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3: 이슬람 세계의 변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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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3: 이슬람 세계의 변화

새샘 2023. 6. 25. 22:55

중세 이슬람 세계의 변화(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D%B4%EC%8A%AC%EB%9E%8C%20%EC%A0%9C%EA%B5%AD)

 

9세기와 10세기를 거치면서 아바스 왕조 Abbasid Dynasty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그 후 오랫동안 권력의 지방 분산이 이어졌는데, 그것은 11세기의 우마이야 에스파냐 Umayyad España도 마찬가지였다.

아바스 왕조의 세력이 약화된 주요 원인은, 그들의 경제 기반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 Tigris-Euphrates basin의 농업생산력이 점차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생산력 고갈의 원인은 환경 위기와 남부 이라크 Iraq 소택지沼澤地 wetland(늪과 연못으로 둘러싸인 습한 땅)에서 농사짓던 노예화된 아프리카 노동 인구의 반란 때문이었다.

북아프리카 North Africa·이집트 Egypt·시리아 Syria의 지방 지배자들이 세입의 많은 부분을 가로채면서 아바스 제국 Abbasid  Dynasty의 조세 수입은 줄어들었고, 아바스 칼리프 caliph(예언자의 대리인)들은 그들이 구축한 방대한 행정 업무와 신식 용병 부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신식 용병 부대의 병력은 대개 노예로 충원되었는데, 그들은 칼리프의 직위가 아니라 그들을 고용한 칼리프 개인에게 충성을 바쳤다.

얼마 되지 않아 군대는 군대 자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칼리프를 세우기도 하고 살해하기도 하는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아바스의 수도 바그다드 Baghdad의 재건 사업을 포함한 막대한 비용의 건축 공사는 재정적·군사적·정치적 위기를 한층 가중시켰다.

 

아바스 왕조 위기의 배후에는 이슬람 Islam(이슬람교) 세계의 장래에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 될 두 가지 근본적인 요인이 가로놓여 있었다.

하나는 지역주의의 성장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수니파 Sunni와 시아파  Shia 사이 및 시아파 내부에서의 격심한 종교적 분열이었다.

909년 파티마 왕조 Fatima Dynasty로 알려진 지방 시아파 왕조가 아바스 제국의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지역적·종교적 적대감이 한꺼번에 증폭되었다.

969년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 정복에도 성공했다.

한편 또 다른 시아파 집단―파티마 왕조와 아바스 왕조 공동의 적―이 927년에 바그다드를 공격했으며, 930년에는 메카 Mecca를 공격하고 카바 Kaaba를 빼았았다.

그 후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 제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졌다.

몽골족의 침입으로 결정적 패배를 당한 1258년에 이르기까지 아바스 칼리프국은 바그다드에서 근근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바스 제국은 사실상 930년대에 이미 사라졌다.

그 대신 동방의 무슬림 Muslim(이슬람 신도) 세계에는 두 국가―독립적인 이집트 왕국과 페르시아에 기반을 둔 새로운 무슬림 국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우마이야 왕조 Umayyad Dynasty의 약화는 경제적 붕괴보다는 정치적 실패와 왕위 계승 혼란의 결과였다.

9세기와 10세기의 이슬람 에스파냐는 대단히 부유한 농업 및 상업 지역이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부터 부흥한 북·동부 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 왕국들이 가한 군사 압력은 우마이야 칼리프국 내부에 정치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1세기 초에 이르러 에스파냐의 통일된 우마이야 칼리프국은 마침내 해체되었고, 대신 소규모의 타이파 taifa―에스파냐어로 파벌 또는 당파를 뜻한다― 왕국들이 들어섰는데, 이 왕국들 가운데 일부는 북부의 그리스도교 군주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1085년 대도시 톨레도 Toledo가 그리스도교 군주인 레온 Leon의 알폰소 Alfonso(알폰소 6세 Alfonso VI)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경악한 알모라비데 Almoravide로 알려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순수주의자들이 이슬람 에스파냐 침공에 나섰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세력의 전진을 저지하면서 이슬람 에스파냐와 자신들의 북아프리카 제국을 결합시켰다.

