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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벽을 뛰어넘어 풀어낸 마야문명의 비밀 본문

글과 그림

냉전의 벽을 뛰어넘어 풀어낸 마야문명의 비밀

새샘 2024. 3. 14. 21:28
마야문명 지역(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5%BC_%EB%AC%B8%EB%AA%85)

 
고대문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이야기라면 당연히 현장을 누비며 활약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모든 고고학자가 그런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시대의 한계로 연구실에서 평생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여 세계적인 발견을 한 사람도 있다.
바로 중남미의 마야문자를 해독한 소련 학자 유리 크노로조프 Yuri Knorozov를 두고 하는 얘기다.,

크노로조프는 마야의 유적과 실물 자료는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좁은 골방에서 오로지 문헌 자료만 몇천 번 반복해 보면서 대서양 건너 머나먼 중남미의 마야문명 Maya civilization을 풀어냈다.

이집트 문자를 해독한 프랑스의 장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크노로조프는 냉전의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로 소련과 서방세계로부터의 편견과 질시를 견뎌야 했다.
고립을 뛰어넘어 세계적 연구 업적을 이룬 그의 생애는 다시 고립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스페인 침략으로 파괴된 마야문명

 
마야 Maya는 원래 현재 중남미에 사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마야문명이라고 하면 보통 서기전 1500년부터 스페인 Spain 정복 이전까지 약 3000년 동안 멕시코 Mexico 동남부와 과테말라 Guatemala 등 유카탄반도 Yucatan Peninsula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대표적인 신대륙 문화를 말한다.
고대 마야문명은 70여개 이상의 대형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특히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전기(250~900년)가 전성기였다.
티칼 Tikal, 코판 Copan, 팔렝케 Palenque 등 우리가 흔히 보는 대부분의 마야 유적이 이때 만들어졌으며, 대형 도시는 인구가 1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후 멕시코 지역의 아스테카(아즈텍)문명 Aztec Civilization(또는 Aztecs)이 성장하면서 그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종교와 정치를 결합한 독특한 문명을 지켜왔다.
 
하지만 16세기 초 스페인의 침략으로 마야문명은 초토화되었다.
이교도라는 이유로 마야인 Mayans들은 학살당했고, 그들이 남긴 수많은 유적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1649년 마야의 마지막 도시가 멸망하면서 몇천 년을 이어온 마야문명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혔다.
약 200년이 지난 뒤에 고고학자들이 다시 마야의 유적을 발견했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글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스페인이 마야와 관련된 유적과 책들을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마야문명 당시에는 몇천 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의 달력과 책들은 현재 고작 세 권(또는 네 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마야의 문자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16세기에 이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디에고 데 란다 Diego de Landa 신부가 쓴 ≪유카탄 보고서≫였다.
란다 신부는 이 책에서 마야인들의 다양한 풍습과 함께 몇개의 문자들을 소개하고 그 뜻도 적어놓았다.
역설적으로 란다 신부는 마야문명의 가장 악랄한 파괴자였다.
그는 마야인들이 집에 감추어둔 마야 달력을 찾아내 불태웠다.
마야인들에게 달력은 농사를 짓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보물과도 같았다.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불태워지는 달력을 보며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마야인들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란다 신부는 마야인들을 개종을 거부하는 자들이라며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의 악행이 얼마나 잔인했던지 다른 신부의 고발로 그는 교황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카탄 보고서≫는 재판정에 선 란다 신부가 마야인들의 심각한 우상숭배 현실을 알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썼던 보고서였다.
잔인한 파괴를 합리화하기 위해 쓰인 란다 신부의 자료가 그의 손에 의해 사라진 마야문명을 밝히는 유일한 자료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란다의 보고서도 그나마 원본은 사라졌고 18세기에 요약한 사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뒤 마야문자에 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의 문자는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 남아 있었다.
 
 

○전쟁이 빼앗아간 평범한 삶

 

마야문자를 세계 최초로 해독한 소련 학자 유리 크노로조프. 좁은 골방에서 오로지 문헌 자료만 가지고 마야문자의 비밀을 풀어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1952년 세기의 미스터리인 마야문자를 해독한 사람은 뜻밖에도 소련에서 나왔다.
그해 만 30세가 된 유리 크로조프였다.
마야문자를 해독한 당시 코노로조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몇 년을 군대에서 보냈고, 피난 생활을 하면서 뒤늦게 학부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인 소련의 무명 학자였다.
소련에서 공부한 탓에 마야와 관련된 교육은 전혀 받지 않았고, 오로지 책 몇 권만을 가지고 순수하게 독학으로 이뤄낸 엄청난 업적이었다.
그의 놀라운 업적만큼이나 그의 삶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적이다.
 
