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4: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4: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새샘 2023. 4. 14. 15:59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을 내부에서 변화시키는 동안 제국은 변경 밖에서 밀어닥친 세로운 압력에 직면했다.
3세기와 4세기 동안 페르시아 Persia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로마 제국은 동부 변경에 고비용의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동부에서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려면 로마 제국은 서부에 주둔해야 할 병력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 이런 병력 감축 결과 서로마 제국은 3세기 중반 게르만족 Germanic peoples에게서 파상적인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4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평화로웠고, 제국은 농업적·상업적으로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5세기 초에 들어 게르만족의 새로운 파상 공격이 제국 서반부를 놀라우리만큼 신속하게 휩쓸었다.
이런 파괴의 와중에서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이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에 등장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게르만족과 로마의 관계
5세기 게르만족의 로마 침입 | |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고트족 승리 | 378년 |
반달족,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 침입 | 406~407년 |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 410년 |
반달족의 로마 약탈 | 455년 |
오도아케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시킴 | 476년 |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의 이탈리아 지배 | 493~526년 |
게르만족은 로마인의 눈에 야만인으로 비쳐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시에 살지도 않았고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결코 미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주 농업인이자 세련된 금속 세공인으로서 몇 백 년 동안 로마 세계와 교역하고 있었다.
스틸리코 Stilicho라는 게르만인은 게르만족의 서로마 제국 침입이 시작되던 5세기 초에 사실상 서로마 제국 Western Roman Empire의 군사 지도자였다.
일부 변경 지역에서는 인구가 적은 오지의 로마 수비대 강화를 위해 게르만 부족 전원이 동맹자로서 로마 국경 안쪽에 정주하고 있었다.
4세기 말에 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비록 그들이 믿은 그리스도교는 아리우스 Arius 이단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모든 상호작용을 통해 게르만인은 로마 문명에 매우 친숙했고 그것을 매우 좋아했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사태의 전말은 4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훈족 Huns으로 알려진 전사 집단이 서쪽으로 이주해 흑해 Black Sea 북부 및 동부 지역으로 밀려들어왔다.
훈족의 침입으로 수많은 다른 민족―그들 중 가장 중요한 민족은 고트족 Goths―이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해 들어와 도나우 Danube 강가의 로마 변경 지역을 괴롭혔다.
고트족은 로마인에게 정복되었던 적은 없었지만 여러 세기 동안 로마 국가의 피보호민이었다.
376년 고트족의 인구가 너무 많고 저항이 필사적이어서 무력으로 쉽사리 쫓아버릴 수 없게 되자, 로마는 그들이 도나우 강 건너 제국 국경 안에 정착할 것을 허용했다.
식량과 보급품을 받는 대가로 고트족은 그들의 뒤를 따라 제국으로 흘러드는 다른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그 지역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로마는 약속했던 식량과 보급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의 지방 관료들은 굶주린 고트족에서 식량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들 자신과 자녀를 노예로 팔 것을 강요했다.
378년 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 군대는 아드리아노플 전투 Battle of Adrianople에서 패배했고, 원정군을 지휘했던 황제 발렌스 Valens(재위 364~378)가 전사했다.
새로운 황제 테오도시우스 대제(테오도시우스 1세) Theodosius the Great(재위 379~395)는 고트족이 요구한 보급품과 농토를 제공하고 그들을 로마 군대―고트족 군사 지도자 휘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신속히 평화를 회복했다.
한동안 고트족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테오도시우스는 죽기 전에 제국을 두 아들에게 분할해 물려주었고, 두 아들의 고문들은 즉각 상대방을 음해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처럼 유리한 상황을 맞이한 고트족은 알라리크 Alaric의 리더십 아래 단결해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켰다.
동로마 황제는 고트족을 매수해 경쟁자인 서로마 황제를 공격하도록 했다.
즉각 고트족의 이탈리아 침공이 뒤따랐다.
