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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5: 서양 그리스도교 사상의 형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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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5: 서양 그리스도교 사상의 형성

새샘 2023. 4. 23. 20:32
4~6세기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의 형성
성 히에로니무스, 히브리어·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 340년경~420년
성 암브로시우스, 종교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자율권 확대 340년경~3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신국 등 저술 354~430년
보이티우스, 고전사상과 중세사상의 가교를 놓다 480~524년
카시오도루스, 수도사의 고전 문헌 연구 및 필사 옹호 490년경~583년경

 

4세기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서양의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그로부터 800년 동안 세계를 주도하게 될 신학 사상을 만들어냈다.

정치적 쇠퇴와 신학적 발전의 동시 발생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자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고전기의 유산이 소멸되고 있으며, 신은 세상을 일시적인 시험장소로밖에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은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서유럽 교회 네 명의 위대한 교부敎父(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이 제시했다.
성 히에로니무스 St. Hieronymus(영어 Jerome)(340경~420), 성 암브로시우스 St. Ambrosius(340경~397), 성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us(354~430), 성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Pope St. Gregorius(영어 Gregory) the Great (540~604)이 그들이었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대인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저작들을 다룰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업적은 7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성 히에로니무스와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사진 출처-Wikpedia)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불가타 Vulgata 성경≫('공동번역'이란 뜻의 라틴어 editio vulgata에서 유래)으로 알려진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최초의 라틴어 성경은 아니었지만 이내 표준 성경으로 자리잡았고 16세기까지 그 지위가 유지되었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강건한 구어체의 명료한 번역이었다.

번역으로 표현된 그의 활기찬 산문과 시는 앞으로 1천 년 동안 모든 라틴어 저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영향력 있는 주석가이기도 했다.

성경 구절을 문헌적·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우의적·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서양의 전통은 대부분 히에로니무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이자 수도원 제도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는 동시대의 수많은 여성들과 정중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독한 여성혐오주의자였다.

그는 뛰어난 독창적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의 사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함으로써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교가 고전 학문―그것이 그리스도교적 목적에 철저히 종속된다는 전제 아래―을 연구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의 고전에 대한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에 온전히 종속시켰는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한번은 그가 꿈에서 천국의 문에 도달했는데, 신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기보다는 로마 집정관 키케로 Cicero(서기전 106~서기전 43)의 제자에 속한다고 책망했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사진 출처-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Saint-Ambrose)

히에로니무스는 무엇보다도 학자였다.

반면 성 암브로시우스는 단연 현세적 인물이었다.

밀라노 대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그리스 도시 테살로니카 Thessalonica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도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대제 Theodosius the Great(재위 379~395)를 꾸짖을 정도로 대담했다.

물론 테오도시우스는 여전히 황제였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신앙 문제에 관한 한 "황제는 교회 위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로서 죄를 회개할 때까지 그를 교회 안에 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테오도시우스는 항복하고 밀라노에 있는 암브로시우스의 교회에 와서 고백성사를 했다.

이 유명한 사건은 종교 문제에 관한 한 서유럽 교회가 황제의 권력 앞에서도 자율성을 지켜냈음을 잘 보여준다.

 

히에로니무스와 마찬가지로 암브로시우스도 키케로의 찬양자였다.

그가 성직자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서 쓴 ≪성직자의 의무에 대해서≫(386)는 키케로의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를 정교하게 모방한 작품이다.

그러나 키케로와는 달리 암브로시우스는 인간 행동의 시작과 끝은 사회적·정치적 진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경배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암보르시우스는 신이 거룩한 은혜의 권능을 골고루 나누어줌으로써 모든 그리스도교도에게 도움을 베풀지만 일부 신자에게는 다른 신자보다 더 많은 은혜를 허락한다고 주장한 점이었다.

은혜의 신비―신은 왜 특정인에게 더 많은 은혜를 허락하는가―에 관한 암브로시우스의 강조는 그의 제자인 히포 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듬어지고 확장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

 

성 아우구스티누스(사진 출처-Wikpedia)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 교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실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그리스도교 사상가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후 중세 사상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그의 신학은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루터, 칼뱅 등에 의하여 주도된 16세기 종교 개혁의 중심 사상)의 발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수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신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로 자처할 정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가 그토록 폭넓은 영향력을 미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탐구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그리스도교였지만, 그는 이런저런 철학 체계를 섭렵하면서 그 어느 것에서도 지적인 또는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한 채 33세가 되던 해까지 세례받기를 망설였다.

다른 종교에 대한 회의, 성 암브로시우스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호소력, 그의 ≪고백≫에 감동적으로 묘사된 신비적 경험 등으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는 387년 그리스도교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교회에서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해 395년 북아프리카 도시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 머물면서 몹시 분주한 시간을 할애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분석한 100편에 달하는 심원하고 복잡하며 감동적인 논고들을 집필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만일 인간이 완전한 선을 본성으로 갖는 전능한 신의 피조물이라면 인간성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심각하게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성의 타락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생생한 묘사가 ≪고백≫에 등장한다.

이 저작에서 그는, 어린 시절 다른 소년들과 함께 이웃집 정원에서 배를 훔쳤는데 자신들이 배를 훔친 이유는 굶주렸거나 그 배가 보기에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단지 죄악 자체가 좋아서였다고 말한다.

인간이 선을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한다는 주장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지식의 결여를 뛰어넘는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악의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은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에게 신의 뜻을 따를 것인지 자신들의 뜻대로 할 것인지 결정할 자유를 주었다.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아담과 이브는 신의 의지가 아닌 자신들의 의지를 따르기로 선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후 신은 인간에게서 신성한 권능(은혜)―인간은 오직 이 은혜 때문에 인간적인 의지를 극복하고 신을 따를 수 있다―을 거둠으로써 아담과 이브의 후손을 제멋대로 살게 두었다."

