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서론,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1: 비잔티움 제국과 문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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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서론,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1: 비잔티움 제국과 문화

새샘 2023. 5. 23. 11:04

비잔티움 제국의 강역(사진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Fn_vyN5mASU에서 캡처)

3부 중세 서론

'중세 Middle Ages'라는 말은 17세기 유럽인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영광스런 성취와 자신들이 살던 근대 Modern Ages 사이에 놓여 있다고 간주한, 길고도 암울한 단절의 시기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이 말은 너무나 널리 사용되고 있어서 바꿀 수 없는 역사 술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진지한 역사가도 예전처럼 중세라는 말을 경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세―대략 600년에서 1500년 사이―야말로 세 서양 문명의 문화적·정치적·종교적 토대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600년에서 1500년까지의 시기는 유럽 문명에 관한 한 진정한 의미의 '중세'였다.

이슬람 세계에서 이 시기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고 팽창하고 성숙했던 시기였다.

이슬람 문명은 고전 고대에 크게 의존했지만 과거의 유산을 전혀 새로운 종교적 비전으로 융합시켰다.

비잔티움 문명의 경우,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정복당함으로써 중세가 끝났다.

유럽 문명에서도 중세란 용어는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슬람 문명과 마찬가지로 유럽 문명은 7세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정치·종교·예술 면에서 진정으로 유럽 특유의 전통이 등장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7장 서론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는 7세기에 열렸다.

600년 무렵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에 거주한 로마 제국 Roman Empire 지배자들은 그들의 제국이 통일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7세기 말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뒤를 이은 세 개의 다른 문명비잔티움 문명 Byzantine civilization, 이슬람 문명 Islamic civilization, 서유럽 문명 Western European Civilization―이 제각기 독자적인 언어와 생활방식을 갖고 등장했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의 서양 문명의 역사는 이들 세 신흥 문명권 사이의 경쟁과 상호작용의 이야기이다.

세 문명권은 공통으로 물려받은 고대 말기 유산의 상이한 국면을 제각기 보존·확대시켰다.

 

동로마 제국의 속주들이 그랬듯이, 610년 이후의 비잔티움 문명은 그리스어 Greek를 사용했다.

비잔티움 문명은 로마의 관료적·제국적 전통을 강렬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합시켰다.

이런 융합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재위 306~337)와 그 후계자들이 이미 선구적으로 실행한 바 있었고, 그 후 동로마 제국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슬람 문명은 아랍어 Arabic를 사용했다.

이슬람 문명은 이들 세 문명 가운데서 (지리적·문화적으로) 가장 세계적이었으며 가장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제국 지배의 두 가지 핵심 특징―로마의 팽창주의 이상과 문화적·종교적 동화정책의 이상―을 계승했다.

이슬람 Islam은 헬레니즘 Hellenism 세계의 철학적·과학적 관심과 페르시아 Persia의 문학·예술을 결합시킴으로써 중세 초기에 가장 역동적인 혼합 문화를 창조했다.

 

중세 초기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은 라틴어 Latin에 뿌리를 두었지만, 그 밖에도 게르만어 Germanic, 켈트어 Celtic 및 라틴어 파생 방언들로부터 중요한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비잔틴움·이슬람과 달리 서유럽은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 치세(751~987)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로마의 제국적인 이상을 거의 이어받지 않았다.

그러나 서유럽은 로마의 법률 및 지방 정부의 이상, 그리고 그와 더불어 고대 로마의 공화정 전통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중세 초기 서유럽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법률과 라틴 그리스도교야말로 로마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의 절정이었다.

그것은 로마 문화의 핵심이었다.

로마화된다는 것은 중세 초기 유럽이 간직한 보편적인 열망이었다.

만일 한 문명의 수준을 그것이 이룩한 최고의 철학과 문학으로 평가한다면 중세 초기 서유럽 문명은 비잔티움이나 이슬람에 비해 뒤떨어진 문명이었다.

