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4: 문학·예술·음악의 만개, 9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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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4: 문학·예술·음악의 만개, 9장 결론

새샘 2024. 2. 17. 17:02

중세 전성기의 문학은 다양하고 생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성당 학교와 대학에서 문법 공부가 부활되자 몇몇 뛰어난 라틴 시가 탄생했다.

가장 좋은 예는 세속 서정시, 특히 12세기의 골리아르 Goilard라고 불리던 방랑시인들이 쓴 것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골리아르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악마의 추종자'란 의미일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적절한 것 같다.

왜냐면 방랑시인들은 기도문을 풍자적으로 개작하고 복음서를 희화화한 시끄러운 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서정시는 변화하는 계절의 아름다움, 길 위의 태평스런 생활, 술 마시고 노는 즐거움, 특히 사랑의 즐거움을 찬미했다.

쾌활하고 풍자적인 시를 쓴 그들은 주로 유랑 학생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의 시는 조야粗野한(천하고 상스러운) 생동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에 대한 최초의 분명한 거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속어 문학

 

라틴어에 더해 속어인 프랑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등도 문학적 표현의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속어 문학의 대부분이 영웅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북유럽의 에다 Edda(북유럽 신화와 전설 등의 읊은 고대 아이슬란드어로 쓴 시집인 '고古에다'와, 아이슬란드의 역사가이자 신인 스노리 스툴루손 Snorri Sturluson이 편집한 고대 북유럽의 신화와 전설, 작시법이 수록된 시학 입문서인 '신新에다'를 합해서 부르는 용어)와 사가 Saga('이야깃거리'란 뜻이며, 산문으로 쓴 이야기나 역사 이야기 또는 전설과 역사소설), 독일의 <니벨룽의 노래>, 에스파냐의 <엘 시드의 노래>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1050년에서 1150년 사이에 지어졌다.

물론 일부(<엘 시드의 노래>와 북유럽의 사가)는 13세기까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서사시들은 남성적이지만 세련되지 못한 전사들의 사회를 묘사했다.

전투용 도끼로 해골을 쪼개는 등 유혈이 낭자한 이들 서사시의 주제는 영웅적 전투, 명예, 충성심 등이었다.

설혹 여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했지만 남편은 마음대로 아내를 구타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어느 서사시에는 왕비가 남편에게 고집을 부리다가 주먹으로 코를 얻어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코피를 흘리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매우 감사합니다. 당시이 좋으시다면 다시 때려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에서 혐오감을 느낀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속어 서사시는 무자비하고 남성 중심적임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문학적 힘을 발산한다.

 

 

○트루바두르의 노래와 궁정 로망스

 

12세기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troubadour(음유시인)와 궁정 로망스 작가는 주제와 양식에서 서사시와 판이한 변화를 시도했다.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그 후 서유럽 문학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하나의 운동을 출발시켰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문학 형식은 서사 시인보다 한층 세련되었다.

그들의 서정시 중 가장 우아한 것은 노래로 부르기 위해 만들어졌고 궁정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처음으로 채택했다.

트루바두르는 여성을 정신적·육체적 희열을 줄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로 이상화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한 여성은 통상 강력한 영주의 아내였고, 따라서 그들은 낭만의 실현보다는 동경과 열망을 시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랑의 서정시에 덧붙여 트루바두르는 여러 종류의 짤막한 시들을 썼다.

일부는 음담에 불과했다.

이런 시에서 사랑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데, 시인은 예컨대 말타기를 정부의 몸에 올라타는 것과 비교하면서 육욕적인 상념에만 빠져들 뿐이었다.

한 트루바두르의 시는 무기 다루는 뛰어난 솜씨나 동시대의 정치 사건을 언급했고, 일부는 종교 문제를 명상했다.'

그러나 그 주제가 무엇이든 우수한 트루바두르의 시는 항상 재치 있고 혁신적이었다.

남부 프랑스의 트루바두르에 의해 시작된 문학적 전통은 북부 프랑스에서는 트루베르 trouvère에 의해, 그리고 독일에서는 미네징거 minnesinger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트루바두르들이 불러일으킨 혁신은 그 후 서유럽 모든 언어권의 서정시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들의 시적 기법은 20세기에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같은 문학적 모더니스트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활되기도 했다.

 

12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로망스 romance라고 알려진 긴 설화시說話詩(전승되어 오는 이야기를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꾸민 시)이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속어인 로망스어 Romance language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로망스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물 묘사가 탁월했고 주제는 대개 사랑과 모험이었다.

