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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석공공석도" "송하취면도"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나물 캐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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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석공공석도" "송하취면도"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나물 캐기"

새샘 2024. 3. 13. 11:08

<석공이 마침내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되었네>

 

윤두서, 석공공석도,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23.0x15.8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숙종 연간의 뛰어난 문인화가라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 조선 중기의 마지막 화가로 언급되기도 하고 후기의 선구적인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구시대의 막내이자 신시대의 선구였기 때문이다.

 

공재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사항 하나는 그가 화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실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조선 후기 속화俗畵(풍속화)의 선구가 된 것은 그의 학자적 삶의 과정이자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공재가 이룩한 회화적 업적을 올바로 평가하기 힘들다.

 

공재는 해남윤씨 명문가 출신으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할아버지이다.

당색은 남인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이 심해지면서 남인에게는 출셋길이 열리지 않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며 지냈다.

그러다 46세 되는 1713년 해남으로 낙향했다.

그러고는 2년 뒤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재는 실학의 선구였다.

훗날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공재의 학문에는 항상 '실득實得'(실제로 얻음)이 있었다며 공재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어디 가서 물어볼 곳이 없다"고 하면서 "하늘은 왜 나의 분신을 빼앗아갔는가"라고 통탄했다.

 

벗들이 증언하는 공재의 모습은 외모를 보면 장수와 같으며 그 기상은 일국의 재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공재의 그런 인간상에 대해서는 그의 유명한 <자화상>에 담헌湛軒 이하곤李夏坤이 붙인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육 척도 안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었네

   긴 수염 길게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사냥꾼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공재가 오늘날 이름을 남긴 것은 그림이지만 시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공재의 시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낙향 이전과 이후가 완연히 다르다.

일찍이 공재는 <옥玉>이란 한글 시조를 지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리시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 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긍지와 자기 다짐이 들어 있다.

어쩌면 옥으로 빛을 볼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남아 있던 때의 작품인 것 같다.

공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윤두서, (왼쪽) 송하취면도,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2.4x22.6cm, 해남윤씨종가, (오른) 짚신 삼기, 보물 제481-1호,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2.4x21.1cm, 해남윤씨종가(사진 출처-출처자료1)

 

공재의 이런 모습은 그림에서도 똑같았다.

어렸을 적에 ≪당시화보唐詩畵譜≫ 같은 그림 교본을 보며 연습했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는 화본풍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중기의 화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공재의 화본풍 그림은 대개 선비의 은일자적 삶을 보여주는 소재가 많다.

 

<송하취면도松下醉眠圖>를 보면 나무 그늘에서 술에 취해 누워 있는 선비를 그린 것으로 느긋하고 한가로운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인물 묘사가 정확하고 표정도 살아 있다.

공재의 뛰어난 데생력은 실제로 마구간에서 말을 보며 스케치하거나 동자를 모델로 세워놓고 데생하면서 얻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해남으로 낙향한 이후에는 사정이 전연 다르다.

시골집의 풍경을 노래한 <전가즉사田家卽事>라는 시에 이르면 공재는 대단히 현실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모기는 일어나고 파리는 잠드니 날이 더울까 두렵고

   푸르고 설익은 보리는 밥을 끓여 이를 수 없구나

   이웃집 개는 짖고 외상 술빚은 급한데

   고을 서리마저 세금을 재촉하러 깊은 밤 문에 이르렀구나"

 

공재는 그림 속에서 현실을 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짚신 삼기>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졸고 있던 선비를 짚신 삼는 농부로 대치시킨 것이다.

선비의 자리에 농부를 그렸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동시대에 이런 과감한 변화를 보여준 것은 공재뿐이었다.

그러나 배경 처리는 여전히 관념적인 것을 보면 그는 여기서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리얼리즘 realsim(사실주의)의 획득이란 이처럼 어렵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윤두서, 목기 깎기, 보물 제481-1호, 1719년, 모시에 수묵, 32.4x20.0cm, 해남윤씨종가(사진 출처-출처자료1)

 

윤두서, 나물 캐기, 보물 제481-1호,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0.2x25.0cm, 해남윤씨종가(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처럼 그림 속에 현실을 담아가던 공재는 결국 현실 자체를 그림으로 그리기에 이르렀다.

바로 <목기 깎기>, <나물 캐기>, <석공공석도>와 같은 그림들이 이에 해당한다.

 

<석공공석도石工功石圖>는 한 석공(석수石手)이 조수와 함께 돌 캐는 모습을 현장감 있게 그렸다.

정을 잡고 있는 석공은 조수가 쇠망치를 내리치는 순간 돌가루가 얼굴에 튀어오를 것을 예상하여 고개를 젖힌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 표정을 생생히 표현하기 위해 눈가에 수정을 가했다.

이처럼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석공공석도>는 조선 후기 속화의 개막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훗날 18세기의 유명한 감식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은 다음과 같은 뜻깊은 화평을 남겼다.

 

  "이 <석공공석도>는 공재가 그린 것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속화이다

   우석공공석도右石工功石圖 내공재희묵乃恭齋戱墨 이속소위속화야而俗所謂俗畵也"

 

석농은 이 글에 뒤이어 공재의 그림은 자못 사실성을 보이고는 있지만 "관아재觀我齋에 비한다면 한 수 아래라 하겠다"는 평을 가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조선 후기 속화에서 관아재 조영석,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공재가 열어놓은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생긴 이후에야 너도나도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시대가 어디로 가야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막상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는 그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때 풀섶을 헤치며 새로운 길로 나선 사람을 선구라고 할 수는 있어도 후배보다 덜 각성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순례자는 말한다.

공재가 관아재만 못해 보인 것은 세월의 한계였지 공재의 한계는 아니었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3.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