께 ≪신약성서新約聖 New Testament≫에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교의 저작 모음집으로서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히브리 성경≫에 추가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자료들도 유포되어 있었는데, 그 자료들 중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예수 어록―복음서 기자들은 이 어록을 참고했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2세기의 도마복음서처럼 상당히 늦게 작성된 비성서적 자료에도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믿을 만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1세기 자료에 의존하는 것을 선호한다.

 

예수는 서기 원년 직전에 갈릴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정확히 서기 1년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우리가 사용하는 연대 체계의 이런 오류는 6세기의 한 수도사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예수가 30세 되던 무렵 설교자이자 도덕개혁가인 세례자 요한 John the Baptist은 "그는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요,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환호하며 예수를 맞이했다.

그 후 예수의 생애는 설교와 치병과 가르침의 연속적 과정이었으며, 활동 지역은 주로 갈릴리와 유다 지방이었다.

그러다가 30년경 예수는 유월절逾越節 Passover―흥분하기 쉬운 유대인 군중이 대규모로 도시에 밀려드는 종교 축일 기간에 공개적으로 메시아 Messiah(구약성서에서, 초인간적 예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로서 예루살렘 Jerusalem 입성을 감행했다.

세 복음서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는 성전 제물을 취급하는 상인 및 환전상을 물리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규율을 위반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신속히 예수를 체포해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테에게 넘겨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

필라테의 주요 관심사는 자칫하면 시끄러워지기 쉬운 종교 축일 동안 되도록 조용히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필라테는 본보기 삼아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징계하기로 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에 대한 반역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처형 직후 예수가 살아 있으며 일부 추종자 앞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추종자들이 선포한 바에 따르면,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했고 40일 후에 승천했으며 최후의 날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생전의 예수는 종교적 교사이자 치유자였다.

그러나 죽은 뒤의 예수는 그 이상의 존재로 나타났다.

그의 전 생애는 추종자들에 의해 재해석되었는데, 이런 재해석의 증거가 바울의 편지와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누가복음서, 요한복음서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예수와 제2성전 시대 유대교

 

1947년 한 베두인 Bedouin 소년이 1세기의 어느 시기엔가 쿰란 Qumran 근처 동굴에 숨겨졌던 유대교 문서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로 알려진 이 문서 다발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만 학자들이 널리 이용할 수 있었다.

사해 두루마리들은 예수 시대 유대교의 관습과 믿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그야말로 혁명을 일으켰다.

자료의 대부분은 유대교가 지극히 다양했음을 보여주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는 로마 Roma(영어 Rome)가 유다를 정복한 지 아직 한 세대가 되지 못했다.

지방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산적 집단들이 빈번히 발호했다.

도시와 촌락에는 반란의 소문이 무성했고 이스라엘의 성지에 대한 유대인의 지배권을 회복시켜줄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감돌고 있었다.

정치적 목표를 지닌 가장 극단적 부류는 열심당熱心黨 Zealots이었다.

열심당원들은 무력으로 로마인을 물리치고자 했다.

그들의 활동은 마침내 두 번의 파멸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 첫 번째 반란은 66~70년에 일어났으며, 로마인의 보복 조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이 파괴되었다.

두 번째 반란은 132~135년에 일어났는데, 예루살렘 도시가 파괴되었고 거주하던 유대인 인구 전원이 추방되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필라테가 예수에 대한 처형을 결심한 동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필라테의 예수 처형은 예수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리고 그의 가르침이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을 알아보려면 동시대 유대교 내의 분열상을 살피는 편이 훨씬 유용하다.

 

유대인이 바빌로니아 Babylonia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뒤 수백 년 동안 유대교는 야훼 Yahweh(유일신)와 선민選民 Chosen people(유대인) 사이의 계약 관계에 기초한 비타협적인 유일신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서기전 1세기에 이르러 그 계약이 유대인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 중대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러한 논란의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토라 Torah(모세오경五經 Pentateuch 또는 Five Books of Moses, 즉 ≪히브리 성경≫의 처음 다섯 책)를 소중히 여기는 성문成文 전통의 수호자들은 세습 성전 사제 및 그들의 귀족 동맹 세력―이 집단은 사두개파派 Sadducees로 알려져 있다―이었다.

