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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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존 비결

새샘 2023. 6. 15. 16:13

샤먼(주술사)이 새겨진 사카치-알리안 암각화(사진 출처-https://www.hani.co.kr/arti/PRINT/874396.html)

빙하기가 끝나지도 않은 구석기시대에 어떻게 문명의 여러 요소가 발달할 수 있었을까.
1만 5000년 전 지구는 빙하기가 끝나가며 기후가 급변하는 시점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다양한 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진화해갔다.
그들은 서로 접촉하고 협력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는 등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대처했다.
이런 상황은 이보다 앞선 서기전 3만 년 무렵에 사라졌던 네안데르탈인(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omo neanderthalensis과 좋은 비교가 된다.
현생인류와는 달리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인이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현대인과 큰 차이가 없었고 신체 구조도 비슷해서 현대인의 옷을 입혀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였다.
실제로 최근에는 5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직조를 한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옥스퍼드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의 로빈 던바 Robin Dunbar 교수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스토리텔링 storytelling), 그리고 종교(샤머니즘 shamanism)를 꼽았다.

후기구석기 문명인 튀르키예 Türkiye의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유적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렵민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신전을 세우고 축제를 벌이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러시아 메드베데프 Vitaly Medvedev 교수가 원시고토기를 발견한 가샤 Gasya 유적 근처에 있는 사카치-알리안 Sakachi-Alyan(또는 Sikachi-Alyan) 마을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다양한 샤먼(주술사) shaman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후기구석기시대는 금속이나 바퀴 같은 운송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마을도 없었고,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신전을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구석시기대 사람들의 지능과 문화 수준이 상당했을 보여주는 증거는 적지 않다.
스페인 Spain의 알타미라 Altamira와 프랑스 France의 라스코 Lascaux 동굴벽화는 이미 2~3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
또한 러시아 Russia 순기르 Sungir 유적에서 발견된 아이의 무덤에서는 5천 개의 장식이 나왔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고, 동굴에서 다양한 축제를 하면서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대체로 후기구석기시대인 1만 5000년 전을 전후해 술이나 빵의 흔적도 나오는 등 일반적으로 한참 뒤에 나타난다고 알고 있던 문명의 요소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동아시아 구석기시대의 토기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단합했다는 증거다.
당시 사람들은 정착을 하지도 않았고 농사도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토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불을 써서 다양한 요리를 했다는 뜻이다.
다른 어떤 그릇보다 토기는 조리에 유리하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1950년 이래로 중국과 신대륙 마야문명 Maya Civilization이 종교와 문화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고 지적되어왔다.
이를 두고 후기구석기시대의 문화 발달과 지역 간 교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거나, 중국 상商나라 사람들 또는 진시황秦始皇 때의 술사術士(음양陰陽, 복서卜筮, 점술占術에 정통한 사람) 서복徐福이 태평양을 건너갔다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 설들이 횡행하는 상황이었다.

 

막연했던 두 대륙 간 문화의 관계를 구체화한 사람이 장쭈디 스탠퍼드대학교 연구원이다.

그는 자신의 하버드대학교 졸업논문에 기초하여 1993년 출판한 ≪마야와 고대 중국: 고고학 문화의 비교연구≫에서 중국과 마야문명의 유사성을 샤머니즘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공통적인 진화 과정에서 발현된 보편적인 종교적 심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학자들은 시베리아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결과로 보기도 한다.

물론 후기구석기시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종교, 문화, 기술이 발달되었음을 감안하면 그들이 1만 5000년 전 베링해 Bering Sea를 건너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 최초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북방기원설도 현생인류의 이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일부 역사 애호가들이 바이칼호 Lake Baikal와 시베리아 Siberia에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곤 하는데, 사실 북방 일대에서 기원을 찾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말고도 유라시아 Eurasia에 제법 많다.

왜 하필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신화나 설화가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사람들에게 남아 있을까를 살펴보면, 이들에게는 빙하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약 1만 5000년 전부터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차 따뜻해졌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살던 환경과 비숫한 추운 기후 지역을 찾아 시베리아 일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지만, 기후가 계속 따뜻해지고 빙하기가 완전히 끝나면서 일생을 건 중요한 선택을 했다.

기존 빙하기 때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로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온화한 기후를 찾아 유라시아 남쪽으로, 더 나아가 세계 곳곳으로 이동했다.

유라시아 각 지역에 확산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북쪽 추운 지역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공통의 기억이 유라시아 전역에서 유사하게 존재하는 종교나 북방계 신화와 같은 형태로 남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빙하기가 끝나가는 시점인 1만 2000년 전쯤에 한반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구석기인들은 돌만 깨고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은 각 도구에 맞는 적절한 돌감을 찾아 다녔고 흑요석 같은 아주 귀한 돌은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동해 물물교환 방식으로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어디에 적절한 사냥감이나 살기 좋은 곳이 있는지 정보도 교환했을 것이다.

최근까지의 연구를 보면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석기를 만들기 위한 석재나 귀한 자원을 얻기 우해 약 600킬로미터 범위 안에서 정보를 교환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럼 이런 상황을 한반도로 옮겨 생각해보자.

특이하게도 한반도에서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언젠가 관련 유적들이 발견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일단 지금까지의 자료로만 보면 이 시기에 한반도에 머물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 이주할 곳은 일본이나 북방 지역뿐이다.

따라서 시베리아 전역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다양한 문화적 유사성은 막연하게 한민족의 일파가 시베리아에서 내려왔을 것이라는 신화가 아니라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이어진 고대인들의 광범위한 인적·물적 네트워크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후기구석기시대 바이칼호는 비단 한반도와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부터 소련 학계에서는 베링해를 건너간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이 바이칼호 근처라고 보았다.

20세기 초반 바이칼호 일대에서는 말타 Mal'ta, 부레티 Bureti 유적과 같은 발달된 후기구석기시대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에 냉전 시기부터 최근까지 소련과 미국의 구석기시대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한 곳이 바로 바이칼 지역이었다.

시베리아의 후기구석기시대 중심인 바이칼 지역에서 최초의 미국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러시아 구석기 연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알렉세이 오클라드니코프 Aleksei Okladnikov는 바이칼호에서 동북아시아의 원주민인 퉁구스-만주족이 기원했다는 설을 1950년대부터 제시했다.

 

최근(2020년 5월)에는 소련 시절부터 나온 주장들이 DNA 연구로 증명되고 있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Novosibírsk의 고고민족학연구소와 독일 Germany 막스플랑크연구소 Max Planck Institutes 등은 1962년에 발굴되었던 바이칼 근처의 우스티-캬흐타3 Ust-Kyakhta3 유적에서 출토된 치아를 분석한 결과 1만 4000년 전을 전후에서 바이칼호에서 베링해를 거쳐서 아메리카로 사람들이 이동했음을 재확인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구글 관련 자료

2023. 6.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