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서울의 흥미로운 유적, 보고 싶은 유적, 그리고 버리고 싶은 유적 본문
서울에서는 다양하고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각 유적들은 그 가치는 물론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에 발굴된 유적 가운데 재미있고 흥미로운 유적, 발굴은 했으나 지금은 없어져 버려 보고 싶은 유적, 그리고 발굴하여 지금은 복원이 되었지만 보고 싶지 않은 유적·버리고 싶은 유적으로 나누어 그 내용들을 알아보자.
조선 개국 공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선생(1342~1398)의 묘가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1989년 발굴조사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발굴 중 하나이다.
봉화 정씨 문헌공파文憲公派에서는 그동안 정도전의 묘로 전해오는 묘를 발굴하였다.
발굴 대상 묘는 총 3기로 이 중 제1호분으로 이름 지은 묘가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발굴단도 제1호분이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런 의견이 있는 가운데 흥미로운 발굴 결과는 제1호분 피장자의 유해가 머리 부분만 있다는 사실이다.
정도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태조실록太祖實錄≫을 보면 정도전은 참형斬刑(참수형斬首刑: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묘로 단정할만한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 등 결정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도 매장자의 주인공을 찾는 이런 성격의 조사는 서울 지역 발굴조사에서 없었다.
과연 이 묘는 참형을 당한 정도전의 묘일까?
지금 서초구청 옆 양재고등학교 정문 위쪽의 공원 안에는 '삼봉 정도전 산소 터'라는 자그마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아마도 발굴 장소 부근인 듯한데, 궁금하면 직접 찾아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가락동 고분군과 구의동 유적은 발굴은 했으나 현재는 그 흔적도 알 수 없는 유적들이지만, 있었으면 하는 보고 싶은 유적들이다.
지금의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과는 지역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가락동 고분군은 1969년 가락동 제1·2호분을 시작으로 1975년 잠실지구 조사 과정에서 가락동 제3·4·5호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 고분들과는 달리 결국 가락동 고분들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아마도 대부분 파괴되어 땅속에, 또는 아파트 아래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물론 보고서로 발굴 결과가 남아 있지만, 이 지역 다른 고분들처럼 정비·보존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면 주변 고분과의 비교 연구 등을 통해 백제사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이자 이 지역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가치 있는 유적으로 자리하였을 것이다.
1977년 발굴한 화양지구의 구의동 유적도 가락동 고분군과 마찬가지이다.
이 지역 개발을 위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20년 뒤 종합발굴보고서에서 고구려 보루로 유적의 성격을 수정했지만, 만약 그 때 고구려 보루로 인식했었더라면 그 가치로 보건데 보존·정비하여 복원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
1997년이 되어서야 아차산 제4보루를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하고 이후 고구려 보루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꾸준히 진행되었으니, 1977년 발굴한 구의동 보루가 남아 있었다면 고구려 보루에 대한 조사가 좀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고 상호 비교 연구도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 가락동 고분군이나 구의동 보루에 대한 재발굴이 언젠가는 가능하기는 할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본다.
보고 싶은 유적도 있지만 한편으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유적도 있는데, 바로 경희궁慶熙宮과 낙천정樂天亭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거의 완전히 파괴된 경희궁은 1980년대 복원을 추진했다.
이후 1998년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을 하고 건물들을 복원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경희궁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희궁을 원래의 경희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정문 위치도 예전과 다르고, 원래 경희궁의 규모와 비교하면 일부분일 뿐이다.
발굴단도 복원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발굴단은 출토 유물 보존을 위해 박물관 건립을 제안했고,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은 그 결과물이다.
문제는 복원 과정이다.
발굴을 하면서 경희궁 건물의 복원도 같이 진행되었다.
체계적인 복원이 아닌 '복원을 위한 복원'이고 '정해진 목적을 위한 복원'이었다.
특히 궁궐 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대한 발굴단의 반감은 1996년 발굴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는 문화재 관련자들의 반대와 후회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복원된 숭정전 등과 조화롭기만을 바란다"고 하여 당시의 냉랭한 시각을 잘 읽을 수 있다.
지금 경희궁은 조선의 5대 궁궐이라 하여 서울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다른 4곳의 궁궐과는 달리 궁궐로서의 품격도 떨어지고 원형과도 한참 멀다.
경희궁의 경우처럼 문헌자료나 고고학 자료가 부족함에도 무리하게 복원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꼭 복원을 하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유적들은 훌륭한 보고서와 실측도, 사진 등을 통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다.
1987년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낙천정도 지나친 복원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때의 발굴 결과와 발굴단의 제안 내용에 따라 1993년 복원된 조선 태종의 별장인 낙천정은 서울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기념물에서 해제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후 정밀조사 결과 원래의 위치에서 200m나 떨어져 있고, 정자의 건축양식도 조선 전기의 것이 아니었다.
발굴단은 발굴 당시 낙천정의 원래 터를 확인하지 않고 단지 이곳에서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채집되었다는 이유로 매우 구체적으로 복원 대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지금의 낙천정은 쓸모없는 건축물이 되었고, 원래의 낙천정 자리에는 표석만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3. 4. 2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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