크노로조프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Ukraine 지역인 하르키우(러시아어 하리코프, 영어 카르키프  Kharkiv)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바이올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스탈린 Stalin 시절 잘못된 정책으로 러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굶주림(기아飢餓)으로 사망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다.
그는 본인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것은 물론, 주변 지인들이 굶주림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일로 평생 트라우마 trauma(사고 후유 장애)에 시달렸다.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르키우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폴란드와 인접한 하르키우는 곧바로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는 독일군의 징집을 피해 몇 년을 숨어 살았다.
피난 기간 동안 살던 집은 사라졌고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도 독일군에 희생당했다.
 
크노조프는 구사일생로 목숨을 건져 모스크바(영어 Moscow)로 올 수 있었지만, 독일이 몇 년 동안 지배했던 점령지 출신이란 이유로 소련 사회에서 독일의 부역자로 의심받았다.
전쟁 중에 모스크바대학으로 적을 옮겨 공부하면서 크노로조프는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shamanism(무교巫敎, 무술巫術)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에서 점령지 줄신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계속 따라다녔고 대학원 입학까지 거부당했다.
진로를 찾지 못한 그는 레닌그라드 Leningrad(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민속학박물관에 취직했다.
그리고 민속학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야문자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독일 학자의 논문과 마야에 대한 책 몇 권을 접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베를린 Berlin에서 노획한 독일의 자료들이었다고 한다.
서양의 일부 책에서는 크노로조프가 베를린 전선에 참전했다가 책을 훔쳤다는 식의 설명도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 크노로조프는 모스크바 근처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아무튼 러시아 안에서 연구자로서의 앞길이 막힌 그가 아무도 모르는 마야문자 연구에 매달린 것은 어쩌면 시대가 강요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민속학박물관의 좁은 방에서 숙식을 하며 마야문자의 해독에 몰두하던 은둔의 시간에 그는 공교롭게 옆방에서 일하던 젊은 학자와 교유를 할 수 있었다.
바로 러시아 역사의 유라시아 사관을 수립한 전설적인 학자 레프 구밀료프 Lev Gumilyov이다.
지금은 새로운 러시아를 주창하는 푸틴 Putin의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사상적 기초를 이룬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지만, 당시 구밀료프는 스탈린의 심한 탄압을 받아서 7년의 수용소 생활을 한 직후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민속학박물관에서 받아주어 그곳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다.
민속학박물관에서 구밀료프는 유라시아 역사를 집필하고, 크노로조프는 마야문명의 비밀을 풀 연구를 했다.
둘의 교유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구밀료프가 1949년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두 번째로 수용소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크노로조프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본인도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 짧은 교유의 시간에 크노로조프는 구밀료프의 어머니이자 소련의 국민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 Anna Akhmatova를 만난다.
아흐마토바는 아들의 친구인 크노로조프에게 베레모를 선물했고 크노로조프는 평생 외출할 때마다 그 베레모만 썼다고 한다.
그 모습은 그가 늘그막에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에도 남아 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살기 힘들었던 스탈린 시절 베레모를 자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호구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구밀료프는 두 번째 수용소 생활을 겪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어머니인 아흐마토바가 변절을 하고 스탈린과 당에 대한 찬양시를 쓴 덕분이었다.
이 일로 아흐마토바는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까지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정작 구밀료프 자신은 그 내막을 모른 채 어머니를 변절자라고 오해해 돌아가실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대륙 유라시아의 역사에 새 지평을 연 구밀료프와 신대륙의 새 역사를 쓴 크노로조프의 세기적인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스탈린 시대가 낳은 비극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다

 

크노로조프가 수없이 반복해 본 마야의 책 세권 중 하나(사진 출처-출처자료1)

 
크노로조프가 마야문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그의 손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소련 병사가 독일에서 가져온 책 세 권과 란다 신부의 보고서가 전부였다.
빈약한 자료의 한계를 크노로조프는 타고난 재능으로 돌파했다.
크노로조프는 양손잡이였기 때문에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정반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복잡한 그림 같은 마야문자를 보는 눈썰미도 남달랐고, 수학적인 머리도 비상했다.
 
