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6: 서유럽 고전 문명의 그리스도교화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6: 서유럽 고전 문명의 그리스도교화
새샘 2023. 5. 2. 13:20○고전 문화의 그리스도교화
앞서 보았듯이 고대 말기의 그리스도교 지식인 가운데 고전적 전통을 버리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고전적 전통은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전적 전통은 철저히 이교적이었고, 황제가 공식적인 그리스도교도가 된 뒤부터 이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고전 학문은 또한 혼합주의와 연관되어 있었다.
혼합주의란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믿음을 함께 받아들이는 태도로서 4세기 귀족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리스도교도 지식인들은 고전 문학과 철학의 유혹적인 매력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는 심판의 날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키케로의 제자로 판단할까 걱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페르시아 예언자 마니 Mani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로서, 세상은 선과 악의 부단한 전쟁터이므로 악인 물질로 구성된 인간 몸은 고행과 금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교리) 같은 이교 철학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세월을 싸웠는데, 마니교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립하는 두 신神―선의 신과 악의 신―의 존재를 말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철학자를 여전히 선한 삶에 관한 지혜를 주는 존재로 찬양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지식인―그리스도교 성직자―은 철학자로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했고, 따라서 이교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리로 대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고전 유산을 그리스도교화하는 방법이 필요했고, 그것을 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대중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붕괴와 서로마 문명의 야만화로 인해 그 작업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4~6세기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은 로마인과 야만인을 위한 고전 라틴 문화의 보존 및 재해석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은 두 가지 형식을 취했다.
첫째는 서기전 5세기에서 서기 2세기 사이에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간된 고전 교과서(텍스트 textbook)의 진수를 선별해내는 일이었다.
선별 작업의 상당 부분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대체로 3세기와 4세기의 로마 독자들은 고전기 그리스의 과학·수학 저작에 거의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동물우화집―해마다 성性 sex을 바꾸는 하이에나, 귀를 통해 임신하는 족제비 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선호했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술 및 고전기 그리스 작가들의 문학작품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를 선호했는데, 이 사상은 세계의 배후에 가로놓인 신적인 원리를 전제하면서 모든 존재를 하나의 지속적 과정―물질세계는 이 신성으로부터 유출되었다가 다시 신성으로 복귀한다―의 일부로 파악하는 유사 신비주의 이론이었다.(새샘 블로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8: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180~284)", https://micropsjj.tistory.com/17040692 참조)
문학 부문에서 로마 말기에는 회극과 소설을 선호했는데, 그중 페트로니우스 Petronius의 ≪사티리콘 Satyricon≫은 외설적이긴 했지만 결코 틀에 박힌 작품은 아니었다.
두 번째 도전은 고전 문화의 목적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200년 무렵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us는 이 문제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아테네(고전 학문의 상징)가 예루살렘(그리스도교 구원의 상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테르툴리아누스의 답변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답변은 4세기 이후의 변화된 그리스도교회의 현실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전 전통의 그리스도교화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이었다.
그러내 대체로 초기의 수도원 운동은 테르툴리아누스와 맥락을 같이 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 Benedictine monastery는 나중에 라틴 문학 교과서의 필사와 보존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정작 베네딕투스 자신의 고전 문화 예찬자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는 수도사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문학이나 철학이 아니라―을 섬기라고 권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수도원 운동가들과 달리 그는 수도사들이 성경 공부에 충분할 정도로 라틴 문학을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도원 안에서 학교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태어나자마자 수도원에 넘겨져 양육되는 소년들에게 학교 교육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베네딕투스 Benedictus에게 고전 학문 보존은 수도원의 적절한 임무가 아니었다.
○카시오도루스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학문 전통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학문 전통 발달에 추진력을 제공한 인물은 베네딕투스가 아니라 동고트 왕국 Ostrogothic Kingdom의 대왕 테오도리쿠스 Theodericus 궁정의 관리 카시오도루스 Cassiodorus(490?~583?)였다.
