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2: 이슬람교의 성장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2: 이슬람교의 성장
새샘 2023. 6. 13. 14:49
출발점은 불분명하지만 1453년의 멸망 시점은 분명한 비잔티움 Byzantium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이슬람 Islam 문명의 역사는 7세기 무함마드 Muhammad(마호메트 Mahomet)의 생애와 더불어 시작되는 출발점은 분명하지만 그 끝은 오지 않았다.
무슬림 Muslim으로 알려진 이슬람교도는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약 7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아프리카로부터 중동과 구소련을 거쳐 남아시아·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분포하고 있다.
모든 무슬림은 공통의 신앙과 공통의 생활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이슬람교(회교回敎) Islam는 항상 추종자에게 특정한 예배 형식의 준수뿐만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문화적 규범의 준수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종교적 요청과 일상생활의 규범을 온전히 일치시킨 가운데 범세계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거대한 실험이었고, 이 점에서 실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를 능가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슬람교의 초기 역사를 더듬어보되, 주로 서쪽으로의 팽창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여러 방향으로 팽창해갔다는 사실, 그리고 이슬람교가 궁극적으로 유럽이나 서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미친 것만큼이나 아프리카와 인도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슬람의 확산(622~750년) | |||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추방(헤지라) | 622년 | 이집트 침입 | 646년 |
무함마드의 메카 귀환 | 630년 | 페르시아 제국 정복 | 651년 |
무함마드 사망 | 632년 | 시아파, 수니파의 분열 | 661년 |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 되다 | 632년 | 북아프리카 정복 | 646~711년 |
우마르가 칼리프 되다 | 634년 | 우마이야 왕조 | 661~750년 |
안티오크,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점령 | 636년 | 에스파냐 침입 | 711년 |
페르시아 수도 점령 | 637년 | 아바스 왕조의 시작 | 750년 |
○이슬람교의 흥기
이슬람교의 발상지는 아라비아 Arabia였다.
아라비아는 이슬람교 창시 이전까지는 너무나도 낙후되어 있어서, 인접한 두 거대 제국인 로마와 페르시아는 그들의 지배권을 아랍인의 아랍인의 영토로 확장시킬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아랍인 Arabs은 베두인족 Bedouin으로서 낙타를 타고 다니는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가축의 젖과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자라는 농작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6세기 후반에 들어 아라비아에는 원거리 통상로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경제생활에 활기가 솟았다.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과 페르시아 제국 Persian Empire 간의 오랜 전쟁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카라반) caravan들은 다른 지역보다 아라비아를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몇몇 도시가 성장해 이러한 교역의 발전을 주도하고 이익을 챙겼는데,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도시는 메카 Mecca였다.
메카가 번영한 이유는 주요 통상로의 교차점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지방 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메카에는 순례장의 성소인 카바 신전 Kaaba Temple이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흑석黑石(검은 돌) Black Stone'이라고 불리는, 제각기 다른 신들을 섬기던 많은 사람이 함께 기적의 유물로 숭배하던 운석이 있었다.
이 신전을 관리하면서 메카 일대의 경제생활을 주도한 것은 Quraysh tribe이었다.
이 부족은 상인과 사업가들로 구성된 귀족계급으로서 그 지역에서 작은 정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570?~632)는 570년 무렵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의 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그는 부유한 과부를 섬기며 일하다가 나중에 그녀와 결혼해 경제적 안정을 얻게 되었다.
중년에 이르도록 그는 다른 메카 시민과 거의 다를 바 없이 부유한 상인으로 살았다.
610년 무렵 무함마드는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그의 생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그때까지 아랍인은 다신교 숭배자였으며, '알라 Allah'라는 한층 강력한 신의 우월성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610년 무함마드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는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었다.
그는 이러한 회심回心(마음을 돌리어 바른길로 들어섬) 체험을 통해 철저한 유일신교도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종교의 토대가 되는 또 다른 메시지를 듣게 되었다.
그 메시지는 쿠라이시 부족에게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선포할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일 것을 명했다.
초기에 그는 국한된 범위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했다.
새로운 종교가 성립되어 카바 신전과 메카가 지방 예배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그에 수반하는 경제적 이익을 잃지 않을까 하는 쿠라이시 부족 지도자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쪽에 있던 도시 야트립 Yathrib에는 그와 같은 문제가 없었다.
또한 야트립 지도자들은 무함마드에게 야트립으로 이주해 지방적 대립과 갈등의 중립적 중재자로서 활동해달라고 부탁했다.