한편 훈족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해 오늘날의 헝가리 Hungary에 이르렀고,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여러 집단을 서쪽으로 밀어붙여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변경 방면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406년(또는 407년) 말 폭풍이 밀어닥쳤다.
반달족 Vandals이 이끈 게르만 부족 연합 집단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Gallia(영어 Gaul)를 침공했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의지휘관인 스틸리코는 알라리크 지휘 하의 고트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몇 달 뒤 궁정에서 벌어진 쿠데타로 스틸리코가 밀려나자 고트족도 서로마 제국 침공에 가담했다.
410년 그리스도교도인 고트족이 로마 시를 함락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로마는 식량이건 토지건 내놓을 것이 거의 없었다.
고트족은 이동을 계속해 마침내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냐 España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서고트 왕국을 수립했다.
반달족 역시 에스파냐를 향해 떠났지만 최종적으로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북아프리카의 풍요로운 농경지역에 정착했다.
455년 반달족은 바다를 건너 로마를 공격했다.
프랑크족 Franks, 부르군트족 Burgundians, 알라만족 Alamans 등의 게르만 부족은 신속히 반달족의 뒤를 따라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들의 왕국을 건설했다.
5세기 중반에 이르면 훈족마저 저 유명한 사령관 아틸라 Attila의 지휘 아래 로마 침공에 가담했다.
476년 무기력한 찬탈자이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Romulus Agustulus('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재위 475~476)는 게르만족, 훈족, 그리고 제국에 불만을 품은 로마인 등으로 이루어진 혼성 군대를 지휘한 오도아케르 Odoacer에 의해 쫓겨났다.
이 사건으로 서로마 제국은 멸망을 맞이했다.
그러나 동반부에는 한 명의 로마 황제가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제국 서반부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주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 동로마 황제가 서로마의 정국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한 야만인 왕에게 다른 야만인 왕을 폐위토록 뒤에서 사주하는 것뿐이었다.
즉, 황제 제노 Zeno(재위 474~491)는 이탈리아에 대한 직접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 Theodericus를 사주하여 발칸 반도에 있던 동고트족 군대를 로마로 이동시켜 오도아케르를 제거토록 했다.
약 10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고트족은 이탈리아에서 훈족을 완전히 몰아냈다.
테오도리쿠스는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세웠고 로마 황제의 지원 아래 526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게르만족 침입의 성공과 그 영향
5세기의 서로마 제국 붕괴는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다.
제국에 침입한 군대는 전체 병력이 10만 명에 불과한 소규모였고 군사령관들의 다툼으로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일단 침입이 시작되자 행군 과정에서, 제국에 불만을 품은 로마인과 제국 안에 이미 정착한 게르만 동맹자들이 합류함으로써 군대의 규모가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숫자는 여전히 많지 않았다.
서로마 제국이 이미 붕괴 상태에 접어든 것도 아니었다.
최근의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400년 무렵 서로마 제국의 인구는 안정적이었고, 지방 경제는 활력이 있었으며, 지방 및 원거리 교역망은 여전히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500년에 이르러 서로마 제국의 경제적·정치적 세계는 사라져버렸다.
이런 돌발적이고도 전면적인 붕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군사적 실패 때문이었다.
이 같은 실패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연관된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서로마 제국의 군대는 이미 5세기 초부터 허약한 상태였다.
정예 병사들은 일찌감치 더 부유한 제국 동반부를 지키기 위해 철수해버렸고 남아 있는 군대도 병력도 지원도 형편없었다.
군대의 자급자족 능력을 강화하다보니 병사들은 갈수록 더 '민간인화'되었다.
400년에 이르러 많은 병사가 결혼했고 일부 병력은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했기 때문에 비상시에도 병력 이동이 어려웠다.
군대 지원을 위한 재원을 늘리기도 쉽지 않았다.
이미 과중한 세금을 더 올리려 했다가는 불만을 품은 납세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마저 있었다.
시민의 사기도 낮았다.
