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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2: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 히포크라테스

새샘 2023. 2. 8. 23:18

벨기에 화가 루벤스 Rubens의 그림을 파울루스 폰티우스 Paulus Pontius가 판화로 만든 히포크라테스(출처-위키백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 히포크라테스

 

그리스 Greece 코스학파 Kos Medical School의 중심지였던 코스섬 Kos Island은 자연철학이 매우 발달했던 이오니아 Ionia 지역에 있었다.

그곳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이자 '의학의 아버지 Father of Medicine'이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서기전 466~377)가 태어났다.

 

코스섬에서 발굴된 고대 동전에 새겨진 히포크라테스의 생김새를 보면 체구가 작고 외모가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의 명성이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그에 대한 신비하고 영웅적인 이야기가 꾸며지고 창조되었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고 믿으면서 히포크라테스의 재능과 성격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서기전 43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중 아테네 Athene(영어 Athens)에 역병이 돌았을 때의 이야기다.

히포크라테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테네로 향했다.

그는 질병 발생 지역을 조사하던 중 대장간에만 일하는 사람들만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것이 대장간의 환경 즉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와 관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즉시 시민들에게 집에 불을 피워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시체를 태우며, 물을 끓여 마시라는 처방을 내렸다고 한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선물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프랑스 화가 지로데 Anne-Louis Girodet 작품. 오른쪽에 선물을 바치는 사람이 페르시아 왕이고 왼쪽에서 손을 내밀면서 거절하는 사람이 히포크레테스(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ippocrate_refusant_les_pr%C3%A9sents_d%27Artaxerx%C3%A8s_%28original%29.JPG)

두 번째 전해지는 이야기는 페르시아 제국 Persian Empire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erxes I(재위 서기전 465~424)가 역병을 퇴치해 달라고 그에게 선물을 주었지만 적국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이야기다.

히포크라테스의 애국심과 청렴함을 칭송하는 얘기지만, 적이라고 해서 의사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고민해볼 만한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길에서 다리가 골절된 환자를 만난 히포크라테스 이야기다.

길에서 마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진 환자는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근처에 있던 점술가가 나타나 환자에게 신의 석상 앞에서 기도해야 낫는다며 다리가 부러진 환자에게 무릎을 꿇도록 강용했다.

화가 난 히포크라테스는 당장 점술가를 쫓아버리고 골절 수술을 시행했다.

히포크라테스의 과학적 의술과 뛰어난 외상 치료 기술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려운 이런 에피소드 때문에 오늘날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히포크라테스 전집

 

오늘날 존경받는 히포크라테스를 만든 것은 바로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영어 Hippocratic Corpus)≫ 덕분이다.

이 의학 전집은 서기전 4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에서 처음 편찬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지배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us(영어 Ptolemy) 왕조는 자신들의 거대한 도서관에 인류의 모든 지식을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수많은 학문 자료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모아들였고, 의학 자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료가 많으면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 정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히포크라테스 전집'이란 이름으로 합쳐졌다.

이는 히포크라테스가 당시 가장 유명한 의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집≫에서 어느 것을 히포크라테스가 직접 썼는지 확실하기 않게 되어 버렸다.

연구자들은 그리스 의학의 중심지 코스 Kos와 크니도스 Knidos(Cnidos) 출신들에 의해 ≪전집≫이 만들어졌고, 저자는 20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한 명의 천재 의사 작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의사들의 모든 노력이 집대성된 결과물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사실 한 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의술을 추구했던 '히포크라테스 사단'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공통된 메시지는 질병이 신과 같은 초자연덕 존재가 내리는 벌이 아니라 '자연적인(또는 과학적인) 원인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이런 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전집≫ 중의 <신성병에 대하여>라는 부분이다.

신성병은 오늘날의 뇌전증(간질)이라는 질환으로 당시 사람들은 뇌전증 증상이 나타나는 동안 신이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는 당시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시원하게 비판했다.

 

"신성병은 나에게는 다른 질병보다 더 신성해 보이지 않는다. 신성병도 다른 병들처럼 자연적 원인이 있다.

사람들은 그저 잘 모르면서 병의 증상이 특이하기 때문에 신내림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병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같은 신 중심의 생각이 유지되어왔다.

내 생각에 이 병을 '신내림'으로 처음 생각한 사람은 그저 무식한 주술사나 돌팔이 의사였을 것이다.

이들은 본인들의 무능력에 대한 핑계로 그저 신을 이용했을 뿐이다."

 

합리적인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의사들은 환자의 침대 옆에서 환자를 자세히 관찰하는 '임상 관찰'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신에게 치료 방법을 구하지 않았고, 실제 치료와 관계없는 공허한 상상 이론을 만들지도 않았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의 병에 대한 증상을 자세히 묻고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검진하고 관찰한 바를 기록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꼼꼼한 임상기록은 오늘날 병원에서 실제 쓰이는 의무기록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세세하다.

