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3: 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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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3: 중

새샘 2024. 1. 18. 09:55
중세 유럽 주요 대학의 분포와 설립 시기(사진 출처-출처자료1)

 
중세 전성기의 중요한 지적 업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되 상이한 네 분야로 나뉜다.

즉, 초등교육과 평신도 문자 해독률의 확대, 대학의 등장과 확대, 고전 지식 및 이슬람 지식의 획득, 새로운 철학 및 신학 사상의 발전이 그것이다.

이런 업적은 하나하나가 서유럽 학문의 역사에서 중세 전성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입증해준다.
이 모든 업적이 합쳐져서 유럽 지성사의 비범한 한 시대가 출발했고, 그것은 17세기 과학혁명까지 지속되었다.
 
 

◎학교의 발달

 
800년 무렵 샤를마뉴 Charlemagne(라틴어: 카롤루스 마그누스 대제 Carolus Magnus the Great)(재위 768~814)는 제국 내의 모든 주교관구와 수도원에 초등학교의 설립을 명했다.
이 명령이 완전히 시행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 시대(751~843)에 많은 학교가 설립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바이킹의 침입으로 이 학교들의 존속이 위태로워졌다.
일부 수도원과 주교좌 도시에서 초등교육이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1050년 무렵까지 유럽에서 교육의 기회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동시대인들도 놀랄 정도였다.
프랑스의 한 수도사는 1115년에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자랄 때인 1075년 무렵엔 "교사가 워낙 귀해서 시골 마을에는 전무하다시피 했고, 도시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는데" 어른이 된 다음에는 "수많은 학교들"이 생겨나면서 문법 공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술회했다.

12세기 중세 전성기의 경제 부흥, 도시의 성장, 강력한 정부의 출현 등으로 유럽인은 전에 없이 기쵸교육에 힘쓸 수 있었다.

 
중세 전성기의 교육열은 단지 학교가 늘어났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학교의 성격에 변화가 있었고, 시일이 지나면서 교과과정과 교육 수혜대상에도 변화기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는 12세기에 들어 수도원이 외부인을 교육하던 종래의 관행을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과거에 수도원은 수도사가 아닌 소수의 특권층 자제에게 읽기를 가르쳐왔다.
외부인이 달리 갈 만한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여럿 등장했다.
이제 유럽 교육의 중심은 성장을 거듭하던 여러 도시에 소재한 성당 학교가 맡게 되었다.
1179년 교황 군주국가는 모든 성당에게 수입금 일부를 별도로 편성해 교사 한 명을 채용하도록 하고, 그 교사로 하여금 빈부 차별 없이 모든 희망자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조치을 취함으로써 교육 발전을 적극 지원했다.,
교황은 이러한 조치로 우수한 자질의 성직자와 관료를 늘릴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애당초 성당 학교는 거의 전적으로 사제의 기초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고, 교과과정도 교회의 기본적인 예배를 집전하는데 필요한 문자해독능력을 기르도록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100년 직후 교과과정이 확대되었다.
교회 및 세속 정부의 발달과 더불어 기도문 몇 개를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 이상의 능력을 갖춘 숙련된 관료가 점점 더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키케로 Cicero와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영어 Virgil)의 작품을 비롯한 로마 고전 작가들에 대한 학습을 바탕으로 라틴어 문법과 작문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일부 학교들은 철학 특히 논리학의 학습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는데,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Aristotle)와 포르피리오스 Porphyrios(영어 Porphyry) 같은 고전 저술가에 의존했다.