622년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은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이주―아랍어로는 헤지라 Hegira(Hijrah)라고 한다―가 무함마드에게 성공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던 까닭에 무슬림은 그해를 이슬람교의 기원 원년으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리스도교의 기원 원년으로 삼은 것처럼, 무슬림은 그들의 역제歷制(책력에 관한 제도)를 622년 헤지라에서 시작한다.
무함마드는 야트립의 이름을 메디나 Medina(예언자의 도시)로 바꾸고 얼마 후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개종자 집단을 종교적 공동체인 동시에 정치적 공동체로 조직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메카에 있는 초기의 추종자를 지원할 방법을 모색했고 쿠라이시 부족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예언자적 권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 이외의 지역을 여행하는 쿠라이시 부족 대상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쿠라이시 부족이 방어에 힘을 기울였지만, 종교적 열정에 타오른 무함마드 집단은 몇 해 뒤 그들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막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후 630년 무함마드는 메카에 개선했다.
그 후 쿠라이시 부족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카바 신전은 계속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주요 성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메카 정복과 더불어 아라비아 전역의 다른 부족도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무함마드는 632년에 생애를 마감했지만, 죽기 전에 자신이 창시한 종교가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종교적 가르침
'이슬람 Islam'이란 말은 '복종'을 뜻하는데, 이슬람교 신앙은 전능한 창조주인 알라 Allah―그리스도교나 유대교의 신과 마찬가지로 전능한 신―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무슬림은 '알라 외에 신이 없다'고 믿었다기보다는 '유일신 외에는 신이 없다'고 믿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이렇듯 엄격한 유일신교를 가진 무슬림은 무함마드를 신의 마지막 예언자,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믿었을 뿐 신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신의 심판이 임박했으므로 만인은 전적으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은 신을 섬기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인지 여부를 선택해야 힌다.
섬기기로 결단을 내린다면 신은 그를 축복으로 인도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신은 그로부터 돌아설 것이며 그는 구제의 가망 없는 사악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심판의 날에 경건한 자는 기쁨으로 가득한 낙원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지만 저주받은 자는 영원한 불과 고통의 장소로 보내질 것이다.
믿는 자는 삶의 지침을 ≪쿠란 Quran≫에서 찾을 수 있다.
≪쿠란 Quran≫은 신이 무함마드에게 보여준 계시를 편찬한 것이며, 따라서 이슬람의 성경이다.
믿는 자는 철저한 도덕적 정직성과 동정심을 가져야 하며, 종교적 의무―기도와 금식, 메카 순례, ≪쿠란≫ 음송 등―를 성실하게 준행해야 한다.
이슬람교가 많은 부분에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흡사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함마드는 분명 두 종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메카나 메디나에는 유대인이 꽤 많이 살고 있었고, 무함마드는 간접적이긴 했지만 그리스도교 사상을 알고 있었다).
이슬람교는 엄격한 유일신 사상, 개인의 도덕성과 동정심에 대한 강조,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의존한다는 점 등에서 두 종교와 무척 비슷하다.
무함마드는 ≪쿠란≫을 종교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선언했지만,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를 거룩한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인정했다.
무함마드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최후 심판의 교리, 육체의 부활 및 그 후의 보상과 징벌의 교리, 천사에 대한 믿음(그는 신의 첫 번째 메시지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에게 주어졌다고 믿었다) 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쿠란≫을 하늘에서 받아 이 세상에 전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주장하지 않았다.
이슬람교에는 성사聖事(종교행사)나 사제(성직자)가 없다.
모든 신자는 중재자 없이 신앙생활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슬람교에는 사제 대신 신앙과 율법 문제를 조언해주고 논쟁의 심판관 역할을 하는 신학자만 있을 뿐이다.
무슬림은 모스크 mosque에서 함께 기도하게 되어 있지만 기도문 같은 것은 없다.
성직자가 없다는 점에서 이슬람교는 유대교에 더 가깝다.
두 종교의 유사성은 이슬람교가 거룩한 공동체의 신앙생활과 사회적·정치적 삶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알라의 지배 아래 세계를 단일한 신앙을 갖는 공동체로 통일시킬 것을 열망했다는 점에서 유대교와 다르다.
○이슬람교의 정복
범세계적 영향력 확대를 향한 이슬람의 움직임은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에 시작되었다.
무함마드는 후계자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세운 바 없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직후 이슬람 공동체가 과연 존속할 수 있을지 여부마저 불투명했다.
그러나 무함마드 측근들은 무함마드의 장인 아부 바크르 Abu Bakr와 초창기 이래 열렬한 추종자였던 우마르 Umar의 지도 아래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 caliph(예언자의 대리인)'로 지명함으로써 신속히 주도권을 잡았다.
그 후 약 300년 동안 칼리프는 무슬림 전체의 종교적·정치적 최고권자로 군림했다.