환자 개인의 증상을 자세히 관찰하는 임상 관찰을 통해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을 미신과 종교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환자를 만져보면서 '촉진'도 중요시했다.

보통 명치라 부르는 갈비뼈 '연골 아래', 복부 윗부분의 촉진을 특히 중요시했는데, 그곳이 통증과 함께 단단하게 부풀어있으면 죽음이 임박했다는 중요한 신호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부위가 오늘날에는 '건강염려증 hypochondriasis'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hypochondrium이 '연골 아래'라는 뜻이다.)

건강염려증은 특별한 의학적 문제가 없는데도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질병 disease은 아니지만 아픔 illness 상태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외과술 부분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외과술 부분은 글이 매우 명확하고 일관성이 있어 히포크라테스 본인 작품일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전집≫에는 골절 같은 외상을 주의깊게 관찰해 남긴 기록이 있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물이나 보조 도구, 붕대 감는 법 등을 자세히 기록해놓았다.

당시 그리스 지역에 전쟁이 많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아편이나 만드라고라 Mandragora 풀을 이용해 마취했다는 내용도 있어 흥미롭다.

단, 출혈에 대한 처치 방법은 아직 원시적이었다.

출혈 부위를 불로 태워 지혈하는 방법(소작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고통스러운 지혈법은 중세를 지나 근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전집≫에는 수술에 대한 언급도 꽤나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수술뿐 아니라 수술 전 환자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수술대 상태와 조명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보면 수술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이 있어서 바로 그 부분 때문에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다른 의학파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코스섬의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히포크라테스. 이 나무는 오늘날 '히포크라테스 나무'로 불리고 있다. 영국 화가 어니스트 보드 Ernest Board 작품(사진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ippocrates_lecturing_to_his_students_under_the_plane_tree_Wellcome_M0000138.jpg)

≪히포크라테스 전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연치유력'이라 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에게 인간은 본래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연치유력을 갖고 있는 위대한 존재였다.

따라서 의사의 역할은 그 능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이미 효과가 증명된 치료만을 해야 했고, 알려진 치료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놔두는 것을 더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방법은 후대 의사들에게 비난받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자연치유력을 강조하는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 <역병>의 다음 한 구절은 매우 유명하다.

 

"질병이 관해 두 가지를 행하라. 돕거나 최소한 해를 끼치지 마라."

 

히포크라테스가 남겼다고 알려진 위 문장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위 문장을 풀어쓴다면 다음 문장이 될 것이다.

 

"질병에 관해 의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다.

환자는 스스로 회복하는 자연치유력을 가진 존재이니 그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돕거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치료만 해야 한다.

효과가 없거나 환자에게 해로운 것이 예상되는 치료는 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해로운지 알겠는가?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하면 기존의 치료법과 비교한 후 더 효과가 있다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의학의 발전 과정일 텐데, '해를 끼치지 마라'는 문장은 아예 새로운 시도를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얼핏 보면 참다운 의사의 윤리 선언처럼 보이는 이 격언은 실로 새로운 치료법의 등장을 막고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남긴 치료법만 따르게 하는 일종의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진단보다 예후를 중요시한 까닭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사들은 진단보다 예후를 중시했다.

예후란 병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의사의 판단을 말한다.

왜 그들은 예후를 중요시했을까?
이는 당시의 의료 환경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의사들은 오늘날처럼 개인병원에서 환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진료를 하는 '편력의遍歷醫'였다.

따라서 환자를 만났을 때 병의 상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견하는 것이 단기간에 환자와 환자 가족의 신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의사가 환자 진료 후 가족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쉽지만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들은 가족들은 환자가 편안하게 운명할 수 있도록 대비할 것이다.

환자가 의사의 말대로 사흘 후 사망한다면 그 명의에 대한 소문은 온 지역에 퍼질 것이다.

 

하지만 예후 판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어떤 환자를 '보지 말아야 할지'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치료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수 있는 환자만 치료하는 것이 의사로서의 명성과 안위를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가 병이 악화된다면 언제 도망갈지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예후 판정법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사들은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의사'라는 의미로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히프크라테스 학파 의사들이 질병을 보는 관점은 체액의 불균형이었다.

불균형 상태는 환자마다 각자 달랐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 학파에게 백 명의 환자는 모두 다른 백 가지의 질병 상태였다.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다.

이런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한 환자를 치료했던 방법과 경험이 다른 환자를 치료하는 데 적용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의학의 발전이 디딜 수밖에 없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3. 2.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