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8: 중세 팬데믹 페스트 본문
○나병과 페스트
모든 전쟁은 대규모의 인원 이동이 필수적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많은 병사들이 싸우고 뒤엉키고 승패가 날 때까지 근접 지역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이 나누는 것은 생사의 의지만이 아니다.
전염병도 적군과 아군 사이에, 또는 아군끼리 옮겨진다.
대규모 전쟁 후에는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모국에 전염병이 퍼져나간다.
중세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두 가지 전염병이 어김없이 발생했다.
첫째가 '나병癩病 leprosy'이다.
현재는 '한센병 Hansen's disease'이라 부르는 이 병은 서기전 600년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가 오래된 병으로 나병균(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 Mycobacterium leprae)이란 세균에 감염되어 발생한다.
원래 중세 서유럽의 작은 지역에 소규모로 존재했던 풍토병이었는데, 전쟁 후 십자군이 고국으로 돌아온 다음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해 사회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병의 진단이 정확하지 않았고, 다양한 피부병을 가진 사람들이 나병 환자로 오인받아 사회적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나병 환자만의 구별된 옷을 입어야 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방울을 달아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피하라는 신호를 주어야 했으며, 유럽 전역에 설치된 나환자 요양원에서 격리 치료를 받는 운명에 처해졌다.
또 다른 전염병은 엄청난 감염력과 치명률로 중세 유럽을 한방에 날려버린 '페스트 pest(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또는 Black Plague)'다.
예전 사람들은 모든 전염병을 페스트라 불렀기 때문에 진짜 페스트 즉 흑사병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확실하게 페스트로 생각되는 전염병에 대한 기록은 6세기 아프리카에서 등장한다.
아프리카의 페스트균은 교역선을 타고 500년대 중반 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영어 Justinian I) 황제(재위 527~565)가 다스리던 동로마에 도착해 치명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려면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동로마는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기록상 전체 사망자가 1억 명이었고, 하루에 1만 명씩 죽어나갔다.
이 페스트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Justinian plague'이라 불렸다.
그렇지만 의학의 역사,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페스트는 중세의 페스트다.
○중세 유럽 흑사병 - 팬데믹의 시작
1334년 원元나라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에 정체 모를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기 시작해 그 지역 인구의 90%가 사망했다.
원나라는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을 통해 서유럽과 무역을 활발히 하고 있었는데,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치명적인 전염병이 중앙아시아를 지나 킵차크 한국(킵차크 칸국)(김장한국金帳汗國) Kipchak Khanate으로 전해졌다.
킵차크 한국은 칭기즈 칸 Genghis Khan 사망 후 분열된 몽골 제국 5개 국 중 하나였다.
킵차크 한국은 1345년 크림 반도 Crimea Peninsula의 도시 페오도시야 Feodosia의 성벽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적의 성벽 방어가 단단해 공격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며칠 뒤 페오도시야는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성안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죽어나가자, 일부 상인들이 아수라장을 뚫고 성 밖으로 탈출하는 배에 올라탔다.
흑해 Black Sea와 에게해 Aegean Sea를 지나 이탈리아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 섬까지 운행하는 무역선이었다.
탈출에 성공한 상인들은 다행히 죽음을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가 시칠리아의 메시나 Messina 항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상인들을 포함한 선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것이 중세 유럽 흑사병 대유행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에서도 10만 명 이상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흑사병에 걸린 환자는 어떤 약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그럴듯한 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증상이 나타나고 3일을 못 버티고 사망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질병의 전염력이었다.
환자와 이야기하거나 환자의 옷, 또는 소지품만 만져도 병이 옮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환자가 발생하면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버리고 도망갔다.
환자는 방치된 채 쓸쓸하게 죽어갔다.
당시 과학자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했다.
파리 의대의 점성학(대학 교과목 중 하나였다) 교수들은 엄청난 이론을 내세웠다.
1345년 물병자리 성운 안의 행성들이 같은 황경(태양계 천체의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에 나란히 서 있는 천체 현상 때문에 기후변화가 유발되어 흑사병이 돌았다고 발표했다.
물론 오늘날의 지식으로 그들을 평가해선 안 된다.
주어진 상황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천체에 관심이 없던 일반 학자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원인을 찾았다.
당시 유럽은 교황이 두 명 나타나면서 분열되어 있었는데(서방교회 대분열), 이러한 신에 대한 불경 때문에 흑사병이 유행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흑사병의 과학적인 원인을 찾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부 광신도들은 흑사병을 피하기 위해 죄를 뉘추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하느님이 그 모습을 보고 분노를 거두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채찍질 고행단'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스스로 몸에 채찍질을 하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로 인해 흑사병의 전파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때로 배고픈 채찍질 고행단은 폭도로 돌변해 마을을 약탈하기도 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황당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흑사병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질병의 전파자를 찾아나섰다.
