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티베트 고원의 숨겨진 나라 본문
세계의 지붕 티베트 Tibet(시짱/서장西藏)는 그 험난한 산세만큼이나 신비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들의 독특한 예술세계,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20세기에는 서구 열강에, 21세기에는 중국에 핍박 받아온 티베트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하지만 신비의 뒤편에는 무지가 있었다.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동안 우리가 아는 티베트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최근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름만 알려져 있던 티베트 최초의 국가인 '상웅국象雄國'과 3500년 티베트의 역사가 밝혀졌다.
티베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산지대에 사는 유목민의 후예로서, 아시아 일대의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며 독특한 히말라야 문명을 일궈낸 사람들이다.
티베트 고대문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티베트 최초의 국가, 상웅국
티베트만큼 관심은 많지만 제대로 모르는 문명도 없는 듯하다.
중국의 동화 정책만큼이나 신비나 명상을 앞세운 서방의 티베트 신비주의도 티베트를 곡해하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인디애나 존스: 미궁의 사원≫(1984), ≪티베트에서의 7년≫(1997) 등 서양의 많은 영화들이 티베트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자기들의 관점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 티베트의 역사를 물어보면 대답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고작해야 당나라와 각축을 벌였던 토번吐蕃왕국 정도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것 말고는 티베트인의 종교인 라마교 Lamaism와 관련된 현대 티베트 문화만 조금 알려져 있다.
티베트 신화에는 2000년이나 이어온 오래된 문명에 대한 기록이 있다.
티베트 최초의 국가는 상웅국(티베트어로 상숭, 중국어로는 장중이라고 불림)으로, 서기전 12세기부터 약 2000년 동안 존속했다가 손첸감포(또는 송첸감포) Songtsen Gampo가 세운 토번왕조에 의해 서기 644년에 멸망했다고 한다.
상웅국은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해발 3000~4500미터 가까이 되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지역에 있었고, 국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없다.
그러니 이런 험한 지역에 고대문명이 2000년 동안이나 존재했다는 것을 선뜻 믿기 어려웠다.
20세기 초반부터 수많은 서양의 탐험가들이 티베트를 탐사하며 상웅국의 자취를 찾고자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최근 고고학 조사로 상웅국의 실체가 밝혀졌다.
티베트의 가장 서쪽으로 인도와 접경한 응가리(아리阿里)의 랑첸장포(중국어로는 상천하象泉河) 지역에서 토번왕국 이전에 지어진 거대한 성터 유적이 발견되었다.
신화로만 전해지던 상웅국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가루다 계곡의 은빛 성채(The Silver Castle of Garuda Valley)라는 뜻의 '궁륭은성穹窿銀城'이라 불리는 이 유적은 해발 4400미터의 산 정상에 약 10만 제곱미터 넓이에 120여기의 대형 건물을 세운, 글자 그대로 하늘에 지은 도시였다.
그렇다면 상웅국 사람들은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첫 번째 실마리는 상웅국의 종교로 티베트 지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토착 신앙인 '본 Bon'이다.
본교는 이 지역으로 유입된 불교와 결합하여 티베트불교의 기반이 되었다.
상웅국의 불교사상을 집대성한 책인 ≪상웅대장경≫은 총 170권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100여년 전에 티베트를 답사한 서구의 학자들도 ≪상웅대장경≫의 존재를 알았지만, 고대 상웅 문자로 쓰인 단편적인 기록만 본 것일 뿐이어서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2014년부터 번역 작업이 시작되어 그 내용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상웅대장경≫은 지금으로부터 400~500년 전에 쓰인 것이라 고대 상웅문화의 모습을 알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장 이른 본교의 흔적에 놀랍게도 고대 페르시아는 물론 인도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화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음이 밝혀졌다.
러시아의 티베트 학자 브로니슬라프 쿠즈네초프 Bronislav Kuznetsov에 따르면 본교의 최고신은 근동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 계통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 Ahura Mazda라고 한다.
≪상웅대장경≫은 이미 불교가 들어온 뒤에 쓰인 것이니, 이것만으로 지난 3500년 동안 티베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직접 그 지역을 연구해야 할 텐데 응가리 지역은 워낙 사람의 접근이 어렵고 인도와의 국경 지역인 탓에 방문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최근 서부 티베트 지역 발굴이 시작되면서 약 2500년 전부터 이 지역에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사카 Saka 계통 사람들이 이주했음이 밝혀졌다.
