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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이하응 "묵란도"

새샘 2023. 4. 18. 16:52

이하응, 묵란도, 1882, 종이에 수묵, 90.0x27.6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하응, 1881, 총란도 대련(사진 출처-출처자료3)

 

완당 김정희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은 한말 서화가 여섯 사람—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련,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운미 민영익— 중 다섯 번째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대원군이란 칭호는 조선시대에 왕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종친 가운데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친아버지를 일컫는다) 이하응李昰應(1820~1898)으로, 대원군 하면  난초로 유명하다.

 

김정희와 대원군은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게 된 것은 추사가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지금의 서울 용산인 강상에 머문 첫해로서 당시 추사는 64세, 대원군은 30세였다.

이 당시 이하응은 아직 대원군이 되지 못하고 파락호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받고 있어 위장하고 다닐 때였다.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玄孫(고손자高孫子: 손자의 손자)인 남연군의 아들이었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추사의 11촌 대고모였기 때문에 대원군과 추사는 내외종간의 먼친척이었다.

 

스승과 제자로서  만난 추사와 대원군의 관계는 추사가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어 일시 중단된다.

하지만 이때 추사가 그려준 난보蘭譜(난맹첩蘭盟帖)가 대원군 난초 그림의 기본이 되었음이 대원군의 ≪묵란첩墨蘭帖≫에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추사는 난초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券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란 뜻으로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가 있는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인위적 기교를 넘어 손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고고한 예술을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난초를 그릴 때는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 출발해야 하며,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비로서 시작의 기본을 얻게 될 것이라 하였고, 난초 치는 두 가지 기법은 세 번 꺾는 삼전법과 인품을 갖춘 교양이라 추사는 강조했다.

이렇게  대원군의 난초 그림 구도나 난초 모양에서 추사와 공통점이 있으며, 대원군이 추사의 필법을 따르면서도 대원군만의 필법과 인생을 관통하는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대원군의 난초 그림을 석파란石坡蘭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대원군의 난초 그림들 가운데서 대원군의 진적眞跡·眞蹟·眞迹(친필親筆: 손수 쓴 글씨나 그림)을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소위 '귀인貴人 난초'라고 해서 그의 난초를 요구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나중에 당대 최고 권력자로서 세도에 오른 이후나 말년에 가서는 일본 사람들이 귀인의 그림이라고 이를 굉장히 많이 요구해서 일일이 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원군은 중국 명明나라의 동기창董其昌(1555~1636)이 하듯이 사랑방에 대필할 사람을 두고서 대신 그리게 한 다음 낙관만 자기가 했다.

따라서 진적을 식별할 때 낙관만 가지고는 대단히 어렵게 된 것이다.

대필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석란도石蘭圖로 유명한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1855~1921)이었다.

더구나 대원군의 난초는 그의 생전에도 위작이 돌아다녔다고 하나 진적 확인이나 감별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대원군의 묵란도 형식은 크게 군란화群蘭畵(세로의 긴 화면에 배경 없이 뿌리가 드러난 몇 포기의 난을 겹치지 않게 지그재그로 배치한 그림), 석란화石蘭畵(바위를 배경으로 위아래로 난을 배치한 그림), 그리고 총란화叢蘭畵(세로로 긴 화면에 언덕을 배경으로 무리지어 자란 난잎을 가로로 길게 그린 그림)의 세 가지.

 

대원군의 호인 '해동거사海東居士'란 낙관이 있는 위 그림 <묵란도>대원군이 실각한 후 운현궁에 눌러앉아있던 1881년 그렸던 <총란도 대련> 중 하나이다.

1882년 여름 북경에서 지인이 다시 사온 그림을 보고서 잃어버렸던 진주를 찾은 심정을 추서追書(옛일을 뒤쫓아 쓰거나 나중에 다시 씀)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그림을 추서한 직후 대원군은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중국으로 피랍되어 장래가 불투명한 억류생활로 병고에 시달리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그 후 8개월이 지난 뒤 대원군은 질병의 고통과 가슴속 한을 승화시켜 묵란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묵란도> 아주 힘차고 날카로운 난초 그림이다.

이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밀접한 것으로, 처절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야망과 숱한 좌절이 날카로움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묵란의 줄기 하나하나에 그의 정치적 야망의 좌절로 인한 울분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이 그림에는 후대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가 그림을 본 느낌을 적은 글이 화면 가득하다.

 

※출처
1.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http://kocw-n.xcache.kinxcdn.com/data/document/2022/konyang/parkwanyong0901/27.pdf

3. https://m.cafe.daum.net/4702km/Brrf/420?listURI=%2F4702km%2FBrrf
4.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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