어떤 로망스는 고전기 그리스의 주제를 다듬은 것이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서 왕 King Arthur에 관한 것들이었다.

켈트족 Celts의 영웅 아서 왕과 그의 기사들이 이룬 전설적인 위업을 소재로 삼았다.

아서 왕의 로망스를 쓴 최초의 위대한 작가는 북부 프랑스의 크레티앵 드 트루아 Chrétien de Troyes였는데, 그는 1165년에서 1190년 사이에 활동했다.

크레티앵은 새로운 형식의 창안에 기여했으며 주제와 관점에 혁신적 요소를 도입했다.'

즉, 트루바두르가 혼외 사랑을 찬양한 데 반해 크레티앵은 결혼 안에서의 낭만적 사랑의 이상을 처음으로 보여주면서 또한 주인공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느낌까지 묘사했다.

 

한 세대가 지난 뒤 크레티앵의 작업은 독일의 위대한 시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 Wolfram von Eschenbach 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Gottfried von Straßburg에 의해 이어졌다.

두 시인은 18세기 이전 독일어 사용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볼프람의 ≪파르치팔 Parzival≫은 사랑과 성배를 찾는 이야기로서,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media≫를 제외하면 중세 전성기의 문학작품 가운데 그 어떤 것보다도 섬세하고 미묘하며 웅대하다.

크레티앵과 마찬가지로 볼프람은 진정한 사랑이 결혼은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파르치팔≫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 문학사상 최초로 영웅의 심리적 성장 과정을 온전히 볼 수 있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트리스탄 Tristan≫ 조금 음울한 작품으로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Isolde 사이의 비극적인 불륜의 사랑을 들려주고 있다.

이 작품은 현대 비극적 낭만주의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트루바두르와  달리 그는 사랑의 완성을 죽음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파르치팔≫과 ≪트리스탄≫은 19세기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의 오페라를 통해 오늘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 전성기의 모든 설화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로망스처럼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매우 색다른 설화 형식은 우화시 fabliau였다.
우화시는 이솝 Aesop의 도덕성을 장려하는 동물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후 훈도薰陶(덕德으로써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치고 길러 선으로 나아가게 함)나 교훈 목적이 아닌 여흥을 위한 짧은 읽을거리로 발전했다.

그것은 종종 매우 거칠었으며, 때로는 유머가 넘치되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성관계를 다루곤 했다.

또한 많은 작품에 반反성직적 경향이 강해 수도사와 사제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우화시는 점증하는 세속화 경향을 표현했다는 점과 조야한 리얼리즘을 처음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한 리얼리즘은 후대에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와 제프리 초서 Geoffrey Chaucer에 의해 완성되기에 이른다.

 

 

○신곡

 

단테의 '신곡' 한글 번역판 표지(사진 출처-https://www.yes24.com/Product/Goods/2661492)

 

중세 문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은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1265~1321)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이다.

단테는 생애 전반기에 고향인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 시의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전 생애 동안 그 도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정치에 참여했던 속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종교, 철학, 문학에 관해 놀라울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경과 교부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평신도로서는 드물게도 최신의 스콜라 신학 scholastic theology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와 키케로 Cicero, 보이티우스 Boethius를 비롯한 수많은 고전 작가에 통달했으며, 트루바두르의 시와 당대의 이탈리아 시에도 정통했다.

1301년 그는 정치적 격동이 있은 뒤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생애의 나머지 기간을 추방당한 채로 살았다.

그의 주저인 ≪신곡≫은 말년에 쓴 작품이다.

 

단테의 ≪신곡≫은 힘찬 이탈리아어 압운시押韻詩(시행의 일정한 자리에 같은 운 즉 라임 rhyme이 규칙적으로 달린 시)로 쓴 기념비적 설화로서 시인이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처음에 단테는 자신이 어떻게 '어두운 숲'에서 방황하게 되었는가를 말한다.

여기서 어두운 숲이란 인생 중반에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벗어나 방황하며 겪었던 심각한 위기를 말한다.

그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으로 그 절망의 숲에서 빠져나온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고전적인 이성과 철학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안내해 지옥과 연옥을 통과한다.

그런 다음 단테가 사랑했던 여인 베아트리체 Beatrice가 단테를 맡아 천국을 안내한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그리스도교의 지혜와 축복을 상징하는 여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단테는 역사적인 인물들 및 동시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연으로 각양각색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들려준다.

시가 진전되면서 시인은 지혜와 이해력이 성장하고 마침내 새로운 믿음과 확신으로 잃어버렸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되찾는다.