수많은 고고학 발굴이 그렇듯 이번에도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의 출발은 상웅국이 멸망한 이후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존재했던 또다른 은둔국가 구거 Guge(또는 구게: 고격古格)왕국이었다.
구거왕국은 17세기에 포르투갈의 선교사가 방문하기 전까지 서방은 물론 중국에서도 그 존재를 몰랐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국가였다.
1999년 구거왕국을 조사하던 고고학자들이 주변의 무덤을 발견해 발굴한 결과 유목민들의 동검이 출토되었다.
계속된 조사를 통해 그 일대에 중앙아시아 사카문화의 영향이 강한 돌무지무덤(적석묘積石墓), 황금 동물장식, 암각화 등도 다수 발견되었다.
사카문화 사람들은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크게 번성했던 고대 페르시아 계통이다.
중앙아시아의 사카 계통 사람들이 파미르 고원 Pamir Mountains 지대를 따라 티베트 서부로 이동해 상웅국을 세웠고, 일부는 남서쪽의 인도 북부로 퍼져 사카족이 되었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나라로 알려진 샤키야족 왕국의 샤키야족 Shakyas(석가족釋迦族)이 이들 유목민족의 일파라는 설이 유력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지역에서 약 3500년 전 최초로 유목경제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화로만 전해지던 상웅국의 시작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물론 상웅국이 전설처럼 인구가 100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제국은 아니었고,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다가 토번왕국이 침략하던 즈음에는 꽤 거대한 국가로 발전했던 것 같다.
○고원지대의 유목민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문명
상웅국을 만든 사카문화는 티베트에서 그치지 않고 높은 산맥을 따라 더 남쪽인 윈난성(운남성云南省/雲南省)과 쓰촨성(사천성四川省), 더 나아가 태국과 베트남의 북부 산악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유라시아 유목민이 사용하는 청동기와 동물장식이 이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것이 그 증거다.
유라시아의 유목민이 무더운 동남아의 밀림 지역까지 이동한 배경은 무엇일까.
지도상으로만 보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원거리 이주와 교역은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유목민들의 생계와 관련 있다.
야크 yak, 노새, 산양같이 고원지대에서만 서식하는 유목동물을 키우며 살던 사카족은 자신들이 키우는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과 비슷한 산악 지역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생활습관이 이방인들은 쉽게 다닐 수 없는 산속에, 어느 누구도 모르는 교류의 길을 만들었다.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험난한 산악지대 교류는 근대 이후 차를 실어 나르는 교역 루트로 이어졌는데 이를 '차마고도(다마고도茶馬古道)'라고 부른다.
한편 티베트 문명이 한반도 북부 및 만주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도 있다.
실제로 돌로 만든 무덤, 동검, 토기 등 티베트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우연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만주 일대의 비파형동검 문화와 비슷하다.
1980년대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퉁언정(동은정童恩正)은 티베트에서 만주에 이르는 아치형의 거대한 산맥을 따라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반월형 전파대 이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퉁언정은 톈안먼(천안문天安门/天安門) 사건 이후 중국 정부의 압박을 피해 미국을 망명한 탓에 더이상 연구를 지속하지 못했고, 다른 학자들도 여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21세기 들어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발굴이 활발해지고, 지역 간의 교류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이 밝혀지면서 퉁언정의 가설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재검토되고 있다.
티베트를 포함한 유라시아 고원지대 사람들 사이에 원거리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주목해야 할 연구 주제다.
○나치즘 Nazism(나치주의)과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동양주의東洋主義)에 이용된 티베트
고고학계에서 티베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내놓은 지금도 티베트는 여전히 현대 정치의 각축장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탄압하고 있고, 서양을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시민운동도 활발하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 티베트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싸움터였고, 실제로 많은 티베트인들이 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 레이더스 Raiders of the Lost Ark>(1981)에서는 주인공인 인디애나 존스 Indiana Jones 박사(해리슨 포드 Harrison Ford 분)가 히말라야 산속의 술집에서 나치 Nazi와 경쟁하며 유물을 뺏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다.
초기 티베트의 연구자로 추앙받는 이탈리아의 주세페 투치 Giuseppe Tucci는 극렬한 무솔리니 Mussolini 추종자였고,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 Sven Hedin, 러시아의 화가 니콜라이 레리흐 Nikolai Rerikh 등 대부분의 서구인들이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티베트를 신성시하고 국가 통치에 이용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역시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였다.
