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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정 이경윤 "사호위기도" "산수인물화첩" 본문

글과 그림

학림정 이경윤 "사호위기도" "산수인물화첩"

새샘 2024. 1. 29. 15:55

<말하는 것이 입이 아니라 손가락에 나타나 있네>
 

이경윤, 사호위기도, 16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124.2x72.0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어떤 사람은 선조宣祖를 조일전쟁(임진왜란)을 겪은 무능한 임금으로 평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인들은 선조 연간을 '목릉성세穆陵盛世'라며 그 문화적 성숙을 칭송하였다.
목릉은 선조의 능호다.
 
선조 시대에는 권율, 이순신 같은 장군은 물론이고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우계 성혼,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과 같은 문신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문장에는 간이당 최립, 글씨에서 석봉 한호, 그림에서 양송당 김시, 탄은 이정, 그리고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1545~1611)이 있었다.
남태응은 ≪청죽화사≫에서 학림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학림정의 그림은 고담한 가운데 정취가 있고 고상하고 예스러움이 있으면서 색태色態(곱고 아름다운 자태 즉 섹시함 sexy)도 있다.
또 십분 세련되어 거칠거나 엉성한 데가 하나도 없으니 진실로 화가의 삼매경에 든 분이라 할 수 있으며, 양송당과 비교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다."
 
학림정 이경윤은 성종의 아들인 이성군利城君의 종증손從曾孫(자기 형제의 증손자)이다.
조선시대 왕손의 경우 '종친불사宗親不仕'(왕의 8촌 이내 친족은 벼슬을 하지 않는다)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거나 실직에 나갈 수 없어 사회적 실천의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학림정은 그림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조선 중기 회화사에서 선비화가의 몫을 톡톡해 해냈다.
 
학림정의 그림은 한결같이 고아한 분위기에 품격이 높을 뿐만 아니라 기법이 뛰어나서 도저히 아마추어의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 프로의 면모를 보여준다.
더욱이 <사호위기도四皓圍碁圖>와 <학과 신선> 같은 대작도 남겼다.
 
<사호위기도>는 중국 상산常山의 네 늙은이가 바둑 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찍이 유복렬의 ≪한국회화대관≫과 이동주의 ≪한국회화소사≫를 통해 소개된 바 있으나 전시회에 출품되지 않아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이번에 작품을 실견해보니 가히 명성에 값하는 본격적인 산수인물도였다.
보존 상태도 아주 좋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구도가 안정되어 있고 바둑판에 모여 있는 네 늙은이의 몸동작과 표정이 정확하며, 흐드러진 운치를 보여주는 소나무, 거꾸러질듯한 산봉우리, 냇물의 표현이 조선 중기 절파화풍의 전형을 보여준다.
간결하면서도 고풍스런 멋이 학림정의 화격畵格(그림의 품격)이라 할 만하다.

화면 왼쪽 위에는 위창 오세창이 고증한 장문의 발문이 쓰여 있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중 욕서미서, 16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26.8x32.9cm, 호림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학림정의 그림은 당대부터 유명하여 많은 문인들이 그의 그림에 제시題詩를 남겼다.
노수신은 그의 ≪금강산화첩≫에 부치는 시를 지었으며, 훗날에는 숙종까지 제시를 썼다.
학림정의 화첩 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고사탁족도>가 들어 있는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채색이 가해진 화첩이 있다.
이밖에도 화첩과 편화 片畵(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 그림)들이 여럿 전한다.
 
그러나 학림정의 도서낙관이 명확히 찍혀있는 작품은 없다.

이는 당시의 그림 관행이 그러했기 때문인데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산수인물화첩≫은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던 간이당簡易堂 최립崔笠의 화제가 들어 있어 학림정 그림의 기준이 된다.

 
≪산수인물화첩≫은 총 21면이다.
그중 아홉 폭에 1598년 겨울과 1599년 초봄에 쓴 간이당의 찬시와 발문이 실려 있어 학림정의 40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간이당은 이 화첩의 첫 폭인 <시주도詩酒圖>란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장문의 글을 적었다.
 
"우리나라의 명화는 대부분 재능이 뛰어나 종실에서 나왔는데, 지금 세상에 전하는 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의 매죽이나 학림정 형제의 산수는 매우 우수한 작품에 속한다.
홍사문洪斯文이 북쪽에서 올 적에 학림정의 흩어진 그림들을 많이 수집해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며 화제를 부탁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인물을 묘사한 것이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났으니, 요컨대 모두가 범속한 풍모들이 아니었다.
나는 학림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인물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이당의 말대로 화첩 속의 인물들은 명확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인물의 표현에 주안점을 두어 배경은 소략한 필치로 분위기만을 나타내는 데 그쳤지만 의습선衣褶線(옷 주름선)은 날카롭고 몸동작도 정확하다.
남태응은 색태가 있다(sexy)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학림정이 어떤 마음으로 인물들을 그렸고, 각 인물들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아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고 하는 선비를 그린 작품에 간이당의 글이 없었다면 나는 이 그림을 그저 운치 있는 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선비를 그린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을 것이다.
간이당은 이 그림의 제목을 <욕서미서欲書未書>라고 하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글을 쓰면 아는 것 모르는 것 죄다 드러나니 (서이출분분지부지 書以出紛紛知不知)
쓰려고 하지만 아직 쓰지 않은 때가 좋구나 (오락자욕서미서시 吾樂子欲徐未書時)"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그림일 줄은 정말 몰랐다.

간이당의 가르침대로 화첩 속의 그림들을 보면 작품 속에 인생이 푸근히 들어 있어 인문적 가치가 확 살아난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중 유장자행, 16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26.8x32.9cm, 호림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동자에게 지팡이와 걸망을 들리고 떠나려는 사람을 다른 두 사람이 송별하는 장면을 그린 <유장자행有杖者行>이라는 그림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누구는 집 안에서 지팡이 짚고 (숙위장어가 孰爲杖於家)
누구는 마을에서 지팡이 짚는가 (숙위장어향 孰爲杖於鄕)
아니면 지팡이 안 짚은 사람은 집 안에 있고 (억무장자거 抑無杖者居)
지팡이 짚은 사람들만 길을 가는 것인가 (이유장자행여 而有杖者行與)"
 
이처럼 간이당의 그림 보는 눈은 여간 날카로운 것이 아니았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중 노중상봉, 16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26.8x32.9cm, 호림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길에서 두 노인이 만난 장면을 그린 <노중상봉路中相逢>은 이렇게 설명했다.
 
"말하는 것이 입이 아니라 손가락에 나타나 있고 (어자불형어구이형어지 語者不形於口而形於指)
듣는 것이 귀가 아니라 맞잡은 손에 나타나 있네 (청자불형어이이형어공 聽者不形於耳而形於拱)"
 
학림정 이경윤의 ≪산수인물화첩≫ 속 제시들을 보면 간이당 최립은 과연 선조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꼽힐 만했다는 감동을 준다.

그리고 이 화첩은 우리에게 옛 그림을 보는 눈은 그림의 됨됨이와 화가의 필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용까지 면밀히 읽어내야 그림을 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를 독화법讀畵法, 즉 '그림 보기'가 아니라 '그림 읽기'라고 한다.
 
그러나 간이당 같은 명문장가의 제시가 없는 그림을 간이당처럼 속속들이 읽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만 하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 2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