 

독자들은 단테의 장엄한 작품에서 각기 다른 경이감과 만족감을 얻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어를 아는 독자라면 단테의 언어와 이미지의 생동감과 창의성에 경탄할 것이다.

어떤 독자는 단테의 섬세한 구성과 시적 균형미에 압도될 것이다.

어떤 독자는 그의 학식에, 다른 독자는 주인공과 개별적인 이야기의 생명력에, 또 다른 독자는 그의 드높은 상상력에 압도될 것이다.

역사가들은 단테가 예술적인 완성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중세 최고 수준의 지식을 요약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탁월성을 발견한다.

단테는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현존 세계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택하고 악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리스 철학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예컨대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든 지식의 스승'이라 불렀다.

무엇보다도 그의 낙관주의와 인간성에 대한 궁극적 믿음―추방당한 망명객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믿음은 중세 전성기의 분위기를 힘차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단테는 세계 역사상 인간에 대한 긍정적 확신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한 두세 명의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예술과 건축

 

≪신곡≫에 상응할 만한 중요성을 갖는 건축물로 중세 전성기의 위대한 고딕 성당을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고딕 성당은 ≪신곡≫과 마찬가지로 방대한 규모, 조심스런 균형미를 지닌 복잡한 디테일의 조화, 하늘로 치솟는 갈망, 종교적 장엄함 등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딕 양식을 다루기보다 먼저 중세 전성기에 고딕 Gothic 양식보다 앞서 존재했던 로마네스크 Romanesque 양식을 소개하고 그것을 고딕 양식과 비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0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완전한 형식을 갖춘 것은 11세기 및 12세기 전반이었다.

그 시기에는 종교적 개혁 운동에 힘입어 많은 새로운 수도원과 대형 교회가 건축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모든 건축적인 디테일을 획일적인 체계에 엄격히 종속시킴으로써 신의 영광을 석재로써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본 특징은 둥근 아치, 돌로 쌓은 거대한 벽, 커다란 지붕(지지 기둥), 작은 창문, 수평선의 강조 등이다.

이런 요소는 모두 함께 결합해 로마네스크 건축에 안정감과 영속성을 부여했다.

내부 장식은 단조로웠지만 때로 밝은 색조의 모자이크 mosaic나 프레스코  fresco로 보완되었고 건물 안팎에 장식용 조각상―그리스도교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혁신이다―이 도입되었다.

최초로 실물 크기의 인물 조각상이 건물 전면에 등장했다.

인물상들은 실제 이상으로 장중하고 길게 표현되었지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체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고 있다.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딕양식으로 대치되었다.
숙련된 예술사가라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몇몇 특징이 어떻게 고딕 양식으로 발전되었는지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양식의 외양은 판이하게 다르다.

실로 두 양식은 마치 서사시와 로망스처럼 다르게 보인다.

두 양식의 차이를 서사시와 로망스의 차이에 비교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먼저 고딕 양식은 로망스가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인 12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도 하나는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보다 한층 더 세련되고 기품 있고 우아했는데, 이런 특징은 로망스를 서사시에 비교해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고딕 건축은 가장 복잡한 건축 양식 중 하나이며, 기본 요소로는 뾰족한 아치 arch, 궁륭穹窿 vault(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천장이나 지붕)늑재肋材 rib(천장이나 지붕에서 갈비뼈 역할을 하는 지지대) 이용한 둥근 천장, 공중부벽 flying buttress(벽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건물을 지탱하는 반 아치형 석조 구조물)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장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아치나 붙박이 기둥보다 훨씬 가볍고 높은 구조물을 가능케 했다.

사실 고딕 성당은 수많은 창문들로 에워싸인 석조 골격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높은 첨탑, 장미 꽃무늬 창문, 돌로 만든 섬세한 장식 창 격자, 정교하게 조각된 전면, 수많은 기둥, 장식으로 사용된 이무기돌 gargoyle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장식은 대체로 외부에 집중되어 있다.
고딕 성당의 내부는 결코 칙칙하거나 어둡지 않다.

스테인드글라스 stained glass 창문은 빛을 차단하기는커녕 화려하게 만들며, 태양광을 포착해 풍요롭고도 따뜻한 색감으로 채운다.

이런 색감은 자연 상태에서는 최고의 순간에서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고딕 성당이 순수한 금욕적 내세주의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는 신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위해 봉헌된 것이다.

