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8: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180~28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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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8: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180~284)

새샘 2023. 2. 13. 23:3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흉상(사진 출처-위키백과)


서기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 재위 161~180)가 사망하면서 자애로운 황제가 지배하던 5현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5현제—네르바 Nerva(재위 96~98), 트라야누스 Traianus(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Hadrianus(재위 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재위 161~180)가 정치적으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앞의 네 황제들이 아들이나 친인척이 아닌 유능한 젊은이를 골라 제위를 계승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임 황제의 관행을 깨뜨림으로써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 중 가장 철학적이고 사려 깊은 지배자였지만, 아들 콤모두스Commodus가 자세심이나 통치능력을 갖지 못한 방탕한 청년임을 알아챌 만큼 지혜롭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즉, 아들 아닌 다른 인물을 계승자로 삼을 경우 군대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콤모두스는 선왕이 주도했던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에서 발을 뺌으로써 즉각 군대를 소외시켰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였지만, 군대와 원로원에게서 나쁜 평판을 받게 된 원인이었다.
그 후 그는 원로원의 요구사항 들어주기와 원로원을 들볶아 복종시키기의 양자 사이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취했다.
두 방법이 모두 성공하지 못할 경우 콤모두스는 황제의 측근 한두 명을 처형함으로써 그들을 달래려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결과 유능한 인물들은 콤모두스를 위해 일하기를 꺼렸다.

또한 그는 고귀한 신분에 대한 사람들의 전통적인 기대를 저버리고 공적·사적으로 변태적인 취향에 탐닉했으며, 심지어 콜로세움에 검투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의 변덕스럽고도 잦은 폭력 행위 때문에 궁정 내부에서는 반역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192년 급기야 그의 레슬링 코치가 콤모두스를 목 졸라 죽이고 말았다.
콤모두스의 뒤를 이을 분명한 후계자가 없었기에 속주들의 군대가 제각기 황제 후보를 옹립했고, 그 결과 내란이 뒤따랐다.
여기서 속주 사령관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재위 193~211)가 승자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속주 군대가 임의로 제국 정치에 개입할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세베루스 왕조 Severan dynasty(193~235)


세베루스와 그의 계승자들은 원로원이 지닌 이론상의 권리마저 묵살한 채 노골적인 군사독재를 자행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임종의 자리에서 세베루스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아들들아, 병사들을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는 묵살해 버려라."
그의 아들 카라칼라 Caracalla(재위 198~217)는 동생이자 공동 황제인 게타 Geta(재위 209~211)를 죽인 살인자였다.
카라칼라는 세금을 징수하는 일과 탐욕스러운 군대에 (특히 인기가 더 높았던 동생을 암살한 뒤 군대를 달래기 위해) 보너스를 지급하는 데 필사적으로 매달린 나머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것은 계몽적 군주의 행동이라기보다 로마 국가의 과세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광대한 제국을 결속시키는 소중한 접착제 구실을 했던 로마 시민권은 싸구려가 되고 말았다.
그 뒤의 세베루스 왕조 계승자들도 나을 것이 없었다.
엘라가발루스 Elagabalus(재위 218~222)는 동방의 태양 숭배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려 했고 원로원 회의석상에서 당시의 성도덕 관습을 조롱하는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몇몇 탁월한 황실 여성이 왕조와 제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파멸적이었을 것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 Julia Domna는 아들인 카라칼라를 대신해 제국 운영을 도왔고, 아들의 사악한 성품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217년 카라칼라가 암살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 Julia Maesa는 황제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후계자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Severus Alexander(재위 222~235)의 할머니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엘라가발루스의 방탕으로 국가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를 실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율리아 마이사의 딸이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 Julia Mamaea어린 아들의 치세 동안 대단한 영향력과 인기를 누렸고 정부 내에서 거의 섭정과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왕조 창시자 셉티미우스에 의해 시작된 거대한 흐름을 막아내지 못했다.
군대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통제가 점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일단 잔인한 무력의 효용성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자 야심을 지닌 장군이라면 누구든지 대권 장악의 꿈을 꾸게 되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율리아 마마이아는 군대가 반기를 든 235년에 살해되었다.