처음 원인 제공자로 지목된 사람은 '여행자들'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여행자들의 입국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검역법은 1377년 만들어졌고, 유럽 각국은 외국 여행자들을 40일간 격리했다.
검역법 quarantine law은 40을 뜻하는 프랑스어 '카랑트 quarante'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런데 왜 40일 간 격리했을까? 당연히 과학적인 근거는 없었다.
그저 40이 성경에서 시련과 인내를 상징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40일간 거친 황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으며, 노아의 대홍수 Flood of Noah도 40일간 비가 내렸다.
사회적 약자들도 흑사병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받아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마을에 있는 저능아들,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혼자 사는 여인들(마녀),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항상 핍박받은 유대인도 고난을 겪었다.
유럽인에 비해 유대인의 사망률이 높지 않아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악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가족의 사망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유대인을 몰살시킴으로써 풀었다.
후대의 연구자들은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흑사병에 적게 걸렸던 이유를 그들이 종교적인 관례로 손을 자주 씻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사실 인류가 손을 자주 씻게 된 것은 1870년대 즈음으로 본다(그 이전에는 의사들도 수술하기 전에 전혀 손을 씻지 않았다).
이러한 집단 광기 속에서도 흑사병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중세 유럽의 대학살
흑사병은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해 1년이 채 안 돼 제노바 Genova(영어 Genoa)와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된 흑사병은 1년이 지나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섬나라 영국에도 도착했다.
2년이 지나면서 노르웨이, 3년째에는 러시아까지 확산되었다.
흑사병으로 유럽 지역의 인구는 지역에 따라 1/3에서 1/2 규모로 감소했으며, 최소 7,500만 명, 최대 2억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가 심했던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의 경우 지역에 따라 그 지역 인구의 80%가 사망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의학자로서 고대 의학을 완성한 로마 제국의 갈레노스 Galenos(129~199?)가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신종 전염병 앞에 기존 의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들은 '흑사병 의사 Plague doctor'로 불렸다.
흑사병 발생 이전에 미처 자리를 잡지 못했던 젊은 의사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에 용병처럼 고용되어 신분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흑사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살리려 애썼다.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당연히 흑사병에 대응할 수 없었다.
흑사병 의사들이 했던 것은 환자들의 피를 빼내고(사혈瀉血 또는 정맥절개 bloodletting), 림프절이 부은 곳에 거머리를 올려 붓기를 빼주는 정도였다.
비록 그들이 환자들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유언을 들어주었으며, 사망자에 대한 기록을 남겨 후대에 도움을 주었다.
망토에 새부리 가면을 쓴 흑사병 의사들의 유명한 복장은 중세 의사들의 복장이 아니라 17세기 프랑스 의사 샤를 드 롬 Charles de Lorme이 디자인한 것이다.
가면에는 코로 숨을 쉴 수 있게 부리 끝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고, 부리 안쪽 공간의 짚에는 다양한 약제가 들어 있어 나쁜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필터 역할을 했다.
오늘날 KF94 마스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얼핏 보면 모양도 비슷해 보인다.
흑사병 의사들은 장갑과 망토로 손과 몸을 보호했는데, 특이한 것은 지팡이였다.
지팡이는 환자와 직접 접촉하지 않음으로써 감염을 예방하는 수단이었지만, 환자를 때리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흑사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환자들은 흑사병 의사가 휘두르는 지팡이에 맞고서라도 속죄 의식을 치르고자 했다.
흑사병 의사 중 가장 유명한 이는 16세기 점성술사이자 예언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였다.
그의 조언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은 '감염된 시체를 빨리 없애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사혈을 금지했는데, 아마도 피를 통한 전염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흑사병의 병리학
세균 bateria인 페스트균(흑사병균,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Yersinia pestis)은 벼룩의 몸 안에서 자란다.
열대쥐벼룩(제놉실라 케오피스 Xenopsylla cheopis)이라는 벼룩의 몸 안에서 페스트균이 번식해 세균 덩어리로 뭉쳐진다.
세균 덩어리에 의해 위장이 막힌 벼룩은 계속 배고픔을 느껴 주변에 돌아다니는 쥐의 피를 엄청나게 빨아들인다.
하지만 위장이 막혀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피를 토하고, 토한 피가 쥐의 오염된 상처나 혈관으로 들어가 쥐를 감염시킨다.
중세 유럽의 생활환경은 매우 불결했다.
어디서나 쥐와 벼룩이 돌아다녔다.