비슷한 성격의 집단인 알모아데 Almohade도 12세기에 유사한 활동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알모라비데도 알모아데도 이슬람 에스파냐의 서로 적대적인 소왕국들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지역의 왕국들은 에스파냐 그리스도교 군주들의 세력 확대에 떠밀려 차례로 멸망하고 말았다.

최후의 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 공국 Principality of Granada은 1492년 그리스도교도에게 함락되었지만, 그리스도교도의 에스파냐 재정복은 13세기 중반에 이미 사실상 완결되었다.

 

11세기 이슬람 에스파냐 지배자들의 무절제와 무능이 우마이야 칼리프국의 몰락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파멸에는 개별 칼리프의 실패를 뛰어넘는 더 큰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슬람 사회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에 대해서만은 관용을 베풀었다.

그들은 '성경의 백성'으로서 무슬림 지배자에게 특별세를 납부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이교도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그러나 초기 정복 단계에서의 이상주의는 시일이 지나면서 희미해졌다.

그 결과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 민족적 긴장이 격화되었고 분열은 점점 더 심해졌다.

아랍인 Arabs, 투르크인 Turks, 베르베르인 Berbers,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인 Sub-Saharan Africans, 페르시아인 Persians 사이의 민족적 긴장은 가뜩이나 심각했던 지역적 분열―이슬람 정복이 있기 전부터 몇 백 년 동안 그 지역의 특징이었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불안정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슬람교 자체의 비타협적 유일신론과 종교적 평등주의였다.

아바스 왕조의 일부 무슬림 지배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의 반신적半神的 지배권을 자임한 군주들은 빈번히 신성모독이란 이유로 암살당하곤 했다.

이슬람 신앙의 보편성과 이슬람 세계의 현실―지역적 배타성, 민족적 적대감, 수니아·시아파 사이의 종교적 대립 등― 사이의 긴장은 이렇듯 이슬람 제국의 정치적 통합을 훼손시켰다.

 

 

○무슬림 사회와 문화(900~1250년)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분열이 곧 문화적 쇠퇴를 의미하진 않았다.

사실 이슬람 문명은 중간기, 특히 900년 무렵에서 1250년 사이에 크게 번영했다.

칼리프국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이슬람의 지배권은 오늘날의 튀르키예 Türkiye(영어: 터키 Turkey)와 인도 India 지역까지 팽창했다.

이슬람 역사는 하룬 알라시드 Harun Alashid 시대 이후 서서히 쇠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의 가장 창조적 문화는 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꽃피기 시작했다.

 

이슬람 문화와 사회는 초기부터 이례적으로 세계주의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무함마드 Muhammad(마호메트 Mahomet)는 사막의 아랍인이 아니라 진보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도시 상인이었다.

그 후 이슬람 문화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고도로 세계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먼저 이슬람 문화는 비잔티움 Byzantium과 페르시아 Persia의 세련된 문화를 이어받았다.

또한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는 극동과 서유럽 사이의 원거리무역 교차로에 있었다.

끝으로 무슬림 거주지역의 번창한 도시생활은 대부분 농업과 균형을 이루었다.

무역의 비중이 컸다는 것은 지리적인 이동성이 매우 컸음을 뜻했다.

게다가 ≪쿠란 Quran≫은 모든 무슬림의 평등을 강조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사회적 유동성을 더욱 촉진했다.

그 결과 바그다드와 코르도바 Cordoba의 궁정에서,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무슬림 국가들의 궁정에서는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문자 해독률이 매우 높아서―1000년 무렵 전체 무슬림 남성의 약 20퍼센트가 ≪쿠란≫의 아랍어를 읽을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공직의 세습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인재들'은 각자의 기량과 재능으로 최고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무슬림 사회의 평등주의와 관용에 한 가지 중대한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여성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남성은 지위와 명예를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일에 매우 큰 관심을 기울였다.

남성은 세속적 소유물을 확보하거나 증대시킴으로써 이를 달성했는데, 세속적 소유물의 범주에는 여성도 포함되었다.

한 남성이 소유한 여성은 그의 지위를 위해 가장 소중한 존재였으므로 누구도 그녀를 넘보아서는 안 되었다.

