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서론,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1: 서론, 토지의 변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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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서론,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1: 서론, 토지의 변화

새샘 2024. 3. 4. 22:52

중세 말기 1328년 유럽 대륙과 지중해 영역(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84%B8_%ED%9B%84%EA%B8%B0)

 

4부 중세에서 근대로  서론

 

20세기 역사가들 대부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Italian Renaissance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Protestant Reformation이야말로 중세를 종식시키고 근대 세계를 활짝 연 유럽사의 극적 분기점이라고 설명한다.

분명 16·17세기에는 유럽인의 삶에 결정적 변화가 있었다.

유럽의 선원, 병사, 상인 등은 범세계적인 교역망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서반구의 풍부한 광물과 농업자원을 대서양 항구로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을 깨뜨렸고 종교전쟁의 한 세기는 그 분열을 한층 고착화시켰다.

한편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문화적·지적 흐름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16·17세기에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의 대부분이 중세 말기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16세기 유럽인의 세계 일주 항해는 13세기의 '대서양 지중해' 정복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특징짓는 고전 그리스·로마 문헌 연구는 12·13세기의 고전 부활에서 발전된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이론도 중세 말기의 신학 논쟁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발달은 유럽, 이슬람 세계, 비잔티움 사이의 지속적인 문화적·경제적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10장 서론

 

중세 말기를 서술하는 역사책들은 대체로 우울하다.

중세 말기는 전통적으로 분열과 위기의 시대로 간주되었다.

중세 전성기 세계가 혼돈과 폭력 속에 붕괴하면서, 사회적·정치적 봉기, 종교적 환멸, 광범한 심리적 불안이 표출된 시기라는 것이다.

이 재앙의 시대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고 농사는 흉년이 들었으며 경제는 위축되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거센 비판이 있었지만 종교생활의 개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마저 나빠졌다.

민감한 독자라면 이 모든 것에 몸서리를 친 나머지 재빨리 쪽을 넘겨 이탈리아 르네상스―통상 중세 말기의 재난, 죽음, 쇠퇴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 뒤에 나오는 장―의 햇살 가득한 풍경으로 넘어가고 싶을 것이다.

 

14·15세기가 유럽인에게 역경의 시대였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근과 전염병이 엄청난 인구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 빈번히 발생했으며 경제는 위축되었다.

그리고 교황은 70년 동안이나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었고, 로마로 귀환한 다음에는 위신이 더욱 실추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를 간단히 불행과 어둠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기근, 전쟁, 전염병에 맞서 유럽인이 보여준 용기와 유연성을 그릇되게 전달한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유럽 사회가 그로부터 400년 동안 이룩한 수많은 근본적 변화를 놓치게 만들 것이다.

유럽 문명은 중세 말기의 거센 도전에도 붕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기는 중세 전성기의 가장 영속적인 특징을 보존해 근대 초기로 확대시킨 창조와 혁신의 시대였다.

 

 

◎토지의 변화

 

1300년 무렵에 이르러 중세 전성기의 농업 팽창은 한계점에 도달했다.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유럽 인구는 세 배로 늘었다.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유럽은 아일랜드 Ireland에서 폴란드 Poland를 거쳐 우크라이나 Ukraine에 이르기까지 온통 곡물 경작지로 뒤덮힌 대륙이 되었다.

몇백 년 동안 밀, 보리, 호밀, 귀리 등을 경작해온 서유럽의 농업 중심지에서도 곡물 증산 압력 때문에 농촌 풍경이 극적으로 변화되었고, 그것은 유럽 농업의 장기 지속 가능성을 훼손했다.

숲은 개간되고 습지는 배수 처리되었으며 목초지는 줄어들었다.

이 모두가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도시 인구의 팽창은 유럽의 곡물 생산자에게 유리한 시장을 제공했고, 크기가 커진 유럽 선박은 곡물 수송을 이전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간신히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1300년 무렵 유럽 대륙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생태학적·기술적 한계점에 도달했다.

 

14세기 초까지의 농업 환경은 곡류 농작물 집약 경작―유럽 문명의 집약 경작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에 대체로 유리했다.

12·13세기에는 따뜻해진 기후 때문에 북유럽의 식물 성장기간이 늘어났고, 그 덕분에 가축에게 풀을 뜯기거나 과수 재배에 더 적합했던 황무지나 소택지에서도 곡물이 자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부터 북극 지방을 시작으로 온난화 추세가 역전되었고, 14세기 중반부터는 유럽의 기온이 점차 하락했다.

이 변화는 대대적인 격동은 아니었다.

연평균 온도가 섭씨 1~2도 내려갔고 그 상태가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강우량에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엔 충분한 것이어서, 작물의 성장기간을 단축시키고 북유럽 곡물 농업의 생산성을 저하시켰다.
특히 그린란드 Greenland 같은 변경 지역이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15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린란드에서는 유럽인 거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장기적 기후 변화에 직면한 유럽 경제의 취약성은 1315년에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해에 대기근이 유럽을 덮쳐 7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기는 했지만 대기근의 근본 원인은 기후에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1310년과 1330년 사이에 북유럽의 겨울은 지독히 추웠고, 여름은 계절에 걸맞이 않게 차고 습했다(아마도 인도네시아의 대규모 화산 폭발에 따른 화산재로 대기가 흐려진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1315년부터 봄과 여름에 폭우가 쏟아져 파종된 밭을 휩쓸어버렸고, 여름에는 이상 저온으로 인해 그나마 살아남은 곡물의 성장이 지장을 받았다.

유럽인은 이런 조건에서 약간의 인명 손실을 감수하며 1~2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불리한 기후 조건은 1315~1322년에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대규모 아사餓死(굶어 죽음)였다.

영양실조로 허약해진 사람과 가축들은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1322년 자연 조건이 호전되기 시작했을 무렵, 알프스 Alps와 아르 강 Loire River 북쪽의 유럽 인구 가운데 10~15퍼센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1322년 이후에도 기후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추운 겨울은 133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333년 홍수로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의 다리가 떠내려갔고, 1343년에는 쓰나미 tsunami(진파津波)가 아말피 항 Amalfi Harbor을 덮쳤다.

지진과 혜성은 불안과 불확실성을 가중시켰다.

그러고 나서 재앙이 밀어닥쳤다.

그 재앙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전조라고 생각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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