4세기의 제국 관료체제는 귀족들에게서조차 충성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한편 게르만족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을 로마 사회에서 익숙한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그 결과 5세기의 침공에서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전면 충돌은 거의 없었다.
침입한 게르만 군대가 싸워보지도 않고 승리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제국 주민이 자체 방어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투를 치른 경우에도 대개 양쪽 군대 모두가 로마인·게르만족·훈족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였으며 각기 해당 군대 총사령관의 이름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전반적인 사기는 동로마 제국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이 5세기의 침입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원인은, 동로마가 서로마에 비해 부유했고 따라서 서로마보다 군사력을 잘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이르러 서로마의 많은 도시들은 과거에 비해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행정 중심지나 군사 중심지로 전락한 경우도 흔했다.
반편 동로마 도시들은 여전히 산업과 교역의 풍요로운 중심지였다.
동로마는 세금으로 거두어들일 재산이 더 많았으므로 제국 관료제의 부담을 감당하기가 서로마보다 용이했다.
또한 국경선의 길이도 짧았고 군대에 대한 지원도 풍부했다.
침입자들을 매수해 그들의 관심을 서로마 쪽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이런 모든 이유로 동로마는 침몰을 면했고, 5세기를 거치는 동안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반면 이 시기에 서로마는 허우적대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동로마와 서로마의 경제력 차이는 몇 백 년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그 차이는 5세기의 침입으로 인해 더욱 벌어졌다.
침입자들이 약탈하고 점령한 모든 영토는 고스란히 서로마 제국의 세입 감소를 의미했다.
상실의 규모는 엄청났다.
410년 고트족의 약탈이 있은 지 10년 뒤 로마 시의 세입은 종전의 15퍼센트에 불과했다.
게르만족의 갈리아·에스파냐 공격도 세입 감소를 초래했다.
420년 무렵 이후 침입자들은 그들의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지역은 로마 제국 정부에 대한 세금 납부를 전면 중지했다.
439년 반달족이 로마의 서부 속주 중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했을 때, 로마 정부의 세입은 아직 제국 지배 아래 남아 있던 이탈리아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것이 전부였다.
서로마 제국 붕괴의 경제적 결과는 심대했다.
400년 무렵 서로마 제국의 경제는 저가의 고품질 소비재의 대량 생산―제국 전역에 대량으로 운송, 보급되었다―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500년에 이르러 이 세계는 사라졌다.
지역 차원의 교환 체계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대규모 상품의 원거리 교역은 제국 동반부에서만 살아남았다.
기술 숙련도―특히 도자기 생산 분야에서―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생활수준도 하락했고 서로마 제국의 인구도 감소했다.
실제로 서유럽 전체 인구는 앞으로 1천 년 동안 4세기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 거주 로마인의 삶은 다른 부문에서는 한층 완만한 변화를 겪었다.
로마의 조세제도는 대개 살아남았다.
물론 이제는 그 수입이 새로운 야만인 지배자의 돈주머니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로마의 법률·행정체제도 마찬가지였다.
농경지의 경우 로마의 농업 방식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전과 다름없이 지속되었고 지주도 동일 인물인 경우가 많았다.
로마 귀족은 시민 생활을 게속해서 지배했다.
한편 로마의 도시들은 도시 인근 지역을 계속 지배했는데, 특히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냐에서 그러했다.
야만인의 침입은 로마 문화를 종식시키지 않았고, 새로운 이주자에 대한 로마 문화의 영향력을 단절시키지도 않았다.
이탈리아 정복자인 테오도리쿠스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유능한 고트 사람은 로마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오로지 보잘것없는 로마인만이 고트 사람처럼 되기를 원한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3. 4. 14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원군 이하응 "묵란도" (1) | 2023.04.18 |
---|---|
서울을 보여주는 시대별 유적 (0) | 2023.04.14 |
소당 이재관 "천지석벽도" (0) | 2023.04.11 |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9: 중랑구 지역 (0) | 2023.04.04 |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3: 4세기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상황 (0) | 202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