≪쿠란≫은 한 남성에게 4명의 부인을 허용했다.

그러므로 여성이 매우 귀해졌고 결혼한 여성은 다른 남성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높은 지위의 남성은 여러 명의 여종과 첩을 거느릴 수 있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그의 저택에 있는 하렘 harem(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이란 곳에 거주하며 거세된 환관의 보호를 받았다.

하렘의 여성은 저마다 돋보이기 위해 경쟁했으며, 자기 자녀를 잘되게 하고자 각종 음모에 가담했다.

대규모의 하렘은 부유층만이 유지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계층이 이런 관행을 모방했다.

여성을 재산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관행은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켰고 성생활에서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강조했다.

상층 사회에서는 남성 간의 동성애가 용인되었는데, 고대 그리스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관계는 통상 유력한 성인이 미성년자를 지배하는 식이었다.

 

이슬람 종교생활에 헌신하고자 하는 남성에게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울라마 ulama인데, 그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로서 종교와 율법의 모든 국면을 연구하고 이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들은 통상 전통과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는데, 공공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 것은 수피 sufis였다.

그들은 종교적 신비주의자로서 독신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점과 사회로부터 은둔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스도교의 수도사와 비슷했다.

울라마가 종교 율법을 강조한 데 비해 수피는 명상과 황홀경을 강조했다.

같은 수피끼리도 공통의 프로그램을 갖지 않았고, 실제로 제각기 매우 다른 행동양식을 보였다.

서양인은 일부 수피를 '회전 탁발승'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그들의 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들과는 달리 고행자 faqirs로 불리는 수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장에서 뱀 마술을 부리는 사람으로 서양인에게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수피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사람들로서 기이한 의식을 행하지 않았다.

수피는 통상 형제단으로 조직되었으며,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외방 지역의 개종사업에 종사했다.

이슬람 세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진지한 종교적 추진력을 제공한 것은 수피 사상이었다.

울라마와 수피가 공존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다원주의를 보여주는 훌륭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성향의 여성들에게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녀원에 견줄 수 있는 진입로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슬람의 다원주의가 성적 차별을 뛰어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무슬림의 철학, 과학, 의학

 

중세 이슬람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에도 많은 그리스 철학 문헌이 셈어 Semitic의 방언인 시리아어 Syriac로 번역되었고, 뒤이어 번역을 목적으로 하는 '지혜의 집 House of Wisdom'이라는 특수학교를 설립한 바그다드의 아바스 궁정의 후원으로 많은 그리스 철학 문헌이 아랍어 Arabic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10세기 말에 이르면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포르피리오스 Porphýrios, 플로티노스 Plōtînos, 플라톤 Platon 등의 저술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쉽게 구해볼 수 있게 되었고, 이슬람 세계 전역에 걸쳐 이들 철학자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위대한 무슬림 철학자 아비세나 Avicenna(이븐 시나 Ibn Sina, 980~1037)는 18세가 되기도 전에 페르시아 변방의 소읍 부하라 Buhara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읽을 수 있었다.

 

중세 이슬람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였다.

이슬람 철학자들은 매우 상이한 이들 두 가지 철학적 전통을 서로 조화시키려 했고, 두 철학을 이슬람교의 교의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를 조화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쉬운 일이었다.

이슬람 철학자들이 공부했던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번역본과 주해서는 이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는 세계의 영원성, 현존 세계의 합리성(또는 합리적 필연성), 인간의 선악 선택의 자유 등 상당히 많은 가설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신학과 조화시키는 것은 이보다 어려웠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는 하나의 전능한 신이 순수 의지의 행동으로 세계를 창조했으며, 세계는 신의 의지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존속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슬람 신학은 또한 개인 영혼의 불멸을 믿었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신플라톤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두고서도 충돌했다.

중세 무슬림 신학자들이 신자 개개인의 선악 선택의 책임을 강력히 강조하긴 했지만, 실제로 모든 무슬림은 신의 적극적 의지가 없는 한 어떤 선도 행해질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때로 이런 확신은 일종의 운명론으로 치달았는데, 그것은 그리스 철학의 전제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슬람 철학자들은 이런 도전에 대해 제각기 다른 입장을 취했다.