고전 문학과 철학 텍스트에 대한 이런 새로운 관심을 학자들은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1200년 무렵까지 도시 성당 학교의 학생은 대부분 성직자였다.
사제가 아닌 법률가나 관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일단의 교회의 직분을 갖고 있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후 학교에 입학한 학생 가운데 성직자도 아니고 장차 성직에 남을 생각도 전혀 없는 사람의 숫자가 증가했다.
그중 일부는 상류 계층 자제로서, 그들은 이제 문자해독능력을 신분의 상징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다른 부류는 서기(공문서 작성자), 토지 관리인, 상인 등의 지망생으로서 그들은 직업적인 성공을 위해 문자해독 및 산술 능력을 필요로 했다.
통상 이들은 성당 학교가 아닌 좀 더 실용성에 치중하는 학교에 다녔다.
이런 학교는 13세기를 경과하면서 급속히 성장했고 교회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들 학교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도 대개 속인 가운데서 모집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서 종전의 라틴어에 의한 강의 대신 유럽 각국어에 의한 강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입학 자격은 남성에 국한되었다.
일부 속인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은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속인 교육의 발달은 서유럽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회가 교육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하면서 교육의 지향과 목적은 점점 세속화되었다.
평신도는 새롭고도 비종교적인 탐구를 할 수 있었고, 점차 유럽 문화는 전 세계 다른 어떤 문화보다 종교 및 종교에 결부된 전통주의로부터 독립성을 누리게 되었다.
학교의 성장은 또한 속인의 문자 해독률을 크게 향상시켰다.
1340년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 인구의 약 40퍼센트가 글을 읽을 수 있었고, 15세기 말 잉글랜드 전체 인구 가운데 약 40퍼센트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1050년 무렵 서유럽에서 문자 해독 가능자는 거의 성직자에 국한되어 있었고 문자 해독률도 서유럽 전체 인구의 1퍼센트 미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혁명이 일어났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유럽인이 이룩한 많은 다른 업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의 등장

 
대학의 등장은 중세 전성기 교육열의 일부였다.
원래 대학이란 성당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고급 학문―인문학(리버럴 아츠, 자유학) liberal arts과 전문 연구 분야인 법학, 의학, 신학―을 가르치기 위한 기관이었다.
최초의 이탈리아 대학은 볼로냐 대학 University of Bologna으로서 12세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볼로냐 대학에서는 인문학도 가르쳤지만, 이 대학은 12세기에 처음 설립된 이래 중세가 끝날 때까지 유럽의 법학 연구 중심지로서 명성을 떨쳤다.
알프스 이북에서 최초로 설립된, 그리고 가장 뛰어난 대학은 파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영어 University of Paris)이었다.
파리 대학은 다른 많은 대학들이 그렇듯이 성당 학교에서 출발했지만, 12세기에는 북유럽 지적 생활의 중심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파리 대학의 학자들이 강력한 프랑스 왕권이 제공하는 평화와 안정―학문 연구의 필수조건이다 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파리 인근 지역의 농업생산성이 높아 식량 사정이 좋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12세기 전반에 파리 성당 학교가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학자이자 논객으로서 흔히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에르 아벨라르 Pierre Abélard(1079~1142)를 자랑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유포되었던 근거가 다소 의심스런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강의가 어찌나 대단한 명강의로 소문이 났던지 그의 신학적 입장이 물의를 일으켜 프랑스 '땅'에서 강의하는 것이 금지되자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가 강의했는데, 그의 강의를 듣고자 학생들이 그 아래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 이러한 프랑스 '공중'에서의 강의마저 금지되자 이번에는 강에 배를 띄어 물 위에서 강의하자 학생들이 강둑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아벨라르의 학문적 명성에 힘입어 많은 다른 교사들이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파리 성당 학교는 프랑스의 그 어떤 성당 학교보다 다양하고 수준 높은 강의를 제공했다.
바야흐로 1200년에 이르러 파리 성당 학교는 인문학과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공부한 바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재위 1198~1216)는 파리 대학을 '전 세계를 위해 빵을 굽는 오븐'이라고 비유했다.
 

강조해 둘 것은 대학 제도가 사실상 중세의 발명품이었다는 점이다.

'대학 university'이란 말은 원래 조합이나 길드를 의미했고, 중세 대학은 교사나 학생이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한 교사조합 또는 학생조합이었다.
그러나 대학이란 말은 점차 인문학을 가르치는 학부와, 법학·의학·신학과 같은 전공 분야 중 하나 이상의 학부를 구비한 교육기관을 뜻하게 되었다.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은 1200년 이전에 설립되었고, 13세기에는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 케임브리지 대학 University of Cambridge, 몽펠리에 대학 University of Montpellier, 살라망카 대학 University of Salamanca, 나폴리 대학 University of Naples 같은 유명 교육기관이 설립되거나 공식 인가를 받았다.
 
