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3: 중세의 지적 부흥 2-고전 학문의 회복, 스콜라 철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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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3: 중세의 지적 부흥 2-고전 학문의 회복, 스콜라 철학

새샘 2024. 1. 31. 23:53

◎고전 학문의 회복

 

중세 전성기에는 각급 교육기관에서 교육받는 인구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질 또한 향상되었다.

학문 수준이 향상된 것은 그리스의 지식을 다시 받아들이고 무슬림이 이룩한 지적 성과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서유럽인 가운데 그리스어나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에,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된 저작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1140년 무렵 이전에는 라틴어 번역물이 극히 드물었다.

12세기 중반 이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논리학 저술 몇 권만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2세기 중반부터 갑자기 번역 사업이 활발해졌고, 급기야 고대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 지식 대부분이 서유럽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번역 작업이 주로 행해진 곳은 에스파냐와 시칠리아였다.

왜냐면 그곳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아랍어 사용자 또는 라틴어 및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아는 유대인들과 매우 가깝게 살았으므로 번역 작업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고전 저작들은 처음에는 기존의 아랍어 번역본에서 라틴어로 중역되다가 차차 그리스 원전이 직접 번역되었다.

이런 원전의 직접 번역은 그리스어 사용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리스어를 습득한 소수의 서유럽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260년 무렵에는 오늘날 알려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거의 전부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에우클레이데스 Eukleides(영어: 유클리드 Euclid)(기하학), 갈레노스 Galenos(영어: 갈렌 Galen)(의학),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us(영어: 톨레미 Ptolemy)(천문학)의 기본 저작도 번역되었다.

그러나 플라톤 Platon(영어 플레이토 Plato)의 저작은 아직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고, 고전기 그리스인의 시인과 극작가의 작품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대체로 이들 작품은 비잔티움 Byzantium 사람들―그들은 행여 이 저작들이 유출될까봐 노심초사했다―의 소중한 문화재로서 조심스럽게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학자들은 그리스 사상에 덧붙여 아비세나 Avicenna와 아베로에스 Averroes 같은 이슬람 철학자와 과학자의 업적에도 친숙하게 되었다.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 사상과 철학 사상의 진수를 습득한 서유럽은 그 바탕 위에서 독자적인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달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자연과학의 경우 서유럽인은 큰 어려움 없이 기왕에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교리와 배치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13세기 유럽 최고의 과학자는 잉글랜드인 로버트 그로스테스트 Robert Grosseteste(1175?~1253)였다.

그는 그리스어에 매우 능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전체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수학·천문학·광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진보를 이룩했다.

그는 무지개에 관한 정교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했고, 물체를 확대해서 보기 위해 렌즈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로스테스트의 수제자는 로저 베이컨 Roger Bacon(1214~1294)이었다.

베이컨은 오늘날 그의 스승보다 더 유명한데, 그가 자동차와 비행기의 출현을 예견한 것으로 여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기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베이컨은 오히려 그로스테스트가 광학 부문에서 이룩한 업적을 계승해 렌즈의 성질, 빛의 속도, 시각視覺의 본질 등에 관해 설명했다.

그로스테스트, 베이컨,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에서 활동한 그들의 몇몇 추종자들은 감각적 증거에 근거하는 경우 자연에 관한 지식이 추상적 이성보다 더욱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근대과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험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스콜라 철학

 

중세 전성기 그리스 철학 및 아랍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스콜라 철학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다.

스콜라 철학(또는 스콜라주의) scholasticism이란 말은 여러 갈래로 정의할 수 있다.

어원적으로 볼 때 스콜라 철학은 중세 학교에서 행해진 교수 방법 및 학습 방법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스콜라 철학이 대단히 조직적이며 권위를 존종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은 단지 연구 방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스콜라 철학은 동시에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적으로 즉, 경험이나 이성에 의해 얻을 수있는 지식과 신의 계시에 의해 알려진 지식은 근본적으로 양립이 가능한 것이었다.

중세 신학자들은 그리스인이 자연 지식에서의 스승임을, 그리고 모든 계시는 성서 안에 담겨 있음을 믿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스콜라 철학은 고전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조화시키는 이론이자 실제였다.

 

 

○피에르 아벨라르

 

그 자신은 아직 온전히 스콜라 철학자가 아니었지만 스콜라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은 가장 중요한 사상사 중 하나는 논쟁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 Pierre Abélard(1079~1142)였다.

그는 12세기 전반에 파리 일대에서 활동했다.

지식인(가르치는 일을 부업으로 하는 성직자나 지식을 추구할 목적을 갖지 않은 학교 교사와 구분된다)으로서의 생애를 의식적으로 추구한 최초의 서유럽인이었던 아벨라르는 논리학에 어찌나 능통했던지, 일찍이 학생 시절부터 당대 일급의 전문가인 스승들―그들이 아벨라르의 교사가 된 것은 불운이었다―을 무색케 만들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사려 깊게 그러한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겠지만, 아벨라르는 달랐다.