알 파라비 Al-Farabi(878~950)는 이슬람 신학의 결론을 옹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원용했지만, 피조 세계가 신에게서 유출되어 신에게 되돌아간다고 하는 그의 신플라톤주의 때문에 신비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 결과 주류 신학과 충돌했다.

아마도 아비세나는 위대한 이슬람 사상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인간 의식의 실재 및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 때문에 그 또한 세계의 영원성 및 세계-신 관계에 대해 이단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편 알 가잘리 Al-Ghazali(1058~1111)는 훨씬 철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서, 알 파라비와 아비세나를 종교적 이단 혐의로 공격했다.

그러나 알 가잘리 자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이슬람 신학 사이의 충돌을 신비한 회심 체험―이 때문에 그는 마침내 수피즘에 경도되고 말았다―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모든 다양한 입장의 철학자들에게 온건히 하라고 한 그의 충고는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의 철학적 신비주의는 너무나 독특한 것이어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알 가잘리의 계승자인 에스파냐인 Españoles 아베로에스 Averroes(이븐 루슈드 Ibn Rushd)(1126~1198)는 아비세나와 알 가잘리의 사상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주의에 등을 돌렸다.

당대 최고의 합리주의자이자 가장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인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관한 일련의 주해서를 썼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서 모든 신플라톤주의 흔적을 일소하려 했다.

이들 주해서는 아랍어 Arabic에서 라틴어 Latin로 번역되었고, 아퀴나스 Aquinas와 단테 Dante를 포함한 13세기 그리스도교도 지식인의 아리스토텔레스 독해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비세나와 마찬가지로 아베로에스는 의사이자 이슬람 율법·신학 전문가였지만, 아비세나와는 달리 신학을 철저히 철학에 종속시켰다.

아베로에스는 신학과 철학이 모두 진리는 진리이되 다른 방식의 진리라고 간주했다.

철학적 주장은 그것의 문자적 의미에서 참된 반면, 신학적 진술은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해석될 때에만 참되다.

그리고 오직 철학자들만이 신학적 진술이 문자 그대로 참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만이 문자적 의미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에스파냐의 근본주의적인 알모아데 지배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베로에스의 저작들을 불에 태운 뒤 그를 모로코 Morocco로 추방했고 그는 그곳에서 1198년에 죽었다.

아베로에스의 죽음은 이슬람 철학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 철학은 알 가잘리가 택한 방향대로 수피 신비주의와 뒤섞이거나, 이슬람교 정통의 요구에 지나치게 구속된 나머지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9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전성기 이슬람 철학은 비잔티움이나 서유럽에서 등장한 어떤 철학보다도 수준 높고 정교한 것이었다.

 

이슬람 철학자들은 탁월한 의사와 과학자들 겸하곤 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철학은 물질적 보상을 거의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성공한 의사와 점성술사는 특히 지배자와 궁정에 연결될 경우 부와 권력을 누리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점성술과 의학은 모두 자연 현상에 대한 세심하고 정밀한 관찰에 의존하는 응용과학이었다.

이슬람 과학자들의 천체 관측은 대단히 정밀한 것이어서, 일부 천문학자들은 정지된 지구 주위를 태양과 행성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이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가설과 충돌했으므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16세기 유럽의 천문학자로서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에게 얼마쯤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슬람 의학자들의 업적 또한 탁월했다.

아비세나는 결핵의 전염성을 발견했고 늑막염과 그 밖의 다양한 신경성질환에 대해 설명했으며, 이들 질병이 오염된 물이나 흙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의 ≪의학정전≫은 17세기까지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에서 권위 있는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또한 라지 Al-Razi(865~925)는 임상 작업을 통해 홍역과 천연두의 차이를 발견했다.

후대의 이슬람 의사들은 지짐술術(소작법燒灼法: 신체 일부를 제거하기 위해 태우는 의료법)과 지혈제의 유용성을 익혔고, 위암을 진단했으며, 독약의 해독제를 처방했고, 안질환 치료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들은 선腺페스트(가래톳페스트) bubonic plague의 전염성을 인식했고, 그 병이 옷을 통해 전파될 수 있음을 지적해다.