서유럽은 로마를 계승한 세 문명 가운데 경제적으로 가장 뒤떨어졌고 정치와 종교의 조직 면에서 가장 취약했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라틴 서유럽 문명은 군사적·경제적·종교적인 면에서 경쟁자들에게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유럽은 팽창과 정복의 비범한 한 시대를 출발시켰고,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근대 초기 및 근대 세계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과 문화

 

비잔티움 제국(610~1100년)
헤라클리우스 황제 즉위 610년
아랍인, 비잔티움 영토 대부분 장악 650년 무렵
콘스탄티노플, 아랍인에게 함락 직전 717년
비잔티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재정복 717~750년
아랍과 비잔티움의 교착 상태 750~950년
비잔티움인, 시리아 대부분 재정복 950년 무렵~1000년
셀주크 투르크인, 비잔티움 제국 동부지역 침략 1071년
제1차 십자군 1095~1099년

 

 

비잔티움 역사의 출발 시점을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동로마 제국 Eastern Roman Empire이란 용어는 편의상 서로마 제국과 구분해 부르는 별칭으로 학문적 정식 명칭이 아니다)은 고대 로마 제국을 단절 없이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역사가들 사이에 비잔티움 문명의 역사가 언제 시작했는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어떤 역사가는 비잔티움적 특징이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재위 284~305)의 동방화 정책과 더불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다른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때부터 비잔티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콘스탄티노플은 그 후 비잔티움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는 통합된 하나의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로마 제국의 서반부가 게르만족에게 넘어간 뒤인 6세기에 동로마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재위 527~565)는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 Augustus(재위 서기전 27~서기 14)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서로마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분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는 분명 비잔티움 문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의 치세에는 '로마적'이라기보다 '비잔티움적'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사상과 예술이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주관적인 강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즉, 어떤 학자는 새로워진 모습을 강조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를 사용했고 옛 로마의 회복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들어 이의를 제기한다.

새로운 왕조가 등장한 것은 61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 왕조는 동쪽에 기원을 두었고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온전히 동방적·비잔티움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므로 비잔티움 역사의 출발을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또는 유스티니아누스로 하자는 주장에는 물론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610년의 헤라클리우스 황제 Emperor Heraclius(재위 610~641) 즉위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610년을 비잔티움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는 것은, 그 시점부터 1071년까지 비잔티움 군사사·정치사의 동향이 동쪽으로부터의 부단한 침입에 대한 항거로 특징지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헤라클리우스가 즉위했을 무렵 비잔티움 제국은 페르시아인에 의해 존립을 위협받고 있었다(당시 페르시아인은 비잔티움 제국의 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정복했다).

614년 페르시아인은 승리의 상징으로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진품 십자가의 일부로 믿어졌던 유물을 예루살렘에서 가져갔다.

이 유물은 동로마 황제들의 그리스도교적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상징물이었다.

헤라클리우스는 각고의 노력으로 비잔티움의 군사력을 만회해 대세를 뒤집으며 페르시아인을 철저히 격멸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627년 그 십자가를 되찾아왔다.

하지만 그 직후 여태껏 조용하기만 했던 아라비아 Arabia에서 새로운 군대가 일어나 비잔티움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신흥 종교인 이슬람교 정신에 충만한 아랍인은 비잔티움인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기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했다.

650년에 이르러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인이 7세기 초에 점령했던 비잔티움 영토를 대부분 장악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도 포함되었으며, 예루살렘은 그 후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성지가 되었다.

아랍 군대는 페르시아 본토마저 정복하더니 신속히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군했다.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비잔티움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지중해 세력으로 떠오른 아랍인은 바다로 진출했다.

677년 아랍인은 함대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717년 재차 수륙 양면작전으로 이 도시를 정복하려 했다.

 

717년 아랍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위협으로 비잔티움의 운명은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위기는 한 세기 전 페르시아의 위협을 격파했던 헤라클리우스만큼이나 결단력이 단호했던 레오 3세 Leo III(재위 717~741)의 반격으로 극복되었다.