그는 공개토론에서 상급자들에게 대놓고 굴욕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일이 복잡하게 얽히느라 아벨라르는 자신이 개인 교습을 하고 있던 엘로이즈 Heloise라고 하는 재능 있는 여성을 유혹했다.

엘로이즈가 임신하게 되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희망과는 반대로) 그녀와의 결혼을 결행했다.

두 사람은 엘로이즈의 장래를 위해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엘로이즈의 삼촌을 분노케 만들었다.

왜냐면 그는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시켜 아벨라르를 거세시키는 것으로 가문의 명예를 위한 복수를 했다.

수도사가 되어 수도원에 도피한 아벨라르는 곧 적들이 자신의 사상을 이단으로 몰기 위해 공작을 꾸미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시끄럽고 논쟁적인 성격이었던 아벨라르는 수도원에서도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두 군데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다툼을 벌인 끝에 갈라섰으며, 그 후 1132~1141년 파리에서 교사로 정착함으로서 세속 생활로 복귀했다.

그때가 그의 생애에서 절정기였다.

그러나 1141년 그는 다시 한 번 이단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기소자는 당시 영향력이 막강했던 성 베르나르두스 St. Bernardus였다.

아벨라르는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당했다.

얼마 후 이 핍박받던 사상가는 자신의 입장을 공공연히 철회하고 은퇴했으며 1142년에 사망했다.

 

아벨라르는 ≪나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 Historia Calamitatum≫란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수많은 시련을 저술했다.

이 글은 서유럽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us(영어: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의 ≪참회록 The Confessions≫ 이후 등장한 최초의 자서전에 속한다.

처음 읽으면 이 책은 매우 근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중세 그리스도교적인 겸손의 미덕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벨라르가 자신의 불행을 저술한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전정한 의도는 범죄를 행한 부위에 입은 육체적 손상을 통해 자신의 호색에 가해진 징벌, 그리고 첫 번째 정죄 뒤 그의 저술들이 불태워짐으로써 그의 지적 오만에 가해진 징벌이 정당함을 인정하고 도덕적으로 반성하는 데 있었다.

아벨라르는 ≪너 자신을 알라 Ethica or Scito Te Ipsum(영어: Know Yourself)≫는 제목의 윤리학 저서에서 인간의 동기에 관한 진지한 내적 성찰과 분석을 촉구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기중심주의를 권유하려 했다기보다는, 내적 성찰을 통해 인간성을 차분히 들여다보고자 했던 12세기의 뛰어난 사상가들(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성 베르나르두스도 그들 중 하나였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벨라르는 ≪긍정과 부정 Sic et Non(영어: Yes and No)≫을 비롯한 수많은 독창적인 신학 저작들을 통해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긍정과 부정≫에서 아벨라르는 150개의 신학적 문제에 대한 교부들의 상반되는 주장을 수집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마련했다.

한때 이 저작은 오만한 아벨라르가 교회 당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라고 여겨진 적도 있었지만, 사실을 그 정반대였다.

아벨라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신중한 연구 방법을 출발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심스런 연구 방법을 통해 성경의 최고 권위에는 오류가 없으며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권위자들이 실제로는 상호간에 일치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후대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권위 있는 전거에 서술된 답변을 열거하는 그의 신학 연구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긍정과 부정≫에서는 자신의 결론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쓴 독창적인 신학 저작들에서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저작들에서 그는 신학을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그리고 신학에 자신의 장점인 논리학이라는 도구를 적용시킴으로써 신학을 마치 과학처럼 다루고자 했다.

그는 심지어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논리학을 적용시켰는데, 이 같은 부절제는 그가 정죄 당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피에르 아벨라르는 종교를 합리주의와 조화시키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였다.

 

 

○스콜라 철학의 승리

 

아벨라르 사후 이루어진 두 가지 발전 과정은 성숙한 스콜라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했다.

하나는 아벨라르의 제자인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Petrus Lombardus(1100?~1160)가 1155~1157년에 저술한 ≪네 권의 명제집(또는 명제집) Libri Quattuor Sententiaurm(영어: The Four Book of Sentences≫이었다.

이 책은 모든 신학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질서정연하게 제기하고 성서 및 교부들로부터 각 문제에 대한 양측의 답변을 제시한 다음 모든 주장에 대한 평가를 시도했다.

13세기에 이르러 페트루스 콤바르두스의 저작은 표준적인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대학 내에 공식적으로 신학교가 설립되자 모든 신학박사 지망생에게 이 책에 대한 연구 및 주석이 요구되었다.

