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2: 흑사병과 그 결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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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2: 흑사병과 그 결과

새샘 2024. 3. 13. 15:35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의 확산(사진 출처-출처자료1)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1330년대와 1340년대 몽골에서 중국, 북부 인도, 중동, 크림반도 Crimean Peninsulat에 이르기까지 확산된 치명적 질병에 대해 16세기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1346년 질병은 흑해에 도달했고, 1347년 제노바 Genova(영어 Genoa)의 갤리선 Galley(고대와 중세에 걸쳐 지중해를 운항하던 대표 선박으로서 노橈젓기 및 돛(범帆)에 부는 풍력으로 운항)이 부주의하게도 질병을 흑해에서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와 북부 이탈리아로 옮겼다.

흑사병—영어의 '흑사병 plague'이란 말은 동시대인인 그 질병을 라틴어로 '타격 plaga'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은 이탈리아를 출발해 교역로를 따라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먼저 바닷가 항구를 기습했고 그 다음에 내륙으로 이동했다.

그것은 1348년과 1349년 여름과 겨울에 하루 약 3킬로미터씩 전진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1350년 흑사병은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와 북부 러시아 Russia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향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흑해에 이르러 마침내 전염병의 초기 발생지와 만났다.

 

최초의 세계적 대유행(즉 범유행병, 팬데믹 pandemic)이 있고 나서 흑사병은 앞으로 3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지역 단위의 유행병으로 발병했다.

15세기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10년 주기로 흑사병이 새롭게 발병했다.

그러나 흑사병의 공격은 점차 빈도가 떨어지고 치사율도 줄어들었다.

최후의 전 유럽적인 흑사병 발병은 1661년과 1669년 사이에 있었는데, 1665년 런던 London의 흑사병 유행이 특히 심각했다.

1720년 이후 흑사병은 서유럽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 Poland와 러시아에서는 18세기 말까지 계속 유행했다.

 

흑사병의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유럽 인구의 최소한 3분의 1, 아마도 절반가량이 1347~1350년의 첫 흑사병 유행 기간에 사망했다.

그 후로도 인구는 계속 줄었다.

1450년까지 흑사병, 굶주림, 전쟁 등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유럽 전체 인구 중 50퍼센트 이상이 사망했다,

인구가 가장 많았던 1300년 무렵을 기준으로 하면 3분의 2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인구는 17세기 말까지 흑사병 발병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인구 감소는 유럽의 풍경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만을 놓고 보면, 1348년 이전까지 존속했던 촌락 가운데 4만 개 이상이 1500년 무렵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파리 Parsis 근교에서는 1348년 이전까지 있던 경작지 가운데 절반 이상은 1450년이 되자 목초지를 변했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버려진 밭과 마을은 숲으로 변했고, 유럽의 삼림 지역은 1348년 이전보다 3분의 1이나 늘어났다.

개선된 곡물 윤작법과 불모지에서의 집약농업 감축은 흑사병 이후 유럽 농업의 생태적 균형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흑사병에 대한 유럽인들의 첫 반응은 광란의 공황상태에서 무기력한 은둔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다양했다.

사람들은 흑사병이 전염병이란 사실을 재빨리 알아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확산되는지는 미스터리였다.

중세의 전문가들 대부분은 흑사병이 나쁜 공기를 통해 확산된다고 믿었으며, 감염된 지역을 떠나 도망(그 결과 흑사병은 더욱 빨리 확산되었다)치거나 독기毒氣(나쁜 공기)를 막기 위해 향기 좋은 꽃으로 코를 막으라고 권고했다.

어떤 사람들은 집안에 칩거하면서 위험이 가실 때까지 아무도 집 안에 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운명에 모든 것을 내맡겼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욕망에 몸을 맡긴 채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일이면 죽을 테니까"라고 외쳤다.

 

다른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흑사병을 번지게 만들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독일 라인란트 Rhineland, 남부 프랑스, 에스파냐(그리스도교 지역)에서는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공격을 당하고 수천 명의 주민이 학살을 당했다.

유대인에 대한 이런 공격은 에스파냐의 무슬림 지역 또는 무슬림 세계의 다른 지역—이 지역들 역시 그리스도교 유럽 못지않게 흑사병으로 고통을 겪었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6세 Clemens VI(재위 1342~1352)는 전 유럽에 서신을 보내 이런 공격 행위를 저지하려고 애썼다.

교황은 유대인 역시 그리스도교도와 마찬가지로 흑사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도에게 유대인 이웃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서신은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신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가혹행위가 저질러지고 난 뒤였다.