오늘날의 화염방사기와 비슷한 '그리스의 불 Greek fire'이란 이름의 비밀병기와 강력한 군사력으로 레오 3세는 바다와 육지에서 아랍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717년 레오 3세가 치른 콘스탄티노플 방어전은 유럽 역사상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만일 그때 이슬람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더라면 그들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을 휩쓴는 것을 저지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그 후 몇 십 년 동안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곳은 이후 300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접어들어 비잔티움은 또 다른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족 Seljuk Turks에 의해 종전에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고 말았다.

1071년 셀주크 투르크족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반도)의 만치케르트 Manzikert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 놀라운 승리를 통해 그들은 비잔티움 동부 지역을 압도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헤라클리우스나 레오 3세 시대와 비슷한 처지로 돌아갔다.

비잔티움은 그 후 400년 동안 대체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근근이 버티던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 Ottoman Turks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투르크족은 지금도 콘스탄티노플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그들은 이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 Istanbul로 바꿨다).

 

 

○안정의 원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비잔티움 제국이 그처럼 수많은 적대세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놀라움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내 정치가 극도로 혼미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커진다.

비잔티움의 권력은 철저히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에 집중되어 있었고 지배자들은 과거 로마 제국 황제와 마찬가지로 신이 부여한 절대적 황제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음모와 폭력 이외에는 반대 의견을 표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 결과 비잔티움의 역사는 거듭되는 음모와 반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살해하거나 또는 장님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예사로 벌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막후 정치로 너무나 유명해, 지금도 영어에서 '비잔티움적 byzantine'이란 말은 고도로 복잡하고 교활한 막후 공작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제국에는 지극히 유능한 황제들이 적절한 시기에 등장해 막강한 권력을 효과적으로 휘둘렀다.

더욱 다행스러웠던 것은 극심한 궁정 반란의 와중에도 관료 기구는 항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효율적인 관료제는 비잔티움의 성공과 장수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학식 있는 관료가 교육과 종교를 감독했으며 모든 형태의 경제활동을 통할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국 관료는 물가와 임금을 규제했으며, 면허 제도를 관할했고, 수출을 통제했으며, 안식일의 준수를 강제했다.

심지어 전차 경주마저도 엄격한 정부 관리 아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주민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특정 팀을 응원하도록 할당되었다.

또한 육군과 해군, 궁정, 외교를 관료적 방식으로 규제했으며, 그 덕분에 이들 분야는 당시로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강한 조직력을 갖췄다.

 

비잔티움 제국이 오래 버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적어도 11세기까지는 국가의 경제 기반이 비교적 건전했다는 점이다.

비잔티움 동유럽에서는 고대 말기와 마찬가지로 상업과 도시가 계속 번영했다.

9세기와 10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극동의 사치품과 서유럽의 원료를 거래하는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

제국은 또한 비단 생산 등 자국의 산업을 보호·장려했으며, 11세기에 이르기까지 금·은 화폐 주조로 유명했다.

콘스탄티노플(때때로 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했다)만 제국의 중심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시기에는 안티오크 Antioch가 번영했고, 테살로니카 Thessalonica, 트레비존드 Trebizond 같은 번잡한 대도시들은 비잔티움 역사가 끝날 때까지 꾸준히 번영했다.

 

역사학자들은 비잔티움의 상업과 공업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의 상공업이 상당 기간 동안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국가를 지탱해줄 잉여 부의 대부분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경제의 핵심은 다름 아닌 농업이었다.

비잔티움 농업사는 부유한 귀족·수도원이 소유한 대규모 영지의 토지 잠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독립적 소농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비잔티움의 자유농민은 11세기까지 국가의 입법 조치 덕분에 가까스로 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25년 이후 귀족계급이 정부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유농민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수많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중 하나는 농민이 외적에 맞서 저항하는 데 관심이 줄었다는 것이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는 정부가 근시안적으로 귀족계급의 야심에 영합한 결과였다.

