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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나라를 찾아서

새샘 2024. 3. 6. 22:11

스키타이 Scythia를 비롯한 유라시아 유목민의 황금은 전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서 해외 전시를 주로 하는 대표적인 황금 유물이기 때문이다.

이 스키타이의 황금 유물은 지금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 소련 시절인 1991년에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한소수교 1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전시회였다.

당시 소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에 있는 예르미타시 박물관 Hermitage Museum이 소장한 황금을 중심으로 203점을 전시했는데 냉전의 시대였던 당시로선 상당한 파격이었다.

이 전시회는 한달이 좀 넘는 전시 기간 동안 15만 명 가까운 사람이 찾아 큰 호응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전시회가 폐막되고 한달 후에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소련과 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회 전시가 된 셈이다.

 

한국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카자흐스탄 Kazakhstan, 우크라이나 Ukraine 등 러시아뿐 아니라 다양한 나라에서 기획한 황금 유물전이 심심치 않게 열린다.

도대체 유라시아 어디에 황금의 나라가 있기에 이렇게 많은 황금 유물전이 열리는 것일까.

 

 

○표트르 대제가 지켜낸 시베리아의 황금 유물

 

니콜라스 비천 Nicolaas Witsen의 Noord en Oost Tartarye(North and East Tartary 북부 및 동부 타타르)에 수록된 타타르인 Tatars의 황금 유물 그림. '표토르 대제 시베리아 컬렉션'을 그린 것으로 유럽에 시베리아의 황금 유물을 최초로 알린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은 1692년에 출간되었지만 이 그림은 비천이 사망한 뒤인 1705년에 새롭게 증보된 책에 수록되어 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시베리아 Siberia 초원에서 살던 유목민들이 남긴 황금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는 제정帝政러시아 Imperial Russia를 근대화하고 유럽의 강국으로 발전시킨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1672~1725)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20대 후반인 1698년 네델란드 Netherlands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유럽의 문물을 보았고, 이때 막 서양에서 생기기 시작한 박물관들도 처음 접했다.

당시 코사크인 Cossacks(코사크 Cossack는 카자흐 Kazakh의 영어 표현이며, 지금은 '카자흐인 Kazakhs'이라 부른다)들은 시베리아로 가 경쟁적으로 황금을 찾아다녔다.

사금이 풍부한 강을 찾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곧 초원에서 더욱 손쉽게 황금을 찾는 법을 알아냈다.

바로 유목민들의 쿠르간 kurgan(무덤)을 도굴하는 것이다.

그들은 황금 유물을 꺼내고 시신에 붙어 있는 금장식들을 떼어냈다.

이미 17세기 말부터 서양의 골동품 시장에는 시베리아에서 나온 유물들이 거래되고 있을 정도였다.

사실 시장에 나온 시베리아 유물은 일부에 불과했고, 더 많은 유물들이 금화로 만들어져서 모스크바 Moscow의 궁정으로 실려 갔다.

 

시베리아에서 세금으로 받아오던 금화가 유목민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표트르 대제는 시베리아 전역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신기하게 생긴 돌, 사람이나 동물의 뼈, 옛 명문銘文(새겨 놓은 글)이 있는 돌비(석비石碑), 예사롭지 않은 옛날 무기, 그릇 등 오래되고 범상치 않은 유물들을 헌상獻上(임금에게 바침)할 것" 그리고 "무덤을 도굴해서 금제 유물들을 훔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차르 tsar(제정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의 칙령에 놀란 시베리아의 총독 마트베이 가가린 Matvey Gagarin은 사방의 고분을 도굴해 모은 황금 유물을 몇 차례에 걸쳐서 표트르 대제에게 헌상했다.

시베리아 초원에서 발굴된 최고급 황금 유물들이 차곡차곡 궁궐에 쌓였고, 지금의 유명한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표트르 대제 시베리아 컬렉션 Siberia Collection of Peter the Great'이 되었다.