고대 세계가 으레 그렇듯이 종교 당국과 정치 권력 사이의 동맹은 긴밀했다.

로마 정복 이전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은 하스몬 왕조 Hasmonean dynasty―서기전 2세기에 시리아 Syria의 셀레우코스 왕조 Seleucid Dynasty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다―의 유대인 왕이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가 정복한 이후 대제사장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 결과 사두개파는 성전 종교의식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반역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사두개파의 으뜸가는 종교적 경쟁 세력은 바리새파派 Pharisee였는데, 그들은 율법 교사이자 설교자로서 어떤 의미에서 제1성전 시대 예언자적 전통의 계승자였다.

율법의 요구가 오직 사제에게만 적용한다고 간주한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바리새파는 야훼의 613개 계명 전체가 유대인 모두에게 관련된다고 주장했다.

율법 해석자였던 바리새파는 시내 산에서 야훼가 모세 Moses에게 성문 및 구두로 토라를 수여했다는 점을 자신들의 권위의 근거로 삼았다.

성문 토라는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구두 토라―성문 토라를 어떻게 해석하고 일상생활에 적용할 것인지를 설명했다―는 교사가 학생에게 말로 가르치는 가운데 모세 시대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되고 있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했지만, 그것을 매우 유연하게 일상생활에 적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바리새파는 이웃사람과 함께 안식일安息日 Sabbath(편하게 쉬는 날로서, 유대인은 안식일에 모든 일 심지어 음식을 집 밖으로 운반하는 일도 해선 안 되었다)에 저녁식사를 할 수 있게 하고자 기꺼이 동네 전부를 한 집으로 간주했다.

안식일 규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개인에 대한 보상과 징벌이 이루어지는 내세의 존재를 믿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개종자를 찾았고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신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다―를 기다렸다.

모든 국면에서 바리새파는 좀 더 전통적인 사두개파와 달랐다.

에세네파派 Essenes등 다양한 분파 집단은 한층 더 급진적이었다.

에세네파는 수도원 성격의 집단으로서 금욕과 회개에 의한, 그리고 다른 유대인과의 엄격한 분파적 분리를 통한 영적 해방을 갈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삶에 에세네파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간주하지만, 당대의 유대인은 예수를 급진적 바리새파로 여겼을 것이다.

율법의 윤리적 요구―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내게 해코지를 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할 의무―에 대한 예수의 강조, 내세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에 복종할 것을 촉구한 점 등은 모두 바리새파의 믿음과 잘 부합한다.

하지만 예수는 이런 원리를 바리새파보다 한층 더 확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제자들이 들판의 곡식을 꺾어 먹음으로써 안식일 율법을 위반했을 때 예수는 그들을 정당화하면서 이렇게 선포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바리새파의 이론을 이런 식으로 확장시켰으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바리새파가 중요시한 율법 준수 개념의 토대를 완전히 허물어뜨릴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유대교의 다양한 분파들 가운데 어느 집단도 획일적이지 않았다.

가장 분파적 성향이 컸던 에세네파도 내부적으로 다양한 믿음과 관습을 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 대다수는 자신을 그들 집단 중 어느 하나와 동일시하려 하지 않았다.

사두개파도 더 큰 규모의 성전 사제단 내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을 뿐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 대다수에게 유대교란 해마다 몇 차례씩 명절마다 예루살렘 성전 방문하기, 매년 성전 세금 납부하기, 그리고 기본적인 종교 계율 준수하기―아침저녁으로 기도 올리기, 할례(남성)와 정화 의식(특히 여성) 행하기, 안식일 노동 금지, 돼지고기·피·조개 따위의 음식 금지― 등을 의미했다.

 

예수는 그런 율법을 확대 해석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율법을 폐기하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예수가 유대인 사회 전반에서 논란이 된 이유는 그의 제자들이 그를 메시아―이스라엘을 적에게서 구원해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이 있은 뒤 그와 같은 주장은 더욱 크고 강력해졌지만, 제자들은 극히 소수의 유대인들에게만 설득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신학 사상을 원용해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선포한 바에 따르면, 예수는 이제 단순히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었다.