 

 

○비잔티움 종교

 

지금까지 우리는 군사 원정 및 정치·경제 부분에 관해 말하면서 그것이 마치 비잔티움 사람들 삶의 핵심인 듯 다루었다.

물론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그것이야말로 핵심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제국의 종교적 정통성이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종교적 신조와 관련된 글 몇 구절을 놓고도 죽기 살기로 싸웠다.

이와 같은 종교적 열정은 종교적으로 갈등이 심한 시대에는 큰 해를 끼칠 수 있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에 강한 확신과 사명감을 부여할 수도 있었다.

 

비잔티움의 교리 논쟁은 황제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매우 복잡하게 얽혔다.

황제들은 교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몇몇 황제는 종교 논쟁에서 옳고 그름을 결정짓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지방의 분리주의에 직면했을 경우, 황제들은 자신이 믿는 교리를 신민 모두에게 믿도록 강제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비잔티움 정부의 권위가 막강하다 해도 그런 수순까지 관철될 수는 없었다.

동부의 많은 속주를 상실하고 교리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뒤인 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종교적 평화가 가까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 일어난 성상聖像 파괴 논쟁 Iconoclastic Controversy으로 말미암아 평화는 다시 한 세기 동안 깨지고 말았다.

 

성상파괴주의자는 성상 Icons―그리스도와 성인의 형상―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고자 했다.

성상파괴주의자가 볼 때 그 같은 성상 숭배는 이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우상을 누구도 숭배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는 너무나 거룩한 존재여서 인간의 솜씨론 표현할 길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십계명(<출애굽기> 20:4)에서도 '새긴 우상'에 대한 숭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상 금지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해 전통주의자는 숭배되는 것은 성상 자체가 아니라 성상 배후의 거룩한 실체라고 반박했다.

비잔티움 예술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성상은 지상의 인간에게 천국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성상 파괴 운동은 이사우리아 왕조 Isaurian Dynasty(717~802)의 레오 3세가 시작했고, 그 후 콘스탄티노스 5세 Konstantinos V(재위 741~775)가 더욱 강력한 에너지로 추진했다.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많은 역사가들이 논쟁을 벌였다.

레오 3세는 717년 이슬람의 침략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구출한 황제였다.

그런데 이슬람교도는 모든 종교적 형상을 사탄이 하는 일 즉 '사탄의 역사役事'로 간주해 철저히 반대했다(<쿠란> V. 92).

그러므로 레오 3세의 성상 파괴주의는 이슬람교도가 그리스도교에 제기한 가장 중요한 비판에 응답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제국이 신을 올바르게 믿고 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이 운동 배후에는 정치적·경제적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황제들은 급진적인 새로운 종교 운동을 천명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황제의 통제권을 재천명하고 아울러 점차 세력이 커지던 수도원을 제압하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원은 성상 숭배를 구실로 삼아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그 결과 콘스탄티노스 5세는 그들을 철저히 박해함으로써 막대한 수도원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다.

 

9세기에 이르러 성상 파괴 논쟁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즉, 다시 성상 숭배를 허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그러나 이 문제를 에워싸고 한 세기 동안 벌어졌던 혼란은 몇몇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하나는 황제의 명에 의해 수많은 종교 예술품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8세기 이전의 비잔티움 종교 예술품은 대부분 성상파괴 주의 황제들의 손이 닿지 않았던 이탈리아나 팔레스타인 등지의 것들이다.

논쟁의 또 다른 결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유럽과 라틴 서유럽 간의 종교적인 틈새가 크게 벌어졌다는 것이다.