신학자들 역시 저술 과정에서 이 책에 제시된 조직적 절차를 따르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콜라 철학의 방법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과정에서 또 하나의 근본적인 단계는 앞서 언급했듯이 1140년 무렵 이후에 이루어진 고전 철학의 재수용이었다.

아마로 아벨라르는 그리스 사상에 의지할 수 있었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그리스 저작이 거의 번역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후의 신학자들은 그리스 지식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및 그에 대한 아랍인 주석자들의 저술을 완벽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1250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철학 문제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로 간주되어, 아리스토텔레스를 단지 '철학자 the Philosopher'라고만 불렀다.

13세기 중반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방법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리스와 아랍의 권위자들을 마치 그들이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권위자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종래 분리되었던 신앙과 자연 지식의 두 영역을 가장 완벽하게 조화시킨 지식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

 

ㅇ대표적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D%86%A0%EB%A7%88%EC%8A%A4%20%EC%95%84%ED%80%B4%EB%82%98%EC%8A%A4)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은 파리 대학의 대표적인 스콜라 철학자 이탈리아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1225~1274)였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Dominican Order 수도사였던 성 토마스는 신앙이 이성으로 옹호될 수 있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연계에 대한 지식 및 피조 세계에 대한 연구를 신학적 지혜에 접근하는 정당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자연'은 '은혜'를 보완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말의 뜻은 비록 최고의 진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지만, 자연계를 창조한 분은 신이기 때문에 자연을 통해서도 신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경험에 대한 깊은 확신을 지녔던 토마스는 성인 가운데 가장 온화한 인물이었다.

파리 대학 등지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그는 논쟁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은 채 조용히 두 권의 방대한 신학 저작, 즉 ≪이단 논박 대전(또는 이교도 대전) Summa contra Gentiles(영어: On the truth of the Catholic Faith)≫과 ≪신학 대전 Summa Theologica(영어: Summary of Theology)≫을 집필하는 데만 몰두했다.

그는 이 저작들을 통해 신앙을 가장 확고한 토대 위에 놓기를 소망했다.

 

성 토마스의 방대한 두 권의 ≪대전≫은 그 질서정연함과 지적 통찰로 인해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인간의 지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삼위일체나 성육成肉 incarnation(또는 강생降生: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의 교리 같은 '신앙의 신비'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밖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례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불과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 원리에 철저히 종속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적·신학적 체계를 구축했다.

학자들은 이 체계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 인간의 현세적인 삶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인간 스스로가 관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성 토마스는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인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는 그가 이룬 지적 업적이 기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와 인간의 경험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성 토마스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면,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의 철학은 토마스주의(토미즘, Thomism: 성 토마스의 작품과 사상의 유산으로 탄생한 철학 및 신학 학파) 방법, 교리, 원리에 입각해 가르쳐지고 있다.

 

 

○서유럽 중세 사상의 절정

 

13세기 중반에 성취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과 더불어 서유럽 중세 사상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중세 문명의 다른 국면들이 같은 무렵 절정에 도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루이 9세 Louis IX(재위 1226~1270)의 지배 아래 평화와 번영의 완숙기를 구가했으며, 파리 대학은 그 기본 조직을 확고히 했고 프랑스의 위대한 고딕 성당들은 이 시기에 건축되었다.

일부 열렬한 중세 문화 예찬자들은 이런 업적에 주목해 13세기를 '가장 위대한 세기'라고 부른다.

그러한 판단은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중세인의 삶이 여전히 너무나 고달팠고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요구가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으므로 과거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찬사는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 판단이 어떻게 내려지든 간에 중세의 지적 생활에 대한 일부 그릇된 인상을 시정하는 것으로 이 절을 마루리 짓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는 흔히 중세의 사상가들이 대단히 보수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중세 전성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데 놀라우리만큼 적극적이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서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회의는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 밖의 주제에서는 그리스인과 아랍인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잇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과거에 수용된 다른 어떤 사상과도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성주의를 강조하고 자연의 근본적인 선함과 목적성을 강조했다―을 고려할 때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토록 신속히 받아들인 것은 '철학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또 다른 그릇된 인상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권위의 구속을 크게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 토마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앙의 신비에 관한 계시를 기록한 성서 본문 인용을 제외하면) 권위 있는 저작의 본문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논란을 매듭짓는데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권위 있는 전거는 무엇이 가능한지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제시될 뿐이었다.

진리를 입증하는 것은 결국 이성과 경험이었다.

끝으로 스콜라 철학은 '반反휴머니즘적'이었다고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물론 스콜라 철학자들은 육체보다 영혼에, 현세의 삶보다 내세의 구원에 우위를 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영광스런 신의 창조물로 찬양했으며 인간과 신의 동역同役(일을 함께  수행함)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