예수는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 '기름 부음'이란 기름을 붓거나 문지르는 의식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르심을 상징)요 신의 거룩한 아들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고통 받고 죽임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왔고, 죽음에서 부활해 하늘로 올라갔으며 세상 끝 날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 성장

 

바울의 전도 여행(사진 출처-출처자료1)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의 발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은 사도使徒 apostle(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가 직접 파견한 자를 말하며, 예수의 12제자와 바울과 마티아 Matthias 등 14명) 바울(또는 바울로) Paul(10~67)이었다.

원래 이름이 사울 Saul이었던 그는 소아시아 동남부의 타르수스 Tarsus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철두철미한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처음에는 예수의 추종자를 박해했다.

그러나 눈이 멀게 된 뒤 예수의 음성을 듣고 회심悔心 conversion(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경험한 뒤 그는 예수 운동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고,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그리스어 사용 비유대인 공동체를 상대로 새로운 믿음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방인(비유대인)의 사도를 자처한 바울은 유대교 율법의 속박을 거부하면서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구원에 적절치 않다고 선언했다.

이런 그의 입장은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교도들―예수의 동생 야고보 Iacobus(Jacob)가 이끈 집단―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격렬한 토론 끝에 바울이 승리를 거두었다.

일부 그리스도교도는 여전히 유대교 율법을 준수했지만, 바야흐로 이 신앙 운동의 미래는 유다와 갈릴리 바깥에 형성된 비유대인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에게 달려 있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 개종자의 주류가 누구였는지는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세기에 이르러 꽤 큰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로마 시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 세계의 주요 도시에 등장했다.

이 공동체들은 이미 유대교의 종교 사상을 그리스의 지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었다.

바울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그리스화된 유대인 중 일부에게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매력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어 사용 유대인 공동체 주변에 모여든 비유대인 집단―'경건한 이방인들 God-fearers'에게 훨씬 더 큰 호소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경건한 이방인들은 유대교 율법의 모든 가르침을 따르지는 않았다(대부분의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할례를 특히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일신교와 철두철미한 도덕 기준 때문에 유대인을 존중했고 유대인의 삶을 본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평범한 그리스인 사이에도 침투해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스인은 그리스도교와 외견상 비슷한 다른 신비 종교들(미트라 Mithra 신을 섬기는 밀교인 미트라교 Mithraism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부활의 신 오시리스 Osiris와 성스러운 소 아피스 Apis를 결합한 그리스-이집트 신 세라피스 Serapis 숭배 등)―이들 종교 또한 정교한 입교 의식(그리스도교의 세례 같은)과 구원을 위한 특별한 종교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에 이미 익숙해 있었다.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비 종교 사이의 차이점은 두드러졌다.

동시대의 다른 종교들고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인격적 회심을 통한 개인의 변화를 강조했지만, 다른 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강력한 공동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직 구조는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발전했다.

2세기 중반 로마의 그리스도 교회는 주교―그는 사제, 부제, 고해신부, 퇴마사 등의 하위직을 거느렸다를 두고 있었다.

여성 역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여성은 후원자와 기부자(로마 상층계급 여성이 신흥 종교에서 종종 맡았던 역할)로서뿐만 아니라 주요 직책(여성 주교나 사제는 없었지만 여성 부제는 있었다)을 맡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높았던 여성의 지위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고, 그리스도교를 미트라교와 분명히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미트라교에서는 여성이 교단에서 직책을 갖기는커녕 아예 입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교도가 자선을 통해 가난한 신자를 돕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폭넓은 지지자들을 끌어 모았지만, 특히 당시의 급변하던 경제 상황 속에서 생계수단마저 상실한 빈민(예를 들어 도시의 기술공)에게 각별한 호소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요인은 새로운 종교의 호소력―특히 2세기와 3세기 그리스도교 개종자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그리스어 사용 도시 거주민에 대한 호소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렇지만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도가 되고자 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역사가들이 분명히 답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 특별히 3세기 혼돈의 세계 속에서 개종자에게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 제시되곤 한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리스도교가 3세기에 성장했고 그리스도교도가 내세를 믿었다고 하는 사실에만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정확한 인과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다만 우리는 2세기와 3세기 지중해 세계의 많은 인구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믿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사회 및 유대인 사회가 그들에게 불만을 품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사실, 이 두 가지만을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어 사용 공동체 안에서의 그리스도교 성장이 가져온 궁극적인 결과를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에 적대감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두 종교는 2세기와 3세기를 거치면서 각기 위상을 재정립했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그리스 문화 환경에 적응했고, 유대교는 성전 파괴 및 유대인의 대대적인 성지 추방이란 새로운 현실에 적응했다.