그러나 고딕 성당에는 명백한 종교적 의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상생활의 풍경을 담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이따금 포함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동정녀 마리아, 성인 등과 같은 종교적 인물의 고딕 조각상이 중세 서유럽에서 당시까지 만들어진 어떤 조각상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식물과 동물의 조각 표현도 마찬가지여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식물학적·동물학적 정밀성을 보여준다.

더욱이 고딕 건축은 중세의 지적 정수를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많은 상징 형상을 가진 성당 건물은 문맹자를 위한 (돌에 새겨 놓은) 일종의 지식 백과사전이었다.
끝으로 고딕 성당은 도시인의 자부심을 표현했다.

고딕 성당은 언제나 성장일로의 중세 도시에 자리 잡았고, 그것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인 동시에 도시의 위대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새로운 성당이 건축될 때면 모든 시민이 함께 건축에 참여했고 시민들은 성당을 마치 자기 재산인 것처럼 간주했다.

 

 

◎연극과 음악

 

중세 전성기의 업적을 살피면서 연극과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현대 연극은 고전 연극 못지않게 중세 연극에서 영향을 받았다.

중세 전 시기를 통해 라틴 고전 희곡 일부가 필사본의 형태로 알려져 있긴 했짘만 한 번도 상연된 일은 없었다.

연극은 교회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했다.

중세 초기에는 기도문의 몇몇 구절이 상연되었다.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 라틴어 종교 단막극이 교회 내 상연을 위해 창작되었다.

그 후 급속히 라틴어 희곡 대신 속어 희곡이 등장했고 회중 모두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200년 무렵에는 연극이 교회 바깥, 즉 교회 앞마당에서 상연됨으로써 예배 시간을 축내지 않아도 되었다.

교회 외부 상연이 이루어지자마자 연극은 일상 세계로 파고들었다.

비종교적인 줄거리가 도입되고 성격 묘사가 확대되었다.

엘리자베Elizabeth 시대와 셰익스피어 Shakespeare로 나아가는 길이 준비된 것이다.

 

연극이 기도문에서 시작해 그 범위를 훨씬 뛰어넘은 것처럼 음악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세 전성기까지 서유럽의 음악은 단선율―즉, 화음이 없는 멜로디―이었다.

둘 이상의 조화된 멜로디를 함께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것은 중세 전성기에 이루어진 위대한 발명이었다.
10세기에 이런 방식으로 몇몇 실험이 행해진 적이 있었지만, 본질적인 도약이 이룩된 것은 1170년 무렵 파리 성당에서였다.

최초로 대위법에 의해 두 개의 목소리가 두 가지 다른 멜로디로 미사곡을 불렀던 것이다.

같은 무렵에는 악보 체계도 고안되었다.

연주자는 더 이상 기억에만 의존핮지 않아도 되었고 음악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 수 있었다.

유럽 음악의 위대성은 모두 이런 첫걸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9장 결론

 

최근 100년 동안 학자들은 중세 전성기의 압도적인 지적·종교적·문화적 변화야말로 12세기 르네상스의 구성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런 범주화는 여전히 적절해 보인다.

더욱 널리 알려진 14·15세기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중세 전성기의 지적 변화는 고전 텍스트의 회복과 철저한 연구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두 시기―12세기와 14·15세기―의 고전 텍스트 활용 방식은 상이했고 독특했다.

두 르네상스 중 어느 것도 단순한 재생이 아니었다.

두 르네상스 운동은 새롭고 독특한 그리스도교 문화에 고전 사상을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14·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못지않게 12세기 르네상스는 향후 서유럽 문명을 특징지은 한 묶음의 독특한 태도와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사랑과 우정의 관념, 인간의 동기와 의도에 대한 각별한 흥미, 심리학에 대한 관심, 이 모든 것이 12세기 르네상스에서 비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 내면성을 강조하는 태도, 참된 종교는 세상에서의 실천적 자선 활동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비전, 종교와 정치가 인간의 삶에서 분리된 영역이라고 하는 전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소수 집단을 규정짓고 박해하려는 현대인의 충동마저도 유대인, 이단자, 성적 소수자를 억압한 12·13세기의 행태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학문, 사상, 문학, 건축, 연극, 음악 등에 이토록 중요한 기여를 한 수많은 사람들이 중세 전성기 파리에서 서로 뒤섞여 살았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틀림없이 노트르담 성당 Cathédrale Notre-Dame에서 함께 기도했을 것이다.

12세기 중세 전성기 대표적인 학자들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되고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인 Athenians이 그랬듯이 그들 모두는 유럽 문명의 형성에 기여했고 수많은 기념비적 업적을 창조했다.

그들의 이름은 잊혔지만 그들의 업적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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