초기에 카시오도루스는 야만인 주군을 위해 ≪고트족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고트족의 역사를 로마 역사의 일부로 다루면서 로마라는 거울에 비친 고트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공식 서한집 여러 권을 작성해 궁극적으로 출판까지 했는데, 이 서한집은 그가 고전 수사학의 수련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애의 마지막 40년 동안 카시오도루스는 종교에 관심을 돌려 유대교 성경의 일부인 <시편詩篇>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하는가 하면 남부 이탈리아 비바리움 Vivarium에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카시오도루스는 수도사를 위한 ≪교육방법론≫을 썼는데, 이 책은 그의 저작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카시오도루스는 성경과 교부敎父(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고전 문헌 교욱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의 ≪교육방법론≫은 기본적으로 고전기의 핵심 이교 문학 저술들을 망라한 도서목록 겸 해설서였는데, 그것은 수도사가 좀 더 난해하고 벅찬 신학 및 성경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내용이었다.
카시오도루스는 ≪교육방법론≫을 통해 고전 문헌의 표준을 마련했는데, 이 표준은 중세 말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교육 관행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책들을 공급하기 위해 카시오도루스는 필사본 제작을 장려했으며, 그는 이런 필사가 성 베네딕투스가 요구했던 육체노동(manual labor, 말 그대로 손으로 하는 노동)의 일종이며, 그것이 들판에서 하는 일보다 수도사에게 더욱 적합한 일이라고 주장했다.베네딕투스 수도사들이 이러한 카시오도루스의 사상에 공감하게 되면서, 베네딕투스 수도원들은 라틴어 사용 서유럽에서 고전 문헌 보존·연구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중세 초기에 베네딕투스 수도사들이 카시오도루스를 본받아 필사와 보존 작업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카툴루스 Catullus와 오비디우스 Ovidius의 '외설적인' 시를 포함한 고전 라틴 문헌은 오늘날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전 문학 전통을 보존하고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적극적인 다른 인물들도 있었다.
교황 심마쿠스 Pope Symmachus(재위 498~514)의 요청으로 프리스키아누스 Priscianus(500년 무렵 활동)는 향후 중세 라틴어 문법의 표준이 될 논저를 집필했다.
다른 교황의 요청으로 6세기의 학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Dionysius Exiguus는 로마 교회법을 수집·편찬했다.
또한 교황 아가페투스 Pope Agapetus(재위 535~536)는 로마에 최대 규모의 그리스도교 도서관을 건립했는데, 나중의 그의 친척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Pope Gregorius(재위 590~604)는 이 도서관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물론 이런 모든 노력은 귀족적인 지식 엘리트―그들은 6세기 라틴 서유럽에서 급속히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화된 고전 문화가 귀족적인 그리스도교 주교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긴 야만인 지배자들에게도 공동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보이티우스 Boethius와 카시오도루스는 모두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의 궁정에서 활동했는데,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6세기 야만인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로마화된 지배자였다,
그러나 고전 문화 전통을 확대·보존하고 그리스도교도화하고자 했던 그들의 모든 노력에는, 이 세계가 덧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인식이 깃들어 있었다.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라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Constantinopolis)의 황제에 의해 선임된 대리인으로서 이탈리아를 다스렸다.
로마 문명을 크게 예찬한 그는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고 공공 건축물과 도로를 개량했으며, 학문을 후원하고 종교적 관용정책을 유지했다.
요컨대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지난 몇 백 년 동안 등장했던 어떤 정부보다도 개명된 정부를 이탈리아에 수립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자신과 고트족에 대한 이탈리아 신민의 지독한 불신―그것은 결국 테오도리쿠스 치세 말년에 왕국을 분열시키고 말았다―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그들이 제아무리 '로마인다움'을 표방했다 할지라도 테오도리쿠스와 고트족은 아리우스 Arius 이단이었고,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지방 주교들과 지주들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한 그리스도교도였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이탈리아 귀족들은 테오도리쿠스가 아닌 테오도리쿠스의 후견인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쳤던 것이다.
523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유대인, 이교도, 이단자(황제는 필경 아리우스파를 겨냥했을 것이다)의 공직 취임을 금지하는 칙령―그것은 이탈리아에도 적용되었다―을 공포했을 때 마침내 파란이 일어났다.
카시오도루스는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충성심을 견지했지만, 보이티우스는 이탈리아를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지배 아래로 되돌리려 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테오도리쿠스의 말년은 삼위일체 교리 신봉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지속적인 박해로 점철되었다.
526년 그가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자 종교적 긴장은 왕국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로부터 10년 뒤 테오도리쿠스의 두려움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새로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재위 527~565)가 동고트족의 이탈리아를 재정복해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 한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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