1991년 한국으로 나들이를 온 '스키타이 황금전 The Scythian Gold from the Hermitage'은 표트르 대제 시베리아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칙령으로 시베리아의 각 도시마다 황금을 도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공문이 붙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베리아 곳곳에 황금이 묻혀 있다는 것을 차르가 인정한 꼴이었으니, 도굴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시베리아를 답사한 역사가 밀레르 Miller에 따르면 그의 조사대가 가는 곳마다 황금 유물을 구매하겠냐며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황금 유물 쟁탈전

 

1991년의 '스키타이 황금전' 전시회가 끝나고 20년이 지난 2011년 겨울, 한국에서 예술의 전당 기획으로 '스키타이 황금문명전 The Gold Treasures of Ukraine'이라는 제목의 또다른 전시회가 기획되었다.

'스키타이 황금전'이나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이나 제목이 거의 비슷하니 같은 스키타이 황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 완전히 다른 유물들이다.

스키타이문화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중국 만리장성 일대로 이어지는 넓은 지역의 사람들이 일군 문화를 통칭한다.

2011년에 한국에 온 황금 유물은 우크라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가 이야기한 '진짜' 스키타이족의 유물이었다.

우크라이나 최고의 국보로 지정된 황금 2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진품으로 총 260점의 황금 유물이 전시되었다.

당시 나는 이 전시회의 자문과 해설을 맡아 전시 준비에 함께 했다.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이 멋진 유물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떤 로비를 했기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금 유물들이 이렇게 많이 한국에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크라이나 측의 적극적인 제안 덕이었다고 한다.

실제 스키타이문화의 상당 부분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속한다.

1991년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는 스키타이문화의 '원조'을 자처했고, 더 나아가 러시아 최초의 통일국가인 키예프공국 Principality of Kiev의 수도가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 Kyiv라는 것을 내세워 러시아 문화의 정통성이 우크라이나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전시회로 스키타이의 황금이 시베리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원조라는 점이 한국인에게 얼마나 어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우크라이나의 이런 적극적인 행보 덕분에 우리는 서울에서 편하게 스키타이의 황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피차 이득이 아니었을까.

 

스키타이 황금 유물의 원조 논쟁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은 2014년에 제대로 터졌다.

2014년 3월 크림자치공화국 Autonomous Republic of Crimea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Crimea Peninsula를 합병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준전시 상태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한달 전 크림반도의 스키타이 황금 유물이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Amsterdam에 있는 알라드피어슨 박물관 Allard Pearson Museum에서 전시 중이었다.

간단히 말해, 유물이 네델란드로 갈 때는 우크라이나 소속이었지만, 전시회가 끝나자 러시아 소속이 된 것이다.

러시아는 원래 유물의 소장자인 박물관으로(결국 러시아로)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크림반도와 러시아의 병합을 인정하지 않는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로 반환해야 한다고 맞섰다.

네델란드는 일단 반환을 미뤘고, 이 문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제 소송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유물을 직접 발굴하고 소장해온, 이미 러시아 소속이 된 크림반도의 고고학자들이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2019년 러시아 쪽의 항소가 받아들여져서 우크라이나 쪽으로 반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준비가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사실 크림반도의 스키타이 유물 공방전은 따로 책을 하나 써도 될 정도로 아주 복잡한 문제다.

공식적으로 러시아와 크림반도의 병합은 전쟁과 같은 폭력이 아니라 주민투표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실제로 크림반도의 주민을 러시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니 전쟁으로 빼앗긴 유물은 본국에 다시 반환해야 한다는 헤이그문화재보호협약 The Hagu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Property(2차 세계대전 후 문화재 파괴를 막기 위해 1954년 체결된 조약으로, 전쟁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문화재를 탈취할 수 없게 방지하는 것이 주요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또한 크림반도의 스키타이 황금을 발굴하고 보존한 사람들도 러시아인들이기 때문에 유물을 관리할 사람이 누군지도 문제가 된다.

지금의 우크라이나에는 크림반도의 황금 유물을 발굴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반면 발굴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크림반도의 스키타이 고분은 현재 러시아와는 전혀 관계없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에 있었고, 우크라이나의 세금과 주권으로 발굴된 것이라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굳이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비유해보자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의 유물을 해외에 보내 전시회를 했다가 한국이 독립을 한 경우 정도가 될 것 같다.

비슷한 사례조차 찾기 어려운 크림반도 스키타이 황금 유물 사건은 지금까지도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가적인 대타협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도 크림반도의 황금 유물은 네델란드에 있다.