아부 바크르는 칼리프가 되자마자, 무함마드를 추종했으되 후계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은 아랍의 여러 부족을 복종시키기 위한 군사 원정을 개시했다.
성공적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면서 아부 바크르의 세력은 아라비아의 경계를 넘어 북쪽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아부 바크르는 즉위 2년 만에 사망했지만, 우마르가 칼리프의 지위를 계승해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에 대한 정복활동을 계속 지휘했다.
그 후 아랍이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다.
636년 아랍인은 시리아 Syria의 비잔티움 군대를 패주시키고, 순식간에 그 지역 전체를 휩쓸면서 안티오크 Antioch, 다마스쿠스 Damascus, 예루살렘 Jerusalem 등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
637년 그들은 페르시아의 주력 부대를 격멸하고 페르시아의 수도 테시폰 Ctesiphon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일단 행정 중심지가 함락되자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페르시아 제국은 더 이상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 후 651년에 이르러 아랍인은 페르시아 정복을 마무리했다.
이제 이슬람 군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들은 646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이집트 Egypt를 탈취했고, 그 후 몇 십 년 동안 북아프리카 나머지 지역을 장악했다.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을 함락하려던 677년과 717년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711년 아랍인은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서고트족 Visigoths이 지배하던 에스파냐 España로 진격해 들어가 그 지역의 대부분을 신속히 정복했다.
그 결과 이슬람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동안에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전부와 옛 로마 지중해 세계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이 엄청난 팽창 속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접근방식은 아랍인들이 정복 활동에 나서도록 만든 동기가 무엇인가를 살핀 다음, 어떤 주변 여건이 그들의 활동에 도움을 주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이슬람의 초기 팽창은 종교적 십자군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랍이는 처음에는 다른 민족을 개종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피정복민이 개종하지 않기를 원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통치자이자 세금징수자 집단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팽창 동기가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종교적 열정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껏 무질서하기만 했던 아랍인에게 칼리프의 명령을 받들도록 하고, 그들 자신이 신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종교의 힘이었다.
아랍인을 이렇듯 사막 바깥으로 밀어낸 진정한 요인은 비옥한 토지와 약탈물에 대한 욕망이었으며, 그들의 정복활동이 계속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진군 과정에서 그들의 목표가 매우 수월하게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아랍인이 이슬람의 종교적 열정에 휩싸여 있던 시기에 그들의 주요 적대 세력들은 허약해져 있었다.
비잔티움인과 페르시아인은 상호간의 오랜 전쟁과 야만인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기진맥진해진 나머지 새로운 노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집트,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지역의 주민은 관료적 지배자의 가혹한 재정적 요구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이슬람의 정복은 강압적인 징세로부터, 그리고 그 지역 일대에서 이단적 그리스도교 집단을 박해한 콘스탄티노플 종교 당국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아랍인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비잔티움·페르시아 정부보다 세금도 적게 거두었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옛 지배자보다 새로운 지배자를 더 환영하곤 했다.
시리아의 한 그리스도교 저술가는 "원수를 갚으시는 신께서는 아랍인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로마인(즉, 비잔티움 제국)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이슬람교는 이집트와 이란 사이의 지역에 급속히 확산되고 뿌리를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
아랍인은 정복활동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후계자 문제에 따른 분란 때문에 무슬림 세계는 곧 분열되기 시작했다.
644년 칼리프 우마르가 죽자 우트만 Uthman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허약한 지도자인데다 우마이야 Umayyad 가문에 속했는데, 이 가문은 메카의 부유한 부족으로 초기에 무함마드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다.
우트만의 반대 세력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Ali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알리는 그의 전사정신과 무함마드와의 혈연관계 때문에 더욱 적합한 칼리프로 여겨졌다.
656년 우트만이 폭도에 의해 피살되자 알리 지지자들은 알리를 새로운 칼리프로 선언했다.
그러나 강력한 우마이야 가문과 그 지지자들은 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 후 알리는 살해되고 우트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661년 우마이야 가문의 다른 인물이 칼리프의 지위를 차지했고, 우마이야 가문은 750년까지 다마스쿠스에서 이슬람 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알리의 추종자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시일이 지나면서 소수 종파인 시아파 Shia―시아 shia는 아랍어로 '파당'이란 뜻―로 결속되었다.
이 종파는 오직 알리와 그의 아내 파티마 Fatima(무함마드의 딸)의 후계자만이 무슬림 공동체(움마 Umma)의 정당한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아파는 최초의 두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 및 우마르 치세에 발달된 종교 관행인 순나 sunna를 구속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시아파의 반대 세력은 순나를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했기에 수니파 Sunni로 불렸다.