8세기까지만 해도 비잔티움 황제들의 긴밀한 동맹자였던 교황은 성상 파괴 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성상 파괴주의자는 결국 성인 숭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교황의 수위권은 교황이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주장에 토대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8세기 교황의 성상 파괴주의 반대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그것은 프랑크 왕국 Kingdom of the Franks의 지도자 샤를마뉴 Charlemagne가 800년 크리스마스에 서유럽에서 새로운 로마 황제로서 즉위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성상 파괴 운동의 궁극적 실패로 인해 비잔티움 종교가 원래 지녔던 몇몇 주요 특징이 다시금 강조되었고, 그것은 9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압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 특징 중 하나는 정치적 통합과 군사적 성공을 얻어내는 열쇠로서 제국의 전통적·정통적 신앙이 새롭게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종교적 전통은 교리의 올바름과 정치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한 성상 파괴 반대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천사나 황제가 전에 네가 듣지 못하던 복음을 말하거든 귀를 막아버려라."

이러한 전통 강조는 종교 갈등을 경감시켰고, 그 결과 9세기와 10세기에 정통 교리는 새로운 지지자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제국 안에서 콘스탄티노플 종교 전통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켰고, 시리아 그리스도교나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 같은 경쟁관계에 놓여 있던 종교 전통을 더욱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단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에서는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지적인 문제에서도 자유로운 사고를 금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잔티움 황제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학을 설립하고 지원도 했지만 결코 의미 있는 수준의 지적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이 점은 12·13세기 서유럽 대학이 누렸던 자유분방한 지적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비잔티움 문화

 

비잔티움인 Byzantine의 생활은 종교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인이 그리스도교에 전념했다고 해서 그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유산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지거나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잔티움의 학교는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 고전문학, 특히 호메로스 Homeros에 기초해 교육을 베풀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딱 한 줄만 인용해도 비잔티움 궁전 주변의 교육받은 청중은 즉시 인용된 문구 전부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영어 사용권에서는 오직 ≪킹 제임스 성경 King James Bible (KJB)≫만이 비잔티움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수준의 문화인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17세기의 성경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는 비잔티움인에게 문학적 모델이자 교훈적인 교과서요 동시에 개인의 덕성과 지혜를 함양하는 지침서였다.

 

또한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플라톤 Platon의 철학, 투키디데스 Thukydides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도 알려져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체로 비잔티움인은 그리스의 과학·수학 전통을 경시했고 철학에 대한 관심도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유스티니아누스는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이미 다 알려졌다고 선포하면서 플라톤 이후 존속했던 아테네 철학 아카데미를 폐쇄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Alexius Comnenus(재위 1081~1118) 황제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교육을 중단시켰다.

물론 비잔티움 문화는 전통의 창조적 복원을 존중했다.

하지만 독창성은 비잔티움의 지적 생활이 지향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으며, 혁신 아닌 보존이야말로 비잔티움 고전주의의 특징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비잔티움의 헌신적 고전주의는 비잔티움의 지적·문화적 생활을 풍요롭게 했으며 그리스 고전을 보존해 후세에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 고전 문헌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비잔티움의 필사자들이 사본을 제작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잔티움의 고전주의는 오직 비잔티움인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속인屬人 교육제도의 산물이었는데, 이 교육제도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시대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및 이슬람 세계와 견주어볼 때 비잔티움의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은 정망 비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귀족이나 부유한 가문의 소녀는 학교에는 가지 않았지만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9세기와 11세기까지 비잔티움 세계의 교육받은 여성들은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 Pythagoras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칭송을 받았다.

비잔티움의 가장 저명한 여성 지식인은 왕녀인 안나 콤네나 Anna Comnena였다.

그녀는 아버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전기를 세련된 문장으로 저술했는데, 호메로스와 에우리피데스 Euripides를 자유자재로 인용했다.

탁월한 문필가 외에 비잔티움 제국에는 여의사도 있었는데, 서양 다른 사회에서 최근까지도 그런 사례가 극히 드물었음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축 및 예술 분야에서 비잔티움의 업적은 한층 더 익숙하다.

비잔티움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Santa Sophia('거룩한 지혜'라는 뜻) 성당인데, 이 건축물은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축조한 것이다.