'방황하는 네델란드인'이 아니라 '방황하는 스키타이의 황금'이 된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홍보대사 '황금인간'

 

2023년 7월 31일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 Almaty에 있는 카자흐스탄 국립중앙박물관 Central State Muzeum of Kazakhstan에서 새샘이 찍은 이식 고분 출토 황금인간.

 

2018년에는 카자흐스탄 문화체육부가 기획한 순회 전시가 한국을 방문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이 그것이다.

1970년에 발견된 사카문화 Saka culture(스키타이 Scythian 문화: 카자흐스탄과 중국 신장 등 실크로드에서 서기전 8~서기전 3세기에 꽃피운 대표적인 황금문화) 이식 Issyk 고분 유적 중 도굴되지 않은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인간(정식 명칭은 황금왕자전사 Golden Prince-Warrior) 유물을 중심으로 한 전시회였다.

카자흐스탄 측은 전시회 대관료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전시회의 형식을 자신들이 뜻대로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카자흐스탄이란 나라의 문화 수준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기획된 전시로 스키타이 황금문화의 종주국이 카자흐스탄이며, 진정한 초원 문명의 출발점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전시회는 일본, 중국, 러시아, 터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가 한국에서 열리기 얼마 전인 2018년 10월 다소 뜬금없는 논문이 하나 발표되었다.

작성자는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이후 약 30년 동안 카자흐스탄을 통치한 초대 대통령이자 카자흐스탄의 국부로 칭송받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Nursultan Nazarbayev 대통령이었다.

때는 30년의 통치를 마무리하며 자진 퇴임하기 직전, 즉 퇴임 후를 대비한 유훈인 셈이다.

「위대한 초원의 일곱 가지 주제」란 제목의 이 논문은 카자흐스탄이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연구해야 할 카자흐스탄 역사의 주제 일곱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많을텐데 하필 자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니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스키타이 황금문화를 앞세워 신생국가인 카자흐스탄을 유라시아를 대표하는 나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있다.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은 히바 Khiva-사마르칸트 Samarkand-타슈켄트 Tashkent를 연결하는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그 주도권은 소련에 있었고, 독립국가연합으로 바뀐 뒤에는 러시아가 가져갔다.

그 헤게모니 hegemonie(주도권)를 카자흐스탄이 가져오려는 것이다.

이식 Issyk 고분에서 출토한 화려한 황금인간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찬란한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상징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황금인간'이 전 세계를 다니며 '황금의 나라' 카자흐스탄을 널리 알리는 홍보대사가 된 셈이다.

 

세계 각국을 돌면서 황금 유물을 전시하는 것은 비단 유라시아만의 일은 아니다.

과거 우리도 한국전쟁 이후 비슷한 전시회를 미국과 유럽 일대에서 거행했다.

황금이라고 하는 누구나 좋아하는 유물을 앞에 놓고 그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와 다른 유물들을 함께 소개하는 형식이다.

전시회를 기획하는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황금만큼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자국을 세계에 알릴 때 어디든 '황금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미술 5천년 전展'이란 제목으로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때 신라의 금관을 비롯한 193점의 유물이 전시되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4년밖에 안 된 시점이다.

제대로 된 유물 포장법이나 보존 기술도 없던 시절에 프로펠러 비행기로 몇십 일이 걸려 미국으로 유물을 운송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미술 5천년 전'은 1960년대에는 유럽으로, 1970년대에는 다시 미국으로 계속 이어졌다.

신생국가인 한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열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전시 유물에는 반드시 황금 유물이 포함되어야 했다.

'황금의 나라'라고 하는 상상력은 중세 이래 서양 사람들이 로망이었으며, 이런 홍보는 주효했을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지도를 올리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문화재 보호 관점에서 본다면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고 유물에 흠이 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전시가 옳았는지는 극히 의심이다.

 

 

○황금의 나라, 그 실체는

 

21세기에도 각국이 스스로를 '황금의 나라'라고 칭하게 만든 스키타이의 황금문화는 실제로 어떠했을까.