흑사병에 걸린 쥐의 피를 다른 벼룩이 빨아 감염되고, 감염된 벼룩이 사람을 물면 사람도 감염되었다.
그리고 감염된 사람은 또 주변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일반적으로 병원체가 숙주를 너무 심하게 공격하면 숙주가 빨리 사망하기 때문에 오히려 질병이 널리 퍼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병원체에게도 좋지 않다.
따라서 병원체는 숙주가 너무 빨리 죽지 않도록 강도를 조절하고, 결국 전염병의 치명률이 저절로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흑사병은 왜 이렇게 치명적이었을까?
그것은 인간 이외에도 병을 퍼뜨리는 다른 숙주들(벼룩과 쥐)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질환은 전염병의 폭주를 제어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무섭다.
인체로 들어온 페스트균은 림프관을 타고 가까운 림프절을 감염시켜 림프절이 여기저기 부풀어 오르는 특징적인 증상이 나타난다(림프절페스트 또는 가래톳페스트).
페스트균이 호흡기로 들어오면 폐렴 형태의 흑사병이 생기는데(허파페스트 또는 폐페스트), 감염된 사람의 기침으로 막대한 양의 페스트균이 공기 중으로 살포된다.
이를 통해 벼룩과 쥐를 통하지 않은 사람 간의 직접 전파가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페스트균이 혈액 속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가장 치명적이다.
페스트균이 내뿜는 독소가 우리 몸의 정상적인 혈액 응고 과정을 파괴해 온몸의 혈액이 굳어 뭉치고 중심 조직이 썩게 된다.
여기까지 이르면 사람의 몸이 까맣게 썩어가며 죽게 된다.
페스트의 어원은 라틴어 '페스티스 pestis'다.
앞서 말한 대로 페스트 pest란 원래 전염병을 뜻하는 단어였으나 중세 때 흑사병의 충격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아예 흑사병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흑사병에 걸리면 온몸이 까맣게 썩으면서 죽기 때문에 영어로 'Black plague', 동양권에서는 '흑사병黑死病'으로 지칭한다.
흑사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행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첫째는 나쁜 공기나 체액에 의해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병원체에 의해 병이 생긴다는 '본체론적 질병관'이 자리를 잡아야 했다.
둘째는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있어야 했다.
1676년 네델란드의 레벤후크 Leeuwenhoek가 현미경으로 세균을 발견하고도 150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각종 질병의 원인인 미생물들이 발견되었다.
흑사병의 원인균도 그중 하나다.
1894년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예르생 Alexandre Yersin이 흑사병 병원체인 페스트균을 발견했고, 곧이어 페스트균이 어떻게 사람에게 감염되는지도 밝혀졌다.
1898년 프랑스 학자 폴-루이 시몽 Paul-Louis Simond은 페스트가 유행하는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집에서 죽은 쥐를 발견하면 집까지 버리고 도망가곤 했는데, 이것은 죽은 지 24시간 이내의 쥐와 접촉한 사람들이 페스트에 걸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몽은 쥐에 있는 벼룩이 페스트 전염의 원인임을 직감하고 동물 실험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렇게 페스트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
○중세 흑사병이 남긴 것들
페스트로 교회의 권위는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성직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공포의 질환 앞에서 도망가기 바빴고, 남아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 했던 일부 성직자도 허망하게 질병에 희생되었을 뿐이다.
일반인과 다를 것 없이 성직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자 '신의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겨났다.
새로 충원된 성직자들은 기존 성직자들에 비해 경험이 적고 자질이 부족해 교회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전염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시절, 신도들을 모두 불러 기도로 질병을 극복하려 했던 성직자들의 노력은 집단 사망자만 늘어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정부기관을 포함한 온갖 사회기구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의사와 돌팔이의 기준조차 사라졌다.
페스트로 인구가 급격하게 줄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귀해졌다.
임금이 오르고 농민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했다.
귀족들의 논밭을 관리해주던 농노가 사라지고, 스스로 논밭을 경작하거나 임대해 경작하는 자작농과 소작농들이 생겨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세의 봉건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이처럼 크나큰 재앙이었던 페스트는 중세의 큰 축이었던 종교와 봉건제도를 무너뜨려 역설적으로 르네상스의 발판을 만들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전염병에 의해 중세가 갑자기 각성했다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중세를 의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갈레노스 의학'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아랍 의학자들에 의해, 그리고 중세 수도원 의학자들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다음 시대의 의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갈레노스 의학의 빈틈과 오류를 조금씩 발견했다.
이런 상황에서 흑사병에 의해 갈레노스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의학 이론의 무능함이 강력하게 드러나자 근대 의학 이론이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긴 중세가 끝나가면서 종교에 억눌렸던 인간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참혹한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인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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