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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를 쓴 샤먼

새샘 2024. 2. 2. 17:31

'코로나 corona'와 '크라운 crown'은 같은 어원으로 왕이나 귀족들이 쓰는, 끝이 하늘로 올라가듯 뾰족하게 장식된 관을 말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도 그 표면에 태양 코로나(해무리)를 연상시키는 돌기가 붙어 있어 '코로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멕시코와 러시아의 최고 인기 맥주들에도 '코로나'라는 이름이 붙는데, 그것은 맥주 거품이 마치 왕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화려한 왕관은 지난 몇천 년 동안 유라시아의 사람들과 함께한 대표적인 제사장인 샤먼 shaman들이 쓰던 관에서 유래했다.

샤먼은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들의 관에 표현된 사슴뿔이나 나무의 형상은 하늘과 맞닿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대륙은 물론 신대륙 전역에도 퍼져 있는 샤먼의 관은 흔히 생각하는 화려한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샤먼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신의 뜻을 전하는 중개자 역할에 충실했다.

하늘과 자연에 순응하며 생존을 위해 인류의 지혜를 모으는 현자가 바로 샤먼이다.

 

 

○신에게 가닿기 위해

 

샤먼의 어원은 에벤크어 Evenk(또는 Evenki) '사만'으로 '지혜가 있는 자'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무巫'라고 한다.

무당 무巫는 사람(人)과 사람(人) 사이, 하늘과 땅(二)의 사이를 잇는다(ㅣ)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샤먼이라는 용어 자체는 시베리아 원주민에서 기원했지만 사실상 같은 역할을 한 종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포함한 유라시아 전역, 신대륙, 그리고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 Pascal의 명언처럼 인간은 육체적으로 갈대만큼이나 나약한 존재지만 사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도 아닌 인간이 함께 모여 지혜를 나누고 생존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지혜, 즉 하늘의 뜻을 읽어내는 중개인을 갈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당시의 초월적인 지혜란 날씨 예측, 병의 원인과 치유 같은, 요즘에는 너무나 알기 쉬운 것들이지만 말이다.

 

옛사람들은 쉽게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정보를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그런 지식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샤먼 또는 무인巫人이라 불리는 예언자가 등장했다.

 

 

시베리아 암각화에 새겨진 샤먼의 모습(왼쪽)과 최근까지 사용된 시베리아 샤먼의 관(오른쪽). 사슴뿔 형상은 신의 뜻을 받기 위한 표식으로 최근까지도 시베리아 샤먼은 거의 비슷한 관을 사용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샤먼이기 이전에 평범한 인간인 그들은 신과 맞닿는 황홀경(에스터시 ecstasy)에 오르기 위해 각종 약초와 술의 힘을 빌리고 화려한 의식을 행했다.

유라시아 초원에 수도 없이 새겨진 샤먼의 의식을 묘사한 암각화는 바로 평범한 인간들이 신에 닿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유라시아 초원에는 버섯머리를 한 샤먼의 그림이 많은데, 학자들은 이를 의식에 사용하던 환각제 버섯이라고 말한다.

 

샤먼의 관도 그런 노력이 표현된 의식도구다.

샤먼의 관은 요즘 말로 하면 신의 뜻을 받기 위한 일종의 '와이파이 wifi' 같은 것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요소로는 나무나 사슴뿔 이미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머리에 사슴뿔을 달고 있는 샤먼의 모습은 1만 5000년 전 프랑스의 동굴벽화 트루아 프레르 Trois-Frères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 거의 같은 형태의 사슴뿔 모양 관을 쓴다.

 

관을 장식하는 또다른 원형은 나무다.

흔히 '세계수世界樹 world tree'라고 불리는 나무 장식 역시 하늘과 땅을 잇는 역할을 한다.

영국의 구전 민화 <잭과 콩나무 Jack and the Beanstalk>의 콩나무처럼 나무는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

에벤크족 Evenks 같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나무에 영혼이 깃들어 하늘과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나무에 사는 새는 하늘과 땅을 잇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게다가 사슴은 해마다 봄에 뿔이 새로 자라고 나무는 해마다 봄에 꽃이 피고 곤충과 새가 깃든다.