그는 이런 천재성을 기반으로 기묘한 그림처럼 생긴 마야문자들의 위치와 특징을 머릿속에서 수학과 통계로 재조합해냈다.
2년 동안의 연구 끝에 그는 마야문자가 뜻을 전하는 표의문자表意文字(뜻글자)와 음을 전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소리글자)가 섞여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한국어로 비유하면 한자의 음을 빌려서 쓰는 이두吏讀/吏頭나 향찰鄕札과 비슷하다.
우리도 삼국시대에 한자가 도입되어 일부 한자는 한국어의 특성을 반영해 표음문자화되었고 그런 한자를 조사나 접속사로 썼다.
마찬가지로 마야문자는 얼핏 보면 복잡한 그림투성이지만 사실은 몇백 년 동안 문자를 사용해가면서 상형문자에서 점차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로 바뀐 것이다.
당시 중남미에서는 미국과 서방의 학자들이 돌에 새겨진 다양한 마야문자를 새롭게 발굴한 상태였다.
하지만 크노로조프는 그 새로운 발견을 알 턱이 없었다.
오로지 란다 신부의 자료와 남아 있는 마야의 책 세 권으로만 글자를 풀어냈으니 그의 연구는 놀라움 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연구를 시작한 지 2년 뒤인 1951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드디어 마야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소! 마야문자는 상형문자라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우리 쪽이 연구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네!'라고 적었다.
하지만 1952년 소련과학원(현 러시아과학원)은 또다시 그의 대학원 입학을 불허했다.
크노로조프는 출신 성분을 세탁하기 위해 스탈린 사상을 배우는 야간학교에 등록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또 한 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학부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던 크노로조프는 1952년 <중부 아메리카의 고대 문자>라는 애매한 제목의 18쪽짜리 작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일부러 논문 제목에 '마야'라는 단어를 넣지 않았다.
냉전의 장벽 건너편을 대표하는 신대륙의 '마야'라는 단어가 점령지 출신의 그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조용한 발표는 곧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멕시코에서도 즉각 번역해 소개했고 소련의 정부와 학계도 높이 평가했다.
냉전 시절 신대륙을 연구한 그의 업적이 사회주의의 우수함을 선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크노로조프는 이 논문 덕에 그렇게 염원하던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3년 뒤에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크노로조프 본인에게는 박사논문의 발표가 거의 목숨을 거는 일에 가까웠다.
점령지 출신인데다 그의 연구는 당시 소련을 적대시하는 신대륙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야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마야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다고 선언한 엥겔스 Engels 주장에 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고 신변을 정리한 뒤에 박사논문 심사장에 나갔다.
그의 발표는 단 3분 30초만에 끝났다.
소련 안에는 마야문자 전공자가 없었기 때문에 설명을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자료가 필요했을 텐데, 그는 자세한 것은 논문을 읽어보라는 부탁과 함께 결과만을 짧게 발표했다.
내용을 자세하게 발표했다가 자칫 당에 반하는 내용이 들어가서 비판의 빌미를 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의 걱정과 달리 발표를 마친 박사논문 심사장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소련과학원은 그에게 박사학위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국가박사(러시아와 일부 유럽에만 있는 독특한 학위로 대체로 대학의 정교수에 해당함)를 수여하는 놀라운 파격으로 보답했다.
이후 크노로조프는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지만, 해외를 나가는 것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고립된 생활을 계속했다.
 
한편 크노로조프의 성공에 미국 학계는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당시 마야 연구를 주도하던 고고학자 에릭 톰프슨 Eric Thompson은 마야문자가 실제 문법을 지닌 글자가 아니라 마치 '이모티콘 emoticon(그림말)'같이 그때그때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각 상황에 대한 맥락을 모르는 한 의미를 해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평생 업적이 부정당하게 되자 톰프슨은 크노로조프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고 마야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내린 경솔한 결론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톰프슨과 미국 학계의 반응은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 McCarthyism(극단적이고 초보수적인 반공주의 선풍. 또는 정적이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하려는 경향이나 태도)의 열풍이 불며 소련을 극도로 적대시하던 사회적 분위기와도 일정 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톰프슨은 또다른 저명한 마야 전문가인 예일대학 Yale Unviersity의 마이클 코 Michael Coe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누가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발표를 2000년에 해달라고 했다.
코 교수는 2000년 새해에 그의 편지를 공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에릭, 아쉽지만 당신이 틀렸소. 우리는 모두 크노로조프의 해석을 따라서 마야를 연구하고 있다오."
실제로 1970년대 이후에 모든 마야문자의 해석은 크노로조프의 방법에 기반해 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마야 전문가들은 전체 마야문자의 80퍼센트 가까이 해석한다고 자부한다.
이 모든 결과는 전적으로 크노로조프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다.

