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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미 민영익 "노근묵란도" 본문

글과 그림

운미 민영익 "노근묵란도"

새샘 2023. 4. 28. 12:05

민영익, 노근묵란도, 종이에 수묵, 128.5x58.4cm, 삼성미술관 리움(출처-출처자료4)

 

완당 김정희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은 한말 서화가 여섯 사람—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련,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운미 민영익— 중 마지막 여섯 번째는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서 조선 말기 정치인이었던 운미芸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다.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부친 민태호와 숙부 민규호의 가학을 이은 민영익은 15세 무렵부터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878년 왕실 외척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초기에 김정희 제자인 허련을 자택에 머물게 하는 등 특히 추사파 서화가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그 결과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사파와의 직간접적인 인연은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갑신정변 후 상해에 정착했을 때, 민영익이 오창석,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문인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주요 기반이 되었다.

 

민영익은 상해 '천심죽재千尋竹齋'에 기거할 때 상해에 있는 서화가들 즉 오창석 같은 해상화파海上畵派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친교가 있었다.

그래서 민영익은 해상화파를 통해 서로 서화를 주고받거나 그림들을 많이 사서 조선에 보내기도 가지고 왕래하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 중국 그림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 결과 후에 오원 장승업의 말년 그림에 해상화파의 영향이 나타나는 인연이 되었다.

 

민영익은 해상화파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면서 독자적인 운미란芸楣蘭을 완성하였는데, 비수肥瘦(난잎의 굵고 가늠)와 삼전三轉(난잎을 그릴 때 세 번 구부러지게 그림)이 없는 난잎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리다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다.

운미란 화풍은 대원군 이하응의 석파란石坡蘭과 함께 근대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널리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화단에서도 지속되고 있어 현대 사군자의 양식적 연원이나 계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 그림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는 뿌리가 노출된 난 즉 노근란을 포함하여 크게 두 무더기로 나눠진 구도로서, 이런 구도는 민영익의 다른 묵란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그가 노근란을 그린 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 유민遺民 화가 정사초鄭思肖의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그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된 것이다.

 

이 그림은 앞 끝이 뭉툭한 난잎, 예외없이 꽃 중심부에 찍힌 묵점, 장봉획藏鋒劃(글자의 획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붓끝의 자국을 획 안에 감추는 필법)을 사용한 고른 잎의 선, 짙은 먹을 이용해 직선에 가깝게 그려 비수의 변화가 거의 없는 난잎과 같은 운미란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화면 아래 왼쪽에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글자를 음각으로 새겨 도장을 찍었을 때 글자 밖의 부분은 붉게 글자 부분은 흰색으로 드러나는 도장. 반면 글자를 양각으로 새겨 글자 부분이 붉게 드러나는 도장은 주문방인朱文方印) 민영익인閔泳翊印 이 찍혀있다.

 

이 그림에는 원래 민영익의 백문방인만 찍여 있었고, 네 개의 화제는 나중에 추가되었다.

1917년 오세창의 글이 화면 위 왼쪽에 처음으로 들어갔고, 1년 뒤 소장자인 최린이 화면 가운데 오른쪽에 글을 써 넣었으며, 안중식이 화면 위 가운데 화제 없이 '심전안중식관心田安中植觀(심전 안중식이 보았다)'이란 배관기拜觀記(삼가 절하면서 본 느낌을 적은 글)를 추가했고, 1923년 화면 위 오른쪽에 이도영의 글이 들어갔다.

 

오세창 칠언시 화제

 

물결처럼 많은 난을 너른 밭에 심었으나 (의란구원성다종 漪蘭九畹誠多種)

먹물로 친 두세 포기 난 그림에는 미치지 못하네 (불급묵지삼양화 不及墨池三兩花)

오늘날 나라의 향기 쇠잔하여 모두 다 없어지고 (차일국향영락진 此日國香零落盡)

왕손의 향기로운 꽃풀(묵란)만 하늘 끝까지 가득하네 (왕손방초편천애 王孫芳艸遍天涯)

 

정사년(1917년) 10월 원정 민영익의 그림에 시를 지어 고우 최린 형의 감상에 보태고자 한다.

(정사소춘 丁巳小春 제민원정화 閔園丁畵 료공 聊供 고우인형 古友仁兄 아상 雅賞)

한강 기슭 늙은이 오세창 (열상노초의 洌上老艸衣 오세창 吳世昌)

 

 

최린의 칠언시 화제

 

왕손의 글과 그림 타고난 맵시에 (왕손서화출천자 王孫書畵出天姿)

태평시절 아픈 기억 귀밑털 허옇게 세었네 (통억승평빈욕사 痛憶承平鬢欲絲)

먹꽃 오래 애석히 여겨 그윽한 흥을 부치니 (장석묵화기유흥 長惜墨花寄幽興)

지금도 이파리 이파리 임금 향해 나부끼네 (지금엽엽향남취 至今葉葉向南吹)

 

무오년(1918년) 중양절(9월 9일) 고우 최린 제시를 달다.

(무오중양절 戊午重陽節 고우최린제 古右崔麟題)

 

 

이도영 화제

 

'시는 형상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 없는 시'라고 청의 서화가 이유 강소서가 말한 적 있다.

생각건대 옛날에 그림 그리는데 있어 법이 있음을 귀중히 여기고  또는 법이 없음을 귀중히 여긴다.

법이 없는 것도 잘못이요 법이 있는 것 또한 잘못이다.

오직 법 없는 가운데 법이 있는 것이 정법正法(올바른 법칙)이고, 그 정법 속에 성정性情(성질과 심정)이  있다.

성이 다다르고 정이 모이면 무엇을 쓰더라도 모두 시가 되고, 눈에 닿는 것 또한 모두 그림이 된다.

그러므로 법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법에 얽매이지 않으려고만 할 것도 아니다.

 

계해년 우수 절기에 고우 최린 선생의 부탁으로 쓴다. 

(계해년 癸亥年 우수절기 雨水節氣 고우최린선생부탁古右崔麟先生付託)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출처
1.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https://yeometgol.tistory.com/entry/%EF%BB%BF%EC%9A%B4%EB%AF%B8%E8%8A%B8%E6%A5%A3%C2%B7%EB%AF%BC%EC%98%81%EC%9D%B5%E9%96%94%E6%B3%B3%E7%BF%8A%EC%9D%98-%E5%A2%A8%E4%B8%96%E7%95%8C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영익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0202

4. 매일신문 2023-04-28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2111612112938705

5. https://cafe.naver.com/geochips/5749https://cafe.naver.com/geochips/5749

6. 구글 관련 자료

 

2023. 4. 2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