우리가 비잔티움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는 시기보다 앞서 건축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전형적인 비잔티움 건축 양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 성당의 목적은 인간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내적·영적 특징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당의 설계자는 건물의 겉모습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깥벽에는 회를 바른 벽돌만 사용했을 뿐 대리석 외장재, 우아한 기둥, 조각으로 장식된 프리즈 frieze(소벽小壁: 건물 기둥이나 회랑 위에 새겨진 가로띠 형태의 양각 장식) 등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는 전혀 달랐다.

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와 금박, 영롱한 대리석 기둥, 반짝이는 보석처럼 햇빛을 굴절시키기 위해 붙인 색유리 등이 장식되었다.

경이로운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건물 바깥에서 전혀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실내에서만 조명을 하도록 되어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건축 구조는 건축 역사상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교회는 십자가 형태로 설계되었고, 중앙의 정사각형 위에 거대한 돔이 놓였다.

가장 큰 문제는 돔의 원둘레를 그 아래에 놓이게 될 정사각형에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해결책은 중앙 정사각형의 네 귀퉁이에 세워진 기둥에 거대한 아치를 올려 세우는 것이었다.

이때 돔의 가장자리는 아치의 쐐기돌 위에 놓이며, 아치 사이에는 석조물로 채워진 곡면의 삼각형이 드러난다.

경탄을 자아내는 힘을 지닌 건축 구조이며, 동시에 장엄함과 섬세한 처리가 돋보이는 양식이다.

성 소피아 성당의 거대한 돔은 지름이 32미터이며 바닥에서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약 54미터에 달한다.

돔의 둘레에는 수많은 창문이 있어서 돔은 마치 받침기둥 없이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잔티움과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성상 파괴 논쟁 이후 동방 그리스도교와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800년 샤를마뉴 이래) 서유럽이 제국임을 자처한 데 대해 콘스탄티노플이 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둘 사이의 종교적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인(동유럽인)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인은 거칠고 무지몽매했으며 진지한 신학자들이라면 누구나 습득하고 있었던 그리스어를 해독할 수 없었다.

반면 서유럽인이 볼 때 비잔티움인은 오만하고 유약하고 종교적으로도 이단에 빠지기 쉬워 보였다.

1054년 로마 교황이 동방교회에 대한 우위를 선포함으로써 종교 분열이 촉발되었고 분열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그 후 십자군 원정은 둘 사이의 갈라진 틈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어버렸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된 뒤 서유럽인에 대한 비잔티움인의 증오심은 격렬해졌다.

한 비잔티움인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이제 깊은 골이 패여 있다.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생각도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한편 서유럽인은 비잔티움인을 일컬어 "햇볕을 쏘일 가치조차 없는·········쓰레기 중의 쓰레기"라고 말했다.

비잔티움인은 해가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서유럽인을 어둠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양쪽의 증오심으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투르크인이었다.

1453년 투르크인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그 후 곧장 빈 Wien까지 이르는 유럽 동남 지역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 기나긴 증오의 역사는 잠시 미뤄두고(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우리는 서유럽이 얼마나 비잔티움에게 신세졌는가를 살피는 것으로 비잔티움 문명에 대한 설명을 끝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에 대한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 그리스도교 서유럽이 독립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서유럽인은 고전 그리스 문헌이 서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기간 동안 이 문헌을 보존하는 데 힘쓴 비잔티움 학자들에게 문화적으로 큰 신세를 졌다.

비잔티움 예술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서유럽 예술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베네치아 Venezia(영어: 베니스 Venice)의 성 마가 성당 Basilica di San Marco(영어: St Mark's Basilica) 비잔티움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조토 Giotto와 엘 그레코 El Greco같은 서유럽의 위대한 화가들도 비잔티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라벤나 Ravenna와 팔레르모 Palermo 같은 도시에서 비잔티움의 모자이크를 감상하는 여행자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또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성 소피아 대성당은 바라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움 속에 비잔티움 동유럽의 광명이 지금도 아른거리고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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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2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