 

흑사병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반응은 '채찍질 고행 Flagellant movement'이었다.

순회 참회자 무리들이 죄 많은 세상에 흑사병을 내려 보낸 신의 진노를 달래려는 염원으로 채찍으로 피가 나도록 스스로를 매질했기에 그런 명칭이 붙여졌다.

채찍질은 1260년 무렵의 공개 참회 대회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1348년과 1349년에 재연, 확대되었다.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채찍질 고행자 주변에 몰려든 통제 불능의 히스테릭한 폭도들은 교회 및 세속 당국 양쪽의 우려를 자아냈고, 마침내 이 관행은 1349년 말 교황의 명령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채찍질 고행자의 기이한 행태에 주목은 하되, 그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던 정상적인 신도들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흑사병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던 순간까지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보살폈다.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제가 사망했다는 것은 도망친 사제의 수가 매우 적었으며 도망친 사제가 사제 전부를 대표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유럽의 성직자는 이 가공할 질병 앞에서 용기 있게 소임을 다했다.

그들의 흑사병에 대한 대응이 경멸받을 만하거나 교구 평신도에게 환멸을 품게 만들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흑사병의 원인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흑사병이 선腺페스트나 그보다 더욱 치명적인 폐肺페스트와 패혈성 페스트의 원인이 되는 페스트균(흑사병균,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Yersinia pestis)이 전 세계적으로 창궐한 결과라고 확신했다.

선페스트는 쥐 등에 서식하는 이에 의해 운반되는데, 감염된 이나 쥐에게 물린 사람만 이 병에 걸린다.

선페스트는 림프계 lymphatic system를 공격해 샅굴부위(서혜부鼠蹊部) groin[넙다리(넓적다리)와 복부의 접합부], 목, 겨드랑이 등에 있는 림프 결절에 거대한 림프선종을 만들어 피부에 부스럼과 뾰루지가 생기게 한다.

폐페스트는 페스트균이 폐에 감염되었을 때 나타나는데, 감기와 같은 방식으로 전파된다.

패혈성 페스트는 감염된 이가 페스트균을 직접 사람 혈관에 주입할 때 발병하며, 불과 몇 시간 만—질병의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기도 전—에 사망에 이르게 한다.

 

흑사병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여전히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이런 설명에 대해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향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 AIDS virus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0~3,000년 전에 유독 유럽 인구 중에서만 돌연변이 유전자(CCR5-Delta32 돌연변이로 알려져 있다)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돌연변이 유전자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세포에 진입하는 통로인 T-세포 항원수용체 T-cell antigen receptor를 차단함으로써 이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 완벽한 또는 실질적인 면역성을 갖게 해준다.

이런 종류의 돌연변이가 대개 그렇듯, 이 돌연변이는 변칙적으로 발생한 것이라서 처음 나타났을 때는 각별한 진화론적 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 그리고 그 후 300여 년 동안 이 특별한 돌연변이 유전자를 위해 선택된 '어떤 전염병'이 발생했고, 그 결과 이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의 발생 빈도는 오늘날 전체 유럽 인구에서 대략 10명 중 1명꼴이 되었다.

발생 빈도는 사르디니아 Sardinia에서는 가장 낮은 4퍼센트였고, 스칸디나비아와 북부 러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16퍼센트에 달했다.

 

이 '어떤 전염병'은 흑사병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만일 CCR5-Delta32 돌연변이가 흑사병에 대한 실질적인 또는 완전한 면역성을 전해주었다면, 그것은 왜 흑사병이 유럽에서는 서서히 사라진 반면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주기적으로 맹위를 떨쳤는지를 설명해준다.

한 가지 문제는 페스트균이 T-세포 항원수용체를 통해 인간의 세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흑사병이 페스트균에 의해 발병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 특별한 돌연변이 유전자는 어떻게 흑사병에 대한 면역성을 제공할 수 있었는가?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페스트균 자체가 돌연변이를 일으켰을지 모른다.

현대적 형태의 세균은 T-세포 항원수용체를 통해 세포에 들어갈 수가 없지만 중세적 형태의 세균은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흑사병의 발생이 페스트균에 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특정할 수 없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또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감염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현재로선 이런 설명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지 또는 전혀 다른 설명이 흑사병의 원인을 밝히는 해답으로 판명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 미생물학 및 유전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역사 해석을 가능케 하는 놀라운 사례를 이미 제공하고 있다.

 

 

○흑사병이 지방에 미친 영향

 

흑사병의 경제적·사회적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1348~1350년, 수확물은 들판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제조업은 중단되었으며 교역도 붕괴되었다.