이 시기에 유대교 율법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유대교 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무시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미트라교나 세라피스 숭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가 신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구세주라고 하는 믿음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 대부분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의 신뢰성을 (적어도 잠재적으로)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는 ≪히브리 성경≫이 그리스도교에 부적절하다고 선언했던 마르키온 Marcion―2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처럼 대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교도는 그리스도교의 유대교적 뿌리를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메시아 예언 및 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재해석하면서 이제 자신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신은 유대인을 거부하고 그리스도교도를 새로운 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세상 끝 날이 오면 유대교는 소멸될 것이며, 그때까지 유대교가 존속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에 관해 그리스도교가 옳았고 유대교가 틀렸음을 증명―유대교 자체의 메시아 예언 및 유다 백성의 비극을 통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안에서 소수파 종교로 머무는 한 로마 국가 내 유대인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2세기와 3세기 내내 유대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합법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믿음과 관습에 대한 로마인의 태도가 어찌되었든 간에 로마인은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이어온 종교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했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혁신이었으며, 전통적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에서 새로움이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로마 국가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식 입장은 대체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1세기와 2세기에 국가의 공식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방 행정관이 박해를 가한 경우가 있긴 했지만, 로마 당국은 대체로 그리스도교도를 관대하게 대했다.

3세기에 중앙 정부에 의한 조직적 박해가 일부 있었다.

마지막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재위 284~305) 치세 말기와 그의 계승자 갈레리우스 Galerius(재위 305~311) 치세 초기에 있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단기간 행해졌기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3세기 초 그리스도교는 박해로 뿌리 뽑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마침내 갈레리우스는 311년 사망 직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교도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가 존재하지 않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300년에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1~5퍼센트만이 그리스도교도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많았던 제국 동부에서도 그리스도교도의 인구는 약 10퍼센트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넉넉하게 잡은 수치이다.

그리스도교도 인구는 계속 늘어났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다수파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역사가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는 청년 시절 그리스도교에 접촉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황제의 지위에 도전한 시점에 이미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교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신앙에 헌신하게 된 것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 Battle of the Milvian Bridge(312)를 준비하던 중 하늘에서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목격하고 하늘에서 "이 징표로 승리하라"고 선포하는 목소리를 듣고 난 뒤의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그 상징을 방패에 그려 넣으라고 명령했다.

그날의 승리에 힘입어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호의를 보였고 제국 전역에서 교회 건축을 후원했다.

치세 말기에 그는 다른 모든 행정 업무보다 그리스도교 지원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국교로 만들지도 않았고 다른 종교를 금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를 황실 가족이 총애하는 종교로 만들었고 거의 순식간에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지배계급이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탁월하고 (잠재적으로) 수지맞는 종교로 변모시켰다.

점차 제국의 여타 주민들도 그 뒤를 따랐다.

4세기 말에는 제국 인구의 절대다수가 그리스도교도였고 주교들은 그들이 사목司牧하는(사제가 신도를 통솔·지도하여 구원의 길로 이끄는) 도시에서 압도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궁정에 이교도 및 그리스도교도 관리를 함께 거느리면서, 공적인 언동에서 비그리스도교도를 자극하지 않도록 유의했다.

그러나 그의 계승자들은 점점 더 비타협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고, 경쟁 종교들에게 관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Iulianus(재위 361~363) 치세는 일시적으로 예외적인 시기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고 전통적인 로마의 이교를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와 더불어 친이교적인 칙령도 철회되었다.

그리고 황궁 주변의 그리드소교도 관료들은 황제의 권력을 이교 탄압에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대제 Theodosius the Great(재위 379~395)는 이를 실행에 옮겨 제국 내의 모든 이교 숭배를 금지시키고, 로마의 원로원 의사당에서 승리의 여신 제단을 철거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로마가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 Visigoths에게 약탈당했다.

이교도들은 그 인과관계에 주목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3. 3. 2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