무슬림 의사들은 또한 병원 설립 및 개업의 면허제의 선구자였다.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의 주요 도시들에는 34개소 이상의 대형 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각 병원에는 질병에 따라 독립된 병실, 의약 처방을 하는 약국, 그리고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었다.

수석 내과의사와 외과의사들은 학생과 졸업생을 상대로 강의하고 시험을 치러 개업의 면허증을 발급했다.

심지어 거머리[당시의 표준 의료행위였던 사혈瀉血 bloodletting(정맥절개: 특정 부위에서 혈액을 채취하기 위해 치료 목적으로 혈관을 개방시키는 것)에 사용되었다] 사육자도 정기적으로 거머리를 검사 받아야 했다.

 

이슬람 과학자들은 광학, 화학, 수학 등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슬람 물리학자들은 돋보기의 원리, 빛의 속도·투과·굴절 등을 연구했다.

이슬람 화학은 연금술에서 발전했다.

연금술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인의 학문체계로서, 모든 금속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따라서 제대로 된 기술만 적용하면 비금속 base metal을 금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했다.

이슬람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지 못했지만 수많은 신물질과 화합물을 발견했는데, 그중에는 탄산소다, 명반(황산알루미늄), 붕사, 질산은, 초석, 질산, 황산 등이 있다.

또한 이슬람 과학자들은 증류·여과·승화의 화학적 과정을 처음으로 서술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그리스의 기하학과 인도의 산술을 통합시켰다.

이른바 아라비아 숫자(그러나 그 기원은 인도에 있다)를 활용해 이슬람 수학자들은 자릿값('0'이 핵심이다)에 기초한 십진법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대수代數 algebra와 연산演算 algorithm에서 근본적인 발전을 이룩하기도 했다(두 영어 단어의 어원은 아랍어).

또한 그들은 천체 운동을 연구한 그리스 기하학의 성과에 입각해 구면 삼각법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

그 결과 그들은 수학 지식의 모든 영역을 통합·발전시켰는데, 그것은 16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

 

아랍 세계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전부터 시를 하나의 문학 형식으로서 고도로 발달시켰다.

그 후 시는 우마이야 궁정과 아바스 궁정에서 출세의 방편이 되었다.

모든 시가 아랍어로 쓰인 것은 아니다.

특히 아바스 궁정에서는 페르시아어로 쓴 문인이 큰 명성을 얻었다.

이들 시인 가운데 서양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오마르 카이얌 Omar Khayyam(1048~1131)이다.

그의 시 <루바이야트 Rubaiyat>가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번역자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Edward FitzGerald(1809~1883)에 의해 대중적인 영시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피츠제럴드의 번역에 오역이 많기는 하지만, 오마르의 시에 나타난 쾌락주의("포도주 한 주전자와 빵 한 덩어리, 그리고 그대")는 이 시기에 등장한 수많은 이슬람 시의 공통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서정시에는 제약이 전혀 없었다.

한 시인은 자신의 애인에 관해 이렇게 썼다.

"격렬한 입맞춤으로 그의 입을 어찌나 탐닉했는지 이가 거의 다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의 상당 부분은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시를 짓고 낭송한 궁정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대인 Jews도 이 엘리트 문학 세계에 참여했는데 특히 에스파냐에서 활발했다.

그들은 히브리어 Hebrew와 아랍어 Arabic로 포도주, 섹스, 노래 등을 예찬하는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시를 썼다.

이슬람 에스파냐에는 유대인의 종교 문화도 활짝 꽃을 피웠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유대인 학자는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1135~1204)였다.

유대 율법에 대한 체계적 주해서인 ≪토라 평전≫으로 그는 '제2의 모세'라는 칭호를 얻었다.

마이모니데스 이전에도 수많은 유대교 학자들―문법학자, 성서주해가, 법학자 등―이 있었다.

하지만 에스파냐 안에서는 그의 뒤를 잇는 학자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마이모니데스는 알모아데에 의해 추방당한 신세였다.

그는 처음에는 북아프리카로, 다음에는 이집트로 쫓겨났고, 카이로 Cairo에서 이슬람 지배자의 궁정 의사가 되었다.