기본 생활필수품은 품귀해지고 가격이 상승했으며, 각국 정부는 입법 활동을 통해 흑사병 이전의 가격과 임금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375년에 이르러 새로운 인구 구성이 자리 잡자 유럽의 경제 구조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1400년 무렵 유럽은 새로운 경제 세계에 진입했다.

 

1350년 이후 지방의 곡물 생산량은 흑사병 이전보다 감소했지만 전체 인구는 그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먹여야 할 인구가 줄고 곡물이 상대적으로 풍족해지면서 곡물 가격이 하락했다.

반면 고용시장에서 경쟁하는 노동자가 줄어들자 임금은 상승하고 일자리 구하기는 좀 더 쉬어졌다.

임금 상승과 빵값 하락으로 보통 사람은 빵을 더 많이 구입할 수 있었고 유제품, 고기, 생선, 과일, 포도주 등도 보다 안정적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세 말기의 유럽인은 좀 더 균형 잡힌 식단을 섭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유럽인은 과거 몇 백 년에 비해 한결 나은 영양분을 섭취했고, 유럽인 중 일부의 식품 섭취는 오늘날보다도 나은 수준이었다.

15세기의 쓰레기더미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 학자들은 1405년의 스코틀랜드 Scotland 글래스고 Glasgow 거주자들이 2005년 거주자들보다 더 건강한 식단을 섭취했다고 결론 내렸다!

 

흑사병의 여파로 경작지와 목초지와 숲 사이의 건전한 생태적 균형이 재확립되었다.

곡물 가격 하락에 직면한 수많은 소농은 곡물 경작지를 줄이고 양과 가축 떼를 늘렸다.

경작지를 목초지로 전환함으로써 노동비용을 줄이고 농지의 전반적인 수익성을 끌어올렸으며, 비료 투입을 늘려 토지의 비옥도를 개선했다.

토지의 구입이 쉬워지자 소농들은 소유 토지 면적을 늘릴 수 있었고, 그것은 규모에 따른 효율성을 향상시켰다.

땔감 수요가 줄어들자 숲도 다시 회복되고 확대되었다.

 

대지주는 흑사병으로 변화된 경제 환경에 더디게 적응했다.

일부 영주는 소작농에게 추가로 무상노동을 요구함으로써 상승한 임금비용을 벌충했다.

동유럽에서는 영주가 확대일로의 발트 해 Baltic Sea 곡물 교역에 조달하기 위해 곡물 경작지를 확대함에 따라, 많은 농민이 15세기를 거치면서 처음으로 농노 신분을 강요당했다.

중세 말기의 영주들은 카스티야 Castilla(현 스페인 중부), 폴란드, 독일 등지에서도 농민에게 새로운 형태의 농노 신분을 강요하는데 성공했고 그것은 16세기와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베리아와 이탈리아에서는 12·13세기 동안 거의 소멸되다시피했던 노예제가 흑사병 이후 더욱 흔해졌다(중세 말기에 늘어난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제11장 참조).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1300년 무렵 프랑스 농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 자유로운 상태였다—에서는 중세 말기에도 농민이 누린 자유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지대地代(토지 사용료)가 하락했지만 대신 영주는 다른 수수료를 부과함으로써 손실을 보충했다.

그러나 잉글랜드—1300년 무렵 잉글랜드 농노는 프랑스 농노보다 훨씬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에서는 중세 말기를 거치는 동안 농노제가 쇠퇴했고 궁극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흑사병에 의해 조성된 사회적 유동성과 경제적 기회의 신세계에서 잉글랜드 농노는 요구가 덜한 영주의 땅으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거주지를 옮기는 등 행동으로 불만을 표출하기가 비교적 용이했다.

농노 조건 완화, 좀 더 많은 개인적 자유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 결과 16세기 초에 이르러 농노제는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중세 말기 유럽의 부자유한 농민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적 조건의 향상은 반드시 영주로부터의 더 큰 개인적 자유 확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1500년의 시점에서 보면, 잉글랜드와 카탈루냐 Catalunya(영어 Catalonia) 제외한 유럽의 농노는 대부분 흑사병 이전에 비해 영주의 지배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농민과 도시 거주자의 처지는 달랐다.

흑사병에 의해 조성된 경제적 조건은 자유농민과 도시 거주자에게 사회적 유동성과 새로운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했다.

그 결과 농민에서 대영주에 이르기까지 지방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흑사병이 도시에 미친 영향

 

도시는 중세 말기의 변화된 경제 현실을 민감하게 드러내는 바로미터 barometer(수준이나 상태를 아는 기준)였다.