샤먼의 관은 그런 끊임없는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신라의 금관은 '출出' 자 모양과 사슴뿔 이미지로 장식했고, 형태는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이미지가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의 샤먼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전세계에 똑같은 이미지로 구성된 샤먼의 관이 존재했다는 것은 구석기시대의 샤먼이 빙하기 직후 세계 곳곳에 퍼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과 소통하는 도구에서 권력의 상징으로

 

흑해 연안 사르마트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을 쓴 여성 사제 복원도(사진 출처-출처자료1)

 

샤먼의 관이 금관으로 재탄생하게 된 데에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발흥한 유목민족의 문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흉노와 훈족이 등장한 1~5세기 사이에 유라시아 각지에서 초원의 영향을 받은 금관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특히 1920년대 경주의 금관총 발굴로 신라의 금관이 처음 알려지자 세계 고고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흑해 연안의 유목민인 스키타이 Scythian나 사르마트 Sarmat의 고분, 그리고 북유럽의 켈트족 Celts 샤먼이 사용했던 금관과 거의 같은 형태의 관이 동아시아 끝자락인 경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왕관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사실 정작 흉노나 훈족 사이에는 금관이 널리 유행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전쟁을 해야 하는 기마민족에게 금관은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대신 초원의 기마민족은 황금을 덧붙인 화려한 황금 외투와 바지를 입었고, 샤먼의 역할을 했던 일부 여성 사제들만 금관을 썼다.

하지만 초원 기마문화의 황금 제조 기술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원래 유라시아에 존재하던 샤먼의 전통과 결합되어 화려한 금관으로 재탄생했다.

신라에서 흑해 연안까지 서로 너무나 닮은 금관이 발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국가들이 등장하며 쓰게 된 화려한 금관은 그전에 샤먼이 쓰던 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샤먼은 중재자였지만 왕은 스스로 신이 되었다.

그들이 쓴 금관은 신과 소통하는 '와이파이'가 아니라 독점적 권력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과거의 왕들도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라 하늘의 대리인에 불과한 일종의 샤먼이었다.

3500년 전 중국 상나라의 왕은 정인貞人이라 불리는 점치는 사람들과 함께 매일 저녁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거북이 등딱지나 사슴의 어깨뼈로 점을 쳤다.

중국 한자의 기원인 갑골문이 바로 이런 점괘를 모은 것에서 시작했다.

점괘가 틀리기라도 하면 왕은 소위 '천명'을 받는 '와이파이'가 끊긴 것으로 간주되어 그 지위를 박탈당하기 일쑤였다.

 

국가가 점점 커지고 계급사회가 강해지면서 왕은 샤먼의 점 대신에 관료와 행정조직을 만들어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소통하던 샤먼의 관은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관으로 바뀌어서 권력을 세습하는 상징이 되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샤먼들

 

금관을 쓴 왕이 막강한 권력을 독점했다고 해서 샤먼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불교와 같은 거대 종교의 틈새에서 무속신앙의 형태로 여전히 살아남아 사람들과 함께했다.

최근 바이칼 호수  Lake Baikal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샤먼의 의식이 다시 부활했다.

나는 2014년 바이칼 근방의 툰카 Tunka라는 지역에서 열린 샤먼의 축제를 참관했다.

겉으로는 축제를 표방했지만, 사실 소련 시절의 혹독한 탄압을 이겨낸 부랴트족 Buryats의 샤먼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일환으로 마련한 행사였다.

 

샤먼이 신령한 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요란한 의식을 행해 신에 빙의가 된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샤먼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샤먼이 황홀경 상태에서 만나는 하늘의 신은 다름 아닌 그들의 조상이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조상의 입을 빌려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혜를 전하고, 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던 것은 샤먼 의식이 끝난 후에 보았던 샤먼의 모습이었다.

화려한 샤먼의 금관을 벗어버리고 북을 내려놓은 그들의 모습은 삶에 찌들고 왜소한, 너무나 평범한 우리의 이웃 부랴트족이었다.

힘들지만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외부의 탄압을 참아가며 샤먼의 직을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샤먼이 쓰고 있는 것은 화려한 관이 아니라 고통의 면류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샤먼이라는 풍습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 이유는 그들이 신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자손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과 생존 본능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샤먼의 관은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해서 전하는 '면류관'이었다.

신을 자처하며 면죄부를 팔아 사람들을 속이는 일부 종교 지도자, 자신만의 구원에 몰입되어 세상을 도외시하는 작금의 일부 그릇된 종교와는 다르다.

유라시아 전역에서 몇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코로나를 쓴 샤먼의 존재는 그들이 바로 생존을 위한 지혜를 얻고 앞날을 예측하려는 현생인류가 발휘한 지혜의 집적체였음을 증명한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구글 관련 자료

 

2024. 2. 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