황금인간들이 살던 유라시아의 초원에는 정말 황금이 넘쳤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다들 짐작하겠지만 발에 채도록 황금덩어리가 길에 널려 있거나 사방에 넘쳐나는 나라는 없다.

실제로 유목민들은 대개 강에서 사금을 캔 것이지 황금 광산을 채굴한 것이 아니다.

스키타이 시대 Scythian period(서기전 8~서기전 3세기) 시베리아 초원의 족장들은 온몸과 말의 장식을 황금으로 둘러서 마치 황금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황금인간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여도 우리가 상상하는 호화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몸에 지니는 무기와 의복의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해야 했다.

그래서 옷을 장식하는 황금도 최대한 얇게 펴서 몸에 바르는 식으로 치장했다.

만약 우리가 집을 소유할 수 없고, 집안을 꾸밀 가구들도 살 수 없다면 우리는 번 돈을 과연 어디에 쓸까.

아마 차를 사고 몸을 꾸미는데 쓰지 않을까?

초원의 사람들이 황금장식을 좋아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기에, 무겁고 거추장스런 물건은 소유할 수 없었다.

대신 자신들이 타고 다니는 말과 자신의 몸을 꾸미는데 모든 재화를 소비했다.

게다가 금을 가공하는 데는 넓은 공간도 필요하지 않고, 금은 연성과 전성이 강하기 때문에 적은 양으로 많은 장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금은 초원을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는 아주 적당한 금속이었을 것이다.

황금이 많다 한들 주렁주렁 달고 전쟁에 나가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실제 무덤에서 발견되는 황금장식 중 상당수는 생전에 단 것이 아니라 사후에 무덤에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로 넣기 위한 용도였다.

 

정작 황금문화로 유명한 알타이 Altai의 고원지대 같은 곳의 무덤을 발굴하면 황금으로 장식한 옷 안쪽에서 누더기를 덕지덕지 기운 바지나 셔츠가 흔히 발견된다.

집이 없으니 옷장도 있을 리 없고, 단벌 신사로 평생을 살았을 테니 당연한 결과다.

무덤 옆에 놓인 나무쟁반이나 그릇들도 생전에 몇십 번은 고쳐서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족장이든 일반 무사든 예외는 없었다.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 라이프 Minimal life'의 원형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유목민들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때에 반드시 적의 무덤을 파괴하고 도굴했다.

전쟁에서 이겨도 정복해야 할 도시나 요새가 없었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모이는 장소인 조상들의 무덤을 파괴했던 것이다.

무덤 속에서 황금 유물이 나오면 전리품으로 나누어가졌다.

그 과정에서 황금 유물들이 사방으로 전해지며 잘못된 황금의 나라 전설을 부추겼다.

그렇게 몇천 년 동안 사람들이 마음을 설레게 했던 황금의 나라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다.

 

인류 역사에 황금이 등장한 이래 몇천 년이 지났건만, 황금은 여전히 인간의 영원한 욕망이고 꿈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황금이 차고 넘치는 땅을 꿈꾸어왔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사용했던 황금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깊숙이 그 황금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기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면 황금을 둘러싼 인간의 욕심뿐이다.

엘도라도 El Dorado, 지팡구 Cipangu(마르코 폴로 Marco Polo일본국日本國의 중국어 발음 지펀구를 Cipangu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것이 지금의 재팬 Japan이 되었다), 알타이 Altai,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미국 서부 지역에서 골드 러시 Gold rush가 한창일 때 샌프란시스코 근처인 새크라멘토 Sacramento에 금광이 형성되자 몰려든 중국인들이 이 지역을 금산金山이라 불렀고, 이후 호주 멜버른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자 또 중국인들이 몰려가면서 호주 금광과 구별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구금산舊金山이라 불렀다) 같은, 사람들이 꿈꾸어온 '황금의 나라'는 대항해시대 이후 신대륙의 발견, 골드 러시로 이어지는, 일확천금을 일구던 시대에 등장했다.

21세기인 지금도 유라시아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정치적 분쟁의 중심에 여전히 황금이 있다.

'황금의 나라'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유라시아 여러 나라들의 경쟁을 보며 19세기에 벌어진 골드 러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고고학 자료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황금의 나라는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황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집착, 냉혹한 정치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구글 관련 자료

 

2024. 3. 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