1300년 무렵 인구의 최고점에 도달한 후 유럽 일부 도시들은 흑사병의 타격을 입기도 전에 이미 인구 감소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흑사병은 상황을 훨씬 더 악화시켰다.

인구 과밀은 중세 도시생활의 열악한 위생 수준과 더불어 유럽 도시들을 흑사병에 각별히 취약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러나 전쟁과 경제 위기 또한 수많은 중세 도시들의 인구 감소에 크게 기여했다.

예를 들어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의 도시 인구는 흑사병의 최초 공격 이후 신속히 원상회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렌체와 그 주변 지역의 인구는 1338년의 30만 명에서 1427년 1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남부 프랑스 툴루즈 Toulouse의 인구는 14세기 말까지 꾸준히 유지되다가 1358년에서 1430년 사이에 백년전쟁의 참화로 인해 2만 6,000천 명에서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런던과 파리는 흑사병으로 인해 단기적인 인구 감소를 겪었을 뿐이다,

런던과 파리 두 도시는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지방에서 온 새로운 노동자의 대량 이주로 신속히 복구했다.

또한 새로운 이주 노동자의 상당수는 여성이었는데, 그들은 흑사병으로 인한 도시의 노동력 부족 덕분에 유리한 경제적 기회를 얻었다.

 

1450년 이후 유럽의 도시들은 다시 한 번 성장의 기회를 맞이했다.

1500년에 이르면 유럽 인구의 약 20퍼센트가 도시 지역에 거주했는데, 그것은 2세기 전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15세기 말 도시 성장의 견인차는 흑사병과 상업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가능해진 중세 말기의 고도화된 경제적 전문화였다.

농민은 곡물 생산의 압력을 덜 받게 되자 토지에 가장 적합한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농지 용도를 자유롭게 변경했다.

그 결과 좀 더 전문화되고 효율적인 지역경제가 등장했다.

스웨덴은 버터를 생산해서 독일과 발트해 연안의 곡물과 교환했다.

잉글랜드는 모직물을 생산해서 프랑스의 포도주와 이탈리아의 옷감과 교환했다.

카스티야는 가죽을 생산해서 비단, 과일, 곡물 등과 교환했다.

그 밖에도 무수히 다양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지역 네트워크에 연계된 도시들은 중세 말기의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각별한 이익을 얻었다.

북부 독일에서는 일군의 도시들이 뤼베크 Lübeck와 브레멘 Bremen의 주도 아래 한자 Hansa 동맹同盟  Hanseatic League을 결성했다.

이 도시들은 독일과 발트해 연안의 곡물을 스칸디나비아와 동부 잉글랜드로 운송했고, 그곳에서 유제품, 생선, 모피,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양모와 모직물을 가져왔다.

북부 이탈리아의 경우 사치품 수요가 늘어나면서,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의 향신료와 비단 무역상, 밀라노 Milano는 교전 중인 유럽 각국에 갑옷과 무기를 공급하면서 무기 산업으로 번영을 누렸고, 제노바 Genova(영어 Genoa)는 벌크 상품—특히 곡물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중세 말기의 모든 도시가 번영을 누린 것은 아니다.

특히 플랑드르 Flandre(영어 Flanders) 도시들은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럽의 중심 도시들은 흑사병으로 조성된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이익을 얻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유럽 도시들은 15세기에 시작해 19세기 말까지 중단 없이 계속된 유럽 상업 네트워크—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메리카로 이어졌다—의 놀라운 팽창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이 시기 유럽의 상업, 식민지화, 정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11장 참조).

 

중세 말기의 경제 세계는 새로운 경영과 회계 그리고 금융 기법의 발달을 자극했다.

새로운 형태의 기업 파트너십은 보험 계약의 발달과 더불어 장거리 해상교역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최소화했다.

14세기 중반 이후 이탈리아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복식부기는 상인들이 대변과 차변—즉, 이익과 손실—을 전보다 한층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은행 역시 종래의 사업 방식을 상당 부분 바꾸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家 House of Medici는 유럽 주요 도시에 은행 지점망을 설치했지만, 지점들을 신중히 조직화해서 설령 한 지점이 파산하더라도 기존의 지점 제도처럼 은행의 나머지 조직마저 한꺼번에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했다.

은행은 또한 선진 신용 기법을 실험했다.

심지어 고객이 현금 지불 없이도 지점과 지점 사이에 자금을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와 같은 '장부상 명의 변경'은 처음에는 구두 명령에 의해서만 시행되었으나 1400년 이후로는 기록된 명세서에 의해 시행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사용되는 수표의 효시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3.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