그 후 50년 동안 내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35년에서 284년까지 무려 26명의 군인 황제가 등장했으며,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3세기 위기의 절정


235년부터 284년까지 반세기 동안 정치적 혼란에 더해 몇 가지 다른 요인이 제국을 멸망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내전은 경제의 토대를 잠식했다.
농업과 상업이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심을 품은 장군들이 화폐를 변조하고 속주 시민에게 터무니없는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병사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이었다.
지주, 소농, 기술공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가난에 빠져들었다.
전쟁과 기근에 이어 질병이 창궐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에도 천연두로 추정되는 무서운 전염병이 제국 전역을 휩쓸어 군대와 주민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적이 있었다.
3세기 중반에 창궐한 역병은 또다시 엄청난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가뜩이나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시점에서 로마는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해야만 했다.
3세기 중반에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이다.
질병 때문에 병력이 줄고 로마의 군대가 서로 싸우고 있는 사이에, 서쪽의 게르만족 Germanic과 동쪽의 페르시아인 Persian이 옛 로마 방어선을 돌파했다.

251년 고트족 Goths은 황제 데키우스 Decius(재위 249~251)를 전투에서 살해하고 도나우 Danube 강의 건너 발칸 Balkan 반도를 멋대로 유린했다.
그보다 더 굴욕적인 재난이 있었다.
황제 발레리아누스 Valerianus(재위 253~260)가 260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게 사로잡혀 무릎을 꿇은 채 페르시아 지배자의 발판 노릇을 했던 것이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박제된 채 매달려 전시되었다.
서부의 속주들은 로마의 보호 능력에 절망한 나머지 한동안 독립된 제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져나갔다.
정녕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는 흘러간 먼 옛날이 되어버렸다.

○신플라톤주의


3세기의 로마 제국의 문화가 고뇌로 가득 찬 것이었음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존하는 조각상에서도 우리는 그 시대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황제 필리푸스 Philippus(재위 244~249)의 흉상은 마치 자신이 곧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절망감이 확산되자 현세에 대한 체념을 권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였다.
신플라톤주의는 느슨하게나마 플라톤 Platon(영어 Plato) 사상의 정신주의적 경향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진정한 창시자는 플로티노스 Plotinos(영어 Plotinus)(204~270)였다.
플로티노스는 이집트인으로서 로마에 와서 로마 상층계급 사이에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신플라톤주의는 세상의 악을 독특한 창조 신앙에 입각해 설명한다.
플로티노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신에게서 비롯되며, 신은 연속적인 유출流出 emanations의 흐름 안에 있다.
그 과정의 첫 단계는 세계영혼 world-soul의 유출이다.
이 세계영혼으로부터 신성한 이념 divine ideas 또는 영적 모형이 나오고, 다시 여기에서 개체의 영혼이 나온다.
유출의 맨 마지막 단계는 물질이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체의 형태나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신에게서 나온 정신적 빛이 다 타버리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물질계는 신적인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플로티노스의 두 번째 신조는 신비주의였다.
인간 영혼은 본래 신의 일부분이었지만 물질과 결합하면서 그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신과의 신비한 합일이며 그 합일은 명상을 통해 그리고 영혼을 육체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인간은 마땅히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육체를 복종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신플라톤주의의 세 번째 주요 신조는 금욕주의였다.

플로티노스의 계승자들은 기이한 미신을 점차 더 많이 받아들여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희석했다.
그러나 불합리한 관점과 국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와 4세기에 로마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며, 스토아 철학을 거의 완벽히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제6장 참조).
신플라톤주의보다 더 로마 사회의 전통적 가치에 철저히 대립각을 세운 철학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신플라톤주의의 유행은 3세기의 위기 때 로마 사회와 정부가 얼마나 크게 변질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된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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