히틀러의 나치는 꽤나 진지하게 티베트의 신비스러운 힘을 믿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가 화가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1923년에 나치를 태동시킨 맥주홀 폭동에 참여했던 디트리히 에카르트 Dietrich Eckart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히틀러의 측근 중 오컬트 occult(신비주의)에 빠져 있던 독일의 정치가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도 티베트로 탐험대를 파견하여 티베트인을 조사했다.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반에 서양에서 유행한 우생학優生學 eugenics과 인종(차별)주의 racism가 있다.
그들은 '순수한' 유럽인을 찾아야 했다.
열등한 타민족과 섞이지 않은 고대의 우월한 사람들이 산악 지역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고,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경쟁적으로 파미르 고원과 티베트 고원을 탐사했다.
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아리안족 Aryans의 기원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상식적으로도 산속에 고립된 '단일민족'이 자기들끼리만 종족을 유지했다면 근대 유럽의 왕족이나 고대 이집트 왕족들처럼 유전적인 문제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멸종했을 것이다.
나치의 패망과 함께 '순혈' 아리안족을 찾는 이야기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티베트에서 했던 경험이 극도로 미화되어 서양에 전해졌다.
지금도 티베트에 대한 수많은 문헌들은 대부분 명상이나 신비한 체험 위주이며 정작 티베트의 고대역사와 고고학에 대한 순수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이런 모든 상황이 지난 시절 서구 열강들이 티베트에서 벌인 만행을 숨기고 커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는 느낌도 강하게 받는다.
○중국와 인도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
1950년대 중국의 티베트 침략 이후 달라이 라마 Dalai Lama를 비롯한 티베트인들이 망명하여 지속적으로 티베트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2006년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2000킬로미터의 칭짱철도(청장철로青藏鐵路)가 개통하면서 티베트는 빠르게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21세기에 중국과 인도가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낀 티베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티베트가 가진 문화적 의의보다는 중국와 인도의 국경 지역에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티베트는 두 대국 사이의 갈등의 축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21세기가 되어서도 티베트가 가진 진정한 문명사적 의의를 탐구하려는 노력은 요원해 보인다.
인도와 중국은 티베트 서부의 카슈미르 Kashmir 국경분쟁으로 대립하며 서로가 티베트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2019년 10월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인도와 중국의 두 정상이 힌두교 사원에서 만나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듯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2020년 6월부터 10월까지 인도와 중국의 분쟁 지역인 아크사이친 Aksai Chin에서 심각한 유혈충돌이 벌어져서 양국 군인 수십명이 전사했다.
인도와 중국 간 국경분쟁의 역사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중후반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의 일환으로 티베트를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경쟁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1세기가 되면서 주인공이 중국과 인도로 바뀌었다.
티베트 고대문명은 이제까지 서양 사람들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동양편견주의)의 상징이었다.
또한 21세기에는 중국과 인도라는 새로운 문명 충돌의 상징이 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바로 상웅 문명에 있다.
고대 상웅 문명은 고대 중원과는 다른,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일구었던 또다른 문명임이 밝혀졌다.
중국 고대 연구사 연구자 탄청 Tan Chung은 중국 쓰촨 지역 고대문명인 싼싱두이(삼성퇴三星堆) 문화와 인도는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고대 티베트도 지금의 국경 프레임을 씌워 판단할 필요가 없다.
우리와 완전히 다른, 해발 3000~4500미터의 고원 지역에서 살던 문명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편견 없이 티베트를 알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티베트 이전에 존재했던 상웅국은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티베트 문명의 기원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다.
티베트 사람들의 기원은 중국도 인도도 아닌 고원지대를 따라 유목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독일 나치의 기원인 순혈민족도 아니었고, 은둔의 외톨이도 아니었다.
높은 산맥을 따라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新疆維吾爾自治區)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살면서 동서를 이어주던 또 다른 문명의 개척자였다.
다행히 학계에서는 현대 국가의 국경으로 그들을 규정짓지 않고 티베트를 하나의 문명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그렇다 해도 아직 대부분의 연구가 7세기 이후 티베트의 불교에만 한정되어 있는 실정이다.
티베트에 씌어진 편견들을 걷어내고 잃어버린 상웅국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티베트의 진면목을 밝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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