그러므로 세상을 괴롭히는 모든 악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신보다 우위에 두려는 인간의 선천적 경향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신이 모든 인간을 저주해 지옥에 넣는다 하더라도 신은 정당하다.

그러나 신은 자비로운 분이기도 해서 그의 아들 예수의 희생을 통해 인류 가운데 일부를 선택해 구원을 베푼다.

그러나 그 누구도 타고난 본성만으로는 구원받을 자격은커녕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데 필요한 은헤도 얻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선택을 한다.

일부에게는 은혜를 허락하고 다른 일부에게는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신은 인류 중 일부를 구원하고 나머지를 저주받도록 예정했다.

만일 인간이 이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반발한다면 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일 엄격한 공정성이 유지된다면 인간은 모조리 정죄 받아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둘째, 신의 선택은 전능한 속에 가려진 하나의 신비로서 인간의 이해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와 같은 엄격한 예정설은 실질적으로 무기력과 운명론만 초래할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후대의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들은 이 교리를 전혀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

'선택된' 사람은 당연히 선을 행한다.

그러나 누가 선택되고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신이 허락하는 한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행의 핵심 지침으로 제시한 것은 사랑의 교리였다.

이 사랑의 교리란 탐욕의 삶과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삶, 신을 위해 이웃 사랑에 헌신하는 삶을 의미했다.

 

410년의 로마 함락 그리스도교도의 탓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답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신국론≫을 썼다.

이 저작에서 그는 인류 역사에 대한 해석에 예정설을 적용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 이래 최후 심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는 두 개의 대립하는 사회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두 집단이란 '인간을 따라 사는' 즉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들과 '신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전자는 '인간의 도시'에 속한다.

그들이 얻는 보상은 그들이 세상이 쌓아놓은 부와 명성과 권력이다.

인간의 도시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 지배자들은 평화와 질서를 가져오며, 따라서 그리스도교도의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오직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 즉 '신의 도시' 구성원이 된 사람들만이 심판의 날에 영생의 옷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도는 그들의 본향이 하늘나라임을 잊지 말고 마치 여행자나 순례자인 것처럼 세상에서 행동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도 최후 심판의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심판은 언제가 되건 반드시 오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의로운 삶을 영위함으로써 그에 대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대하고도 새로운 국면을 공식화했지만, 그는 자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이끌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오직 성경만이 알아야 할 가치 있는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성경의 많은 부분이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따라서 성경을 철저히 이해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부 그리스도교도가 자신처럼 기초학문(리버럴 아츠, 교양학문) libral arts(문법, 논리학, 수사학의 3학三學 trivium과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4과四科 quadrivium) 교육을 받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단 그 교육은 성경 연구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히에로니무스와 더불어 서양의 그리스도교도가 고전 시대의 문학적·교육적 전통을 보존해야 할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오직 엘리트에게만 기초학문 교육을 허용했다는 데 유념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입식 교리 학습으로 신앙을 배워야 했다.

그는 또한 고전 사상 그 자체를 위해 고전을 연구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라틴어와 그리스어 학문에 관해 전혀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건이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지혜라고 주장했다.

 

 

○고전 사상과 중세 사상을 이어준 보이티우스

 

보이티우스(사진 출처-Wikpedia)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추종자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이 컸던 인물은 로마 귀족인 보이티우스 Boethius(480경~524)였다.

보이티우스는 고대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련된 키케로의 문체로 글을 썼다.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란 점 때문에 그는 종종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고전 연구의 의의가 그리스도교적 목적에 봉사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이었다.

 

보이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한 세기 뒤에 살았으므로 고대 세계가 끝나가고 있음을 한층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의 목표는 소책자, 번역서, 주해서 등을 저술함으로써 고전 학문의 진수를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기초학문 과목 중 산술과 음악에 관한 소책자를 집필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도가 해당 과목에 관해 마땅히 알아야 할 기본 지식을 요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논리학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 및 또 다른 고대 철학자인 포르피리오스 Porpyrios(234~305)의 논리학 개론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또한 초보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 저작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주해서를 썼다.

로마의 저술가들이 논리학에 거의 관심을 둔 적이 없었으므로, 보이티우스의 번역서와 주해서는 그리스 사상과 중세 사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결정적인 고리가 되었다.

그 저작들은 또한 라틴어에 논리학 어휘를 제공했다.

몇 백 년이 흐른 뒤 12세기 서유럽에서 논리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이티우스의 업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보이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해석자였지만 그의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이었다.

이 점은 그의 그리스도교 신학 관련 논고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걸작인 ≪철학의 위안≫에서 잘 나타난다.

보이티우스가 ≪철학의 위안≫을 쓴 것은 생애 말년의 일이었다.

그는 동고트 왕국 Ostrogothic Kingdom 테오도리쿠스 대왕 Theodericus the Great(454~526)의 관리로 봉직하다가 반역 혐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난 뒤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이 책을 저술했다(역사학자들은 그에게 씌워진 혐의에 정당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이 책에서 보이티우스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 행복이란 부귀나 명예 같은 현세적인 보상이 아니라 오직 '최고선'인 신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신을 추구하는 데 바쳐져야만 한다.

보이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신학자가 아닌 철학자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인 계시 또는 구원에서 신의 은혜가 갖는 역할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근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철학의 위안≫은 중세에 가장 널리 애독되는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이유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대단히 훌륭한 문장으로 씌어졌다.

둘째, 이 책은 고전 사상을 그리스도교 사상 체계에 적용시키고 종속시켰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세월이 흘러 모든 세상사가 실로 황량하고 공허하게 보였을 때 신을 위해 사는 것만이 인생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하는 보이티우스의 유려하고도 철학적인 문장은 진정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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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2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