그의 인생 역정은 12세기 이슬람 세계 전역에 불어 닥친 종교적 반동의 기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반동의 기류는 마침내 이슬람의 문화적 전성기를 처음에는 에스파냐에서, 그리고 마침내 전 지중해 세계에서 끝장내고 말았다.

 

이슬람 철학이 그랬듯이 이슬람 예술은 대단히 절충적이었다.

이슬람 예술의 중요한 영감의 원천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예술이었다.

건축은 아마 이슬람 예술에서 가장 독특한 분야일 것이다.

이슬람 건축의 특징적 요소―돔 dome, 원주 cylinder, 아치 arch―는 맨 처음 비잔티움에서 도입된 것이지만, 시일이 흐르면서 알뿌리(구근球根) 모양의 돔, 말굴 모양의 아치, 뾰족탑, 돌로 만든 장식 격자, 뒤틀린 원주, 모자이크 mosaic, 색채 줄무늬 등의 요소를 지닌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페르시아로부터 복잡하고 비자연주의적인 디자인을 받아들인 다음, 이것을 풍부하고 감각적인 색감(비잔틴 예술도 이 점을 공유했다)으로 모든 미술품에 장식적 요소로 사용했다.

이슬람 신학은 알라 Allah에 대한 모든 예술적 표현을 우상숭배로 간주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예술을 금기시하는 편견이 보편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예술가들은 화려한 양모 카펫과 바닥 깔개, 훌륭한 가죽 세공, 무늬를 넣어 짠 비단과 태피스트리 tapestry, 상감 세공 금속 공예품, 유약 입힌 유리 그릇, 채색 도자기 등에 아랍어 서체, 뒤얽힌 기하학 문양, 식물, 열매, 꽃, 환상 속의 동물 들을 그려 넣었다(이 또한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들 복잡한 디자인은 때로 놀라우리만큼 현대적으로 보인다. 비구상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상업과 공업

 

7세기 아라비아의 경제는 비교적 원시적이었지만 무함마드의 후예들이 정복한 많은 지역은 부유하고 고도로 도시화되어 있었다.

특히 시리아·이집트·페르시아는 지중해 세계의 교차로에 위치해 아프리카, 유럽, 인도, 중국 사이의 주요 교역로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이슬람 세계의 성장에 비례해 무슬림의 무역 활동도 성장했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상인은 러시아 남부와 적도 아프리카에 진출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중국으로 뻗은 대상隊商(카라반 caravan) 통로를 지배했다.

무슬림 세계에서 출발한 선박은 인도양, 페르시아 만, 카스피해를 가로질러 새로운 항로를 구축했고, 한동한 지중해 세계를 석권했다.

그러나 10~11세기에는 서유럽 그리스도교도 상인이 지중해 해상 통로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장악했다.

그들은 16세기에는 인도양까지 장악했는데,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이슬람 세계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중세 초기 무슬림 상업의 성장은 공업 부문에서 다양한 발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라크 Iraq의 모술 Mosul은 면직물 제조업의 중심이었고, 바그다드 Baghdad는 유리제품, 보석류, 도자기, 비단을 전문으로 했다.

다마스쿠스 Damascus는 우수한 품질의 강철 제품과 '다마스크 damask'로 알려진 무늬를 넣어 짠 비단으로 유명했다.

모로코 Morocco와 에스파냐 España는 가죽 제품으로 유명했고, 톨레도 Toledo는 뛰어난 품질의 도검류를 제조했다.

약품, 향료, 카펫, 태피스트리, 수단繡緞(수놓은 것같이 짠 비단), 모직물, 공단, 금속 제품 등 이슬람 수공업자들이 만든 많은 제품이 무슬림 상인을 통해 지중해 세계에 퍼져나갔다.

 

종이에 대해서는 각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은 중국인에게서 제지법을 배워 신속하게 제지법의 거장이 되었다.

8세기 말 바그다드 한 도시에만 종이와 책을 판매하는 점포가 100개 이상 있었다.

종이는 파피루스 papyrus나 양피지에 비해 생산·보관·필기가 훨씬 용이했다.