중세 유럽의 모든 대학들은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의 두 모델 중 하나를 택했다.
이탈리아, 에스파냐, 남부 프랑스 일대에서 표준이 되었던 대학은 대체로 볼로냐 대학이었다.
여기서는 학생이 조합을 결성했다.
학생조합은 교사를 채용하고 그들에게 봉급을 지불했으며, 직무에 태만하거나 강의가 시원찮은 교사를 해고하거나 벌금형에 처했다.
북유럽의 대학은 파리 대학을 모델로 삼았다.
북유럽의 대학은 파리 대학을 모델로 삼았는데, 파리 대학은 학생조합이 아닌 교사조합이었다.
파리 대학에는 4개의 학부―문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가 있었고, 각 학부는 학장이 통솔했다.
북유럽 대부분의 대학에서 중심이 된 분야는 문학과 신학이었다.
13세기 말 이전에는 파리 대학 내에 독립된 학료學寮(칼리지) college가 설치되었다.
학료는 본래 가난한 학생들에게 제공된 주택이었지만, 나중에는 주거지뿐만 아니라 교육시설로 활용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런 형태의 학료가 대부분 소멸되었지만,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은 여전히 파리 대학을 본뜬 학료들의 연합 조직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학료들은 각기 반독립적인 교육 단위이다.
 
현대의 대학 조직과 학위 제도는 대부분 중세의 제도에서 유래되었지만 실제의 학업 과정은 크게 변화되었다.
중세의 교과과정에는 역사학이나 오늘날의 사회과학 같은 것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세의 대학생은 대학 입학 전에 라틴어 문법을 완전히 익혀야만 했다.
라틴어 문법은 초등학교―또는 문법학교―에서 공부했다.
대학 입학은 남성에게만 허용되었으며, 일단 입학하게 되면 약 4년 동안 인문학들, 즉 라틴어 문법 및 수사학의 상급 과정을 이수하고 논리학을 완전히 습득해야만 했다.
시험에 통과하면 예비적으로 문학사―오늘날의 문학사 Bachelor of Arts, B.A.)의 원형에 해당 학위를 받았고, 전문가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려면 몇 년을 더 공부해서 상급 학위―문학 석사 Master of Arts, M.A.) 학위 또는 법학, 의학, 신학의 박사 학위―를 받아야 했다.
문학 석사 과정은 표준적인 고전 저작―에우클레이데스 Eucleides,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의 저술―을 읽고 논평함으로써 이수되었다.
박사 학위를 받을려면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신학 박사 학위가 특히 힘들었다.
중세 말기 파리 대학의 신학 박사 학위 과정은 문학 석사 학위를 얻기 위해 약 8년을 소요한 뒤 추가로 12년이나 13년을 더 공부해야만 했다.
그 기간 내내 학교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40세 이전에 신학 박사가 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실제로 학칙으로 35세 이전에는 누구에게든 학위를 수여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박사 학위―의학 박사의 경우도―는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인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학의 모든 학위는 학식의 기준으로 인식되어 학문의 길을 걷지 않을 사람에게도 하나의 관문처럼 되어버렸다.
 
중세의 대학생활은 매우 난폭하곤 했다.
대학 공부를 시작하는 나이가 12살에서 15살 사이였던 까닭에 대부분의 학생은 미성년자였다.
더욱이 모든 대학생은 대학이 인근 주민들과는 다른 독립적·특권적 공동체를 이룬다고 믿었다.
주민은 학생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 했고, 학생은 본시 시끄러운 것이 자연적 성향인지라 빈번히 폭동이 일어났고 때로는 주민과 학생 사이에 격렬한 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의 공부는 매우 철저했다.
학문에서 권위의 가치가 크게 강조되었고 책값이 엄청나게 비쌌기에(책은 보통 양피지에 손으로 쓴 필사본이었다), 엄청난 분량을 기계적으로 암기해야만 했다.
학생에게는 학업의 진전과 더불어 공식적·공개적으로 토론을 벌일 수 있는 기량의 연마가 요구되었다.
고급 과정의 토론은 대단히 복잡하고 추상적이어서 때로 여러 날 동안 계속되곤 했다.
중세 대학생과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1250년 무렵 이후 대학생의 숫자가 대단히 많아졌다는 점이다.
13세기에 파리 대학은 매년 약 7,000명 정도의 학생 수를 유지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은 매년 약 2,000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농민이나 직공보다 상위 신분의 유럽인 남성 가운데 상당수가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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