 
크노로조프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도움도 있었으니, 그의 연구를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해준 러시아계 여성 두 명이 바로 그들이다.
그중 한 명이 마이클 코의 부인인 소피 도브잔스키 코 Sophie Dovzhansky Coe이다.
20세기 유전학의 개척자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출신의 미국 진화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Theodosius Dovzhansky의 딸인 소피는 러시아어로 된 크노로조프의 책과 논문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녀의 번역본을 본 마이클 코는 크노로조프의 추종자가 되었고, 이후 미국 안의 편견을 바꾸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마야문자가 새겨진 비석, 300~50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비의 신 차크를 표현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또 다른 이는 크노로조프와 같은 러시아 출신의 이민자이자 여성 고고학자인 타티아나 프로스쿠리아코프 Tatiana Proskouriakoff다.
제정러시아 시절 시베리아 톰스크 Tomsk에서 태어난 타티아나는 미국으로 건너와 건축학과를 졸업했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대신에 건축과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마야 탐험대의 보조 역할을 하며 수많은 마야문자를 발견했다.
타티아나는 펜실베이니아대학 University of Pennsylvania 박물관에서 수많은 발굴 조사를 하고, 말년에는 하버드대학 피바디 박물관 Peabody Museum of Archaeology and Ethnology in Harvard University에서 근무하며 크노로조프의 방법을 계승하여 수많은 마야문자를 해독해냈다.
타티아나는 여성이라는 한계로 고고학계에서 '히든 피규어 Hidden Figures'(숨겨진 인물)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세계 고고학계의 개설서에 소개될 정도로 마야문자 연구의 일인자로 인정받으며, 제1세대 여성 고고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미지의 땅에 대한 멈추지 않는 열정

 

2세기에 만들어진 과테말라에 있는 티칼 피라미드(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B%B0%EC%B9%BC)

 
크노로조프에게는 이러한 세계적인 명성이 사실 먼 나라 이야기였다.
박사논문 발표 직후 단 한 번 덴마크 Denmark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사흘간 참석한 것을 제외하면 35년 동안 여전히 연구실에서만 연구를 이어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련은 그의 출국을 계속 금지했다.
수많은 나라에서 그를 초청했지만 구소련 시절 내내 그는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결국 1990년이 되어서야 크노로조프는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크노로조프를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직접 초청한 국빈급 방문이었다.
이때는 크노로조프가 마야문자를 해독한 지 거의 40년이 다 되었고, 몸도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비틀대면서 기어이 티칼 피라미드를 올라가서 평생 책으로만 보았던 고대 마야인들의 흔적을 만났다.
1995년에는 멕시코를 방물하여 팔렝케, 야시칠란 Yaxchilan 등 주요 유적도 보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연로했고 소련이 패망한 직후 노학자의 삶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1999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영어 Saint Petersburg)에서 병에 시달리다 홀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멕시코 대사관의 도움으로 장례도 간신히 치렀다.
멕시코에서는 3미터에 달하는 유리 크노로조프의 동상을 세우고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고 있다.
 
크노로조프는 시대의 한계로 책상에 앉아서 마야를 연구했지만, 이후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말년에는 신대륙으로 건너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기원지를 밝히기 위해 지금도 쉽게 가기 어려운 쿠릴열도 Kuril Islands와 사할린섬 Sakhalin Island을 조사했다.
그는 사람들이 1만 5000년 전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통설 대신에 약 4만 년 전에 아시아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사람들이 건너갔다고 보았다.
물론 그의 견해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20년 7월 ≪네이처≫에는 3만 년 전 멕시코의 동굴 유적인 추키우이테 Chuquihuite에서 최초 미국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새로운 발견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다시 한번 크노로조프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수많은 핸디캡을 딛고 크노로조프가 마야문자 해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차별 없이 보고, 인류의 보편성에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에 서양의 수많은 학자들은 크노로조프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연구하면서 새롭게 발굴된 마야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야의 언어도 발전할 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반면 크노로조프의 천재성은 마야의 문자가 세상의 다른 글자와 마찬가지로 몇백 년 동안 발전해왔다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한 데 있었다.
처음에는 복잡한 상형문자로 시작해 점차 변해갔을 것이라는 문자의 보편성이 마야의 문자에도 적용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발상 말이다.
흔히 고대 언어를 해독한다고 하면 우리가 사전에서 단어를 찾듯 정확한 참고자료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문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끊임없이 변한다.

15세기에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과 지금의 한국어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야문자 역시 다를 이유가 무엇인가.
 
미지의 땅과 그 안의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들을 정복하여 얻은 전리품을 박물관에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크노로조프는 편견 없이 문화의 보편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연구 결과로 몸소 증명했다.
지난 1년 사이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다시 고립되고 있다.
이러한 고립의 시대에 냉전이라는 물리적 장벽을 넘어 세계적인 업적을 이룬 크노로조프의 연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 자명하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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