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연담 김명국 "달마도" 본문
<밀려드는 그림 주문에 연담은 울려고 했다>
어느 시대에나 기인奇人(별난 사람)이나 괴짜가 있다.
사회적 관행과 통념으로부터 일탈한 이들의 행동은 많은 일화를 남기면서 그 시대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해준다.
기인과 괴짜는 대개 특출한 재주를 갖고 있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사회적 부조리에 날카롭게 대항하기보다는 낭만적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회화사에는 3대 기인이 있다.
17세기 인조 때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1662년 이후), 18세기 영조 때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1786?), 19세기 고종 때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화가로서 타고난 천분을 갖고 있으면서 환쟁이 또는 중인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기행을 일삼았고, 술로써 자신을 달랬던 주광酒狂이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이들의 작품은 한결같이 뛰어난 걸작과 불성실한 졸작이 뒤섞여 있다.
본래 기인은 자기 관리를 하지 않고 그럴 처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연담 김명국은 16세기 마지막 해인 1600년에 태어나 1662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에 조선통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고, 1651년(효종 2) 현종의 결혼식 때 설탄雪灘 한시각韓時覺(1621~1691년 이후)과 함께 가례도감의궤도의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연담은 말술이었던 탓에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유작 중에는 취필醉筆의 흔적이 많고 호를 아예 취옹醉翁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남태응이 증언하기를 연담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그릴 수 없어서 다만 '욕취미취지간慾醉未醉之間', 즉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명작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연담의 기행은 조선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도 여전했다.
본래 통신사의 규모는 300 내지 500명으로 여기에는 임무 수행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화원 한 명이 정식 요원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때 화원은 사자관寫字官(조선 시대에,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과 함께 일반인을 위해 글씨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는 등 민간외교도 같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1636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연담을 데려간 것은 탁월한 선발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 집에는 다다미 한 장 크기의 '도코노마( 床の間)'라는 공간이 있어 글씨나 그림 족자를 걸고 그 아래에 꽃꽂이를 장식하는 것이 집안 장식의 정석이다.
그림과 글씨에 대한 현실적 수요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통신사가 오면 그림과 글씨를 얻으려는 주문이 쇄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연담이 갔을 때 일본에서는 일필휘지로 그리는 감필법減筆法(대상의 핵심만을 활달하게 묘사하는 붓질)의 <달마도>, <신선도> 같은 선승화禪僧畵가 일대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속필速筆의 도석인물화는 연담의 필치와 기질에 잘 맞아떨어졌다.
일본에 도착하자 연담은 왜인들의 요구에 따라 신들린 듯이 그림을 그려주었다.
연담으로서는 자신의 기량을 한껏 보여줄 수 있는 계기였다.
그 소문이 일본 전체에 퍼지면서 연담의 그림을 보러온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림 요청이 너무 쇄도하여 연담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통신사의 부사副使로 갔던 김세렴金世濂이 쓴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에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자년(1636) 11월 14일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박지영, 조정현, 김명국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7년 뒤인 1643년에 통신사가 또 가게 되었을 때 일본 쇼군(장군將軍)의 막부에서는 화원은 "연담 같은 사람이 오기를 바람(원득여연담자願得如蓮潭者)"이라는 특별한 공식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이를 쾌히 받아들여 파격적으로 김명국과 이기룡李起龍을 함께 보냈다.
임진왜란 이후 재개된 열두 번의 조선통신사 행차에서 화원이 두 명 간 경우와 한 화원이 두 번이가 간 경우는 연담 김명국밖에 없다.
이런 특별한 사정을 생각해볼 때, 혹시 연담의 두 번째 도일은 아예 주문화에 응하기 위해 특별히 파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해행총재海行摠載≫를 보면 연담의 두 번째 도일에서도 왜인들의 서화 주문은 여전했다.
당시 일본에서 보여준 연담의 활약상을 기록한 공식 문서는 없지만 남태응은 ≪청죽화사聽竹畫史≫에서 이런 얘기를 전한다.
"김명국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일 듯 떠들썩하여 (김명국의 그림이라면) 조그만 조각이라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귀하게 여겼다."
한 왜인이 잘 지은 세 칸 별채의 사방 벽을 좋은 비단으로 바르고 천금을 사례비로 하여 김명국을 맞아 장병화障屛畵(이동 가능한 병풍 그림)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김명국은 술부터 먼저 찾았다. 양껏 마신 다음 취기에 의지하여 비로소 붓을 찾으니 왜인은 금가루(이금泥金) 즙을 담은 주발을 받들어 올렸다. 김명국은 그것을 받아 한입 가득 들이킨 다음 벽의 네 모퉁이에 뿜어서 그릇을 다 비워버렸다. 왜인은 깜짝 놀라고 또 화가 나서 칼을 뽑아 꼭 죽일 듯이 하였다.
그러자 김명국은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고 벽에 뿌려진 금물 가루를 쓸듯이 그려가니 혹은 산수가 되고 혹은 인물이 되며, 깊고 얕음과 짙고 옅음의 설색設色(색이 칠해짐)이 손놀림에 따라 천연스럽게 이루어져 채색이 더욱 뛰어나고 기발하였으며, 필세筆勢가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잠시도 머무는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작업이 끝나고 나니 아까 뿜어졌던 금물 가루의 흔적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고 울창한 가운데 약동하는 모습이 마치 귀신의 도움으로 된 것 같았다. 김명국 평생의 득의작이었다.
왜인은 놀랍고 기뻐서 머리를 조아려 몇 번이고 사례를 할 따름이었다. 왜인은 이 별채를 잘 보호하여 나라의 볼 만한 구경거리로 삼으니, 멀고 가까운 데서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이것을 돈을 내고 보도록 하니 몇 년 안 되어 공사비가 다 빠지게 되었다.
그 왜인의 자손들은 지금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혹 다치기라도 할까봐 기름막(유막油幕)으로 덮어두고 있다고 한다. 또 우리 사신이 가면 반드시 먼저 열어 보이면서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거짓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물건을 정성스럽게 간수하는 일본인의 습성을 고려할 때 어느 대갓집에 이 장병화가 지금도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담이 일본에서 그린 그림도 제법 전한다.
일본의 '고화사전古畵事典'이라고 할 아사오카 오키사다(조강흥정朝岡興禎)의 ≪고화비고古畵備考≫ 중 <조선서화전朝鮮書畵傳>에는 당시 조선통신사 수행 화원의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엔 위 사진에서 보는 연담의 <포대화상도布袋和尙圖>에 들어있는 '취옹'이란 낙관과 김명국 도인圖印(그림 도장)이 실려 있다.또 일본에 전하는 연담의 유작이 현재 10여 점이나 된다.
그의 유명한 대표작인 <달마도達摩圖)>와 <수노인도壽老人圖>(수노인이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남극성南極星을 신격화한 것 또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도교의 신선)도 일본에서 전래되던 것이다.
연담은 본래 꼼꼼하게 그리는 그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산수인물화를 그릴 때도 광필狂筆(미친 듯한 붓질)을 보여주었다.
그런 연담이 일본에서 일필휘지로 그린 감필법의 도석인물화는 그의 천품의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였던 것이다.
연담으로서는 모처럼 화가로서 '몸을 풀어본' 순간이었다.
이처럼 연담 김명국은 당시 일본에서 '한류 화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국내로 돌아온 다음에는 다시는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여전히 술주정뱅이 환쟁이로 술독에 파묻혀 기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신필神筆의 연담을 기인으로 만든 것은 세상이었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2. 2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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