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람 전기 "매화초옥도" 본문

글과 그림

고람 전기 "매화초옥도"

새샘 2023. 2. 9. 22:37

전기, 매화초옥도, 종이에 담채, 28x33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위 그림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는 앞 글에서 소개한 <계산포무도>와 함께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라고도 하는 이 그림은 초옥(초가) 둘레에 매화가 눈송이처럼 흐드러지게 핀 서재에서 선비가 앉아 글을 읽고 매화를 바라보는 정경이다.
이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매처학자梅妻鶴子'(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선비의 유유자적한 풍류 생활을 이르는 말)로 유명한 은둔처사隱遁處士였던 송나라 임포林逋(967~1028)이다.
 
하늘이 검은 빛이니 어둠이 내리고 있는 저녁이고, 산은 하얀 색이니 눈 덮힌 모습이다.
초옥 옆과 아래쪽 언덕들도 모두 하얀 색인데, 봉우리들이 뭉툭하여 마치 몽실몽실한 구름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다.
위쪽 고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시점이고, 아래와 중간 언덕들은 수평 시점으로 그려 전형적인 동양화의 공간감을 창출하는 삼원법이 아닌 이원법만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시도 때문에 뻔한 산수화가 아닌 참신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도 공간감을 의식했는지 아래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언덕과 산의 크기를 점점 커지게 그렸다.
 
왼쪽의 한 인물은 거문고를 매고 앞에 있는 초옥을 향해 걷고 있다.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소박한 초옥의 창문을 통해서, 앉은 채 피리를 불며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한 인물이 보인다.
집 주위와 언덕 사이로 빼곡히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마치 눈꽃이 날리듯 백매화가 만발하고 있다.
걸어가는 인물은 벗을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을 붉은 옷으로 표현했고, 기다리는 친구의 집 지붕도 이에 호응하듯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방안에 있는 인물은 녹색 옷을 입었고, 산 위 굵은 태점 안에는 초록 빛깔이 숨어 있다.
 
검은 하늘과 흰 산이 대비되는 무채색 공간에서 붉은 색과 초록색이 대비되어 산뜻하고 세련된 느낌을 불어넣고 있다.
아마도 빛깔처럼 자연과 동화된 두 사람은 온 밤이 하얗게 새도록 매화주를 즐기며 악기를 연주하고 우정을 나눌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별처럼 비추듯 백매화가 흐드러지게 쏟아지고 있다.
 
당시 화단을 이끌었던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이 이 그림을 그린 36세나 어린 전기를 두고,
"전기를 알고부터는 막대 끌고 산 구경 다시 가지 않는다. 전기의 열 손가락 끝에서 산봉우리가 무더기로 나와 구름, 안개를 한없이 피워 주니"
라고 얘기한 연유를 알 것도 같은 뛰어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매화초옥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단서가 화면 오른쪽 아래에 적힌 화제와 낙관이다.
'역매인형초옥적중亦梅仁兄草屋笛中 고람사古藍寫'[친구 역매(오경석의 호)가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구나. 고람이 그리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글로 보아 초록색 옷을 입고 집에 들어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인물은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고, 붉은 옷을 차려입고 집으로 향하는 이는 바로 전기 자신이다.
오경석은 역관이자 개화사상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펴낸 유명한 금석학자인데,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펴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부친이다.
또한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세한도>의 주인공인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제자이다.
 
따라서 <매화초옥도>는 고람 전기와 매화 애호가인 역매 오경석이 함께 보낸 어느 매화꽃이 만발한 겨울날의 정취이자 그들의 우정과 낭만을 표현한 그림인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제자 가운데서도 고람 전기를 무척 아꼈다.
당시 서화계는 우봉 조희룡과 형당蘅堂 유재소劉在韶(1829~1911)와 같은 중인들 중심으로 새로운 감각의 형태를 중시하는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로, 이런 경향에 대해 추사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기에게만은 "제법 예찬과 황공망의 필의가 있다"라며 그의 천재성을 높게 평가했다.
전기는 당시 서화계 인물들에게 실력과 인성을 둘 다 인정받는 천재로 높게 평가받았다.
 
전기는 생계를 위해 약재상을 운영하면서도 서화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 지금 표현으로는 평론가 및 아트 딜러의 역할을 많이 했으며, 직접 그린 작품들도 그 품격이 매우 뛰어나 서화계에서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유달리 병약하여 29세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고흐가 37세에 사망하기 전 몇 해동안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졌다는 걸 감안하면 전기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훨씬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지인들은 무척이나 애달파 했다.
특히 조희룡은 "흙이 정 없는 물건이라지만 과연 이런 사람의 열 손가락도 썩게 하는가" "일흔살 노인이 서른살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자니 더욱 슬프다"라며 애통해 했다.
 
※출처
1.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법보신문 2020. 03. 24 '전기의 매화초옥도'(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780)

3.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매화초옥도, 전기(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42) 
4. 구글 관련 자료
 
2023. 2.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