10세기에 굳어진 이런 분열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다수파인 수니파의 박해를 수시로 당하면서 시아파는 기꺼이 순교를 감수했고, 자기들만이 유일하고 참된 이슬람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깊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
중세의 시아파는 때때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아파의 대다수는 그보다 훨씬 동쪽에 거주했다.
오늘날 시아파는 이란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라크에서 가장 큰 무슬림 집단이지만,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약 10분의 1에 불과하다.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661년 우마이야 가문이 승리함으로써, 10세기까지 이어지는 좀 더 안정적인 칼리프 국가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통치 노선이 있었다.
즉, 우마이야 왕조 Umayyad Dynasty는 서방 지향성을 보였고, 그 계승자인 아바스 왕조 Abbasid Dynasty는 동방 지향성을 보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는 과거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였고, 우마이야 칼리프 국가는 종전처럼 비잔티움 관료를 계속 임용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잔티움의 계승자처럼 행동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지중해 세계의 지배와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정력을 쏟았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에 대한 717년의 대공세가 실패롤 끝나자 우마이야 왕조는 급격히 세력이 약해졌다.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새로운 방향은 새로운 왕가인 아바스 왕조가 750년에 세력을 장악하면서 나타났다.
아바스 왕조는 통치는 비잔티움적인 요소보다 페르시아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이런 변화는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이라크 Iraq의 바그다드 Bagdad로 옮긴 데서 잘 나타났다.
아바스의 제2대 칼리프 알 만수르 al-Mansour(재위 754~775)는 폐허가 된 옛 페르시아 도시 근방에 새 수도를 건설했다.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를 본뜬 행정 운영 및 절대주의 통치방식을 수립했다.
그들은 대규모 직업 군대와 사치스럽고 세련된 궁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아라비안 나이트 Arabian Nights≫에 묘사된 세계가 바로 그곳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바스 왕조 시대 바그다드에서 저술된 이야기들을 집성한 것이다.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인 하룬 알 라시드 Harun Al Rashid는 786년에서 809년까지 실제로 칼리프로서 지배했다.
그의 사치스럽고 잔인한 지배는 아바스 왕조 권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750년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에스파냐에서만 지배권을 유지했다.
에스파냐의 우마이야 왕조와 페르시아의 아바스 왕조는 서로가 예언자의 유일한 전통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두 왕조의 수도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적대심이 전쟁으로 번진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 두 왕조는 문학과 문화의 후원활동을 통한 우월성 경쟁에 돌입했다.
철학자, 예술가, 특히 시인이 두 왕조의 궁정에 밀려들어왔고, 궁정은 중요한 문화적·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런 경쟁의 한 결과물일 뿐이었다.
칼리프 알-하캄 2세 al-Hakam II(알-하켄 2세 al-Haken II)(재위 961~976)는 코르도바 Córdoba에 장서 규모 40만 권이 넘는 도서관을 건립했는데, 같은 시기 서유럽에서는 고작 100권의 장서를 갖춘 수도원조차 학문의 중심지로 간주되고 있었으니, 이 무렵 두 문명의 수준 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제국 이후로 지중해 세계에서는 이슬람 문명과 비교될 만한 문명이 사실상 전무했다.
비잔티움과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아바스 칼리프국은 그들이 거둔 문화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동방 지향성이 서부 지중해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상당한 정도 경감시켜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세기 동안 우마이야 왕조의 압박에 시달리던 비잔티움 제국은 비로소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서쪽에서는 갈리아 Gaul의 프랑크 왕국 Francia(Kingdom of the Franks)이 아바스 왕조 집권으로 이득을 보았다.
우마이야 왕조가 에스파냐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으므로,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지배자 샤를마뉴 Charlemagne(라틴어: 카롤루스 마그누스 대제 Carolus Magnus the Great)(재위 768~814)는 하룬 알 라시드의 아바스 칼리프국과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동의 적인 우마이야 왕조와 대립각을 세웠다.
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상징은 하룬 알 라시드가 샤를마뉴에게 선물한 코끼리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바스 왕조의 은이 북쪽의 러시아 Russia와 발트해 Baltic Sea를 경유해 라인란트 Rheinland로 유입되어, 프랑크 왕국의 수출품인 모피, 노예, 꿀, 가죽 등과 교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도와 극동에서 온 보석, 비단, 향신료 등 사치품 역시 아바스 왕조를 통해 북쪽과 서쪽으로 흘러들어 프랑크 왕국에 도달했다.
아바스 세계와의 교역 활동은 샤를마뉴에서 시작된 카롤링거 르네상스 Carolingian Renaissance(8~9세기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문예부흥기)가 이룩한 비범한 업적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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