그 결과 11세기 초에는, 거의 4천 년 동안 파피루스 생산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에서도 종이가 파피루스를 대신하게 되었다.

 

종이의 보급은 이슬람 세계에 혁명을 초래했다.

이슬람 문명의 수많은 특징들―관료제적인 기록 보관, 고급 문헌 및 서적 생산(특히 ≪쿠란≫ 사본), 그리고 쿠파체 Kufic script로 알려진 표준형 흘림체 아라비아 서체에 이르기까지―은 종이를 광범하게 이용할 수 없었더라면 결코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유럽인은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제지법을 익혔다.

하지만 일단 제지법을 익히자 그들은 급속히 이슬람 종이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무슬림 세계는 종이의 대부분을 서유럽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만든 종이에는 종종 이슬람교에 어긋나는 그리스도교 상징 워터마크가 새겨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슬람 경제가 서유럽에 끼친 영향

 

이슬람 문명이 이룩한 문화적·경제적·지적·정치적 성취는 12세기까지 라틴 그리스도교 유럽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마침내 라틴 유럽이 진보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을 때, 유럽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배운 지식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슬람 세계가 유럽에 미친 경제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를 어원으로 한 수많은 영어 단어―교통 traffic, 관세 tariff, 창고 magazine, 알코올 alcohol, 모슬린 muslin(면사를 촘촘하게 짜서 표백하지 않은 흰색 직물), 오렌지 orange, 레몬 lemon, 알팔파(자주개자리) alfalfa, 사프란 saffron(향신료), 설탕 sugar, 시럽 syrup, 사향 musk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영어의 제독 admiral이란 말도 아랍어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아랍어 직함인 토후 emir에서 파생된 말이다.

 

라틴 유럽은 지적·과학적인 면에서도 무슬림 세계에 큰 신세를 졌다.

무슬림에게서 온 이 분야의 어휘를 살피면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연금술 alchemy, 대수학 algebra, 연산 algorithm, 알칼리 alkali, 달력 almanac, 합성물 amalgam, 아라비아 숫자 cipher, 소다 soda, 영 zero 등이 모두 아랍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알데바란 Aldebaran(황소자리의 일등성), 베텔주스 Betelgeuse(오리온자리 중 크고 빨간 일등성) 같은 수많은 별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의 철학 및 과학 지식이 라틴어 사용 세계에서 거의 완전히 잊혔던 중세 초기에 이를 보존하고 확대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주요 그리스 과학 저술의 대부분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12세기 이후, 무슬림, 유대인, 라틴 그리스도교도 학자들은 이들 저서를 다시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중역)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보존·해석했다는 것은 이슬람의 서유럽 문화에 대한 가장 영속적인 기여 가운데 하나였다.

대략 1150년에서 1250년 사이에 현존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3분의 2가량이 아랍어 텍스트에서 라틴어로 중역되었고, 이로써 유럽 그리스도교도 학자들은 처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의 그리스도교도 학자들은 이슬람 주해가들, 특히 아베로에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공부했다.

아베로에스의 권위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라틴어 권역의 학자들은 다른 주해가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를 '주석자 the Commentator'라고 불렀다.

이슬람 수학자들이 인도로부터 받아들인 아라비아 숫자는 이슬람 세계가 남긴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지적 유산이다.

누구라도 로마 숫자로 장부 정리를 해보면 아라비아 숫자의 중요성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도교 유럽의 상상력과 자아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문명은 그리스도교 유럽과 너무 긴밀하게 연관되었을뿐더러, 11세기 이후 너무나 쇠약해져서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중세 전성기와 중세 말기의 유럽인은 비잔티움의 그리스인은 경멸했지만 무슬림에 대해서는 존경과 경외를 바쳤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절정기―절정은 영어로 zenith인데, 이 말 또한 아랍어에서 유래되었다―의 이슬람 문명은 분명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느슨하긴 했지만 이슬람 문명은 아랍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이집트인, 아프리카인, 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공통된 문화적·종교적 세계로 통합시킴으로써 다양성을 지닌 하나의 사회를 창출했으며, 독창적인 발견과 성취에 의해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그 유산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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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2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