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북산 김수철 "산수도" "연꽃" "국화" "밤송이" 본문
"그대의 그림을 보면 근대가 가까움을 알겠노라"
북산 北山 김수철金秀哲(?~?)은 조선 말기, 철종 연간에 활약한 신비의 화가다.
북산의 삶과 예술은 모두 베일 속에 덮여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말기 회화사의 한 가닥 빛줄기였고, 19세기 중엽이 근대로 가는 길목임을 절감하게 한다.
북산은 동시대 누구와도 다른 신선한 감각의 참신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특히 20세기 서양의 모더니스트들이 특기로 삼은 형태의 요약과 변형, 즉 데포르마시옹 déformation(대상의 특정 부분이나 전체를 고의로 강조하거나 왜곡시켜 모양을 바꾸어 그리는 회화 기법)이 일품이었다.
색채 감각은 대단히 밝고 맑으면서 아련한 느낌을 주어 20세기 프랑스 여류 화가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을 연상케 한다.
어떤 면에서 21세기 한국의 화가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대에 북산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북산 김수철의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사앙士盎이라는 사실만 전할 뿐 생몰연대와 이력이 불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1820년 무렵에 태어나 1860년대까지 대략 40여 년의 짧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삶은 교우 관계를 통해 확인되는데 절친한 친구로는 대여섯 살 아래인 고람 전기가 있다.
고람의 이초당 약방에는 중인 문사와 화원들이 많이 모여 예원을 이루었다.
고람은 서화 매매를 중개하기도 했다.
고람의 편지를 모은 ≪전기척독집첩田琦尺牘集帖≫에 이런 편지가 들어 있다.
"부탁하신 북산의 <절지도折枝圖>는 마땅히 힘써 빨리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의 화필이 워낙 민첩하여 아마도 늦어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
북산의 병풍 그림을 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내가 거친 붓으로 제題하였는데 당신의 높은 안목에 부응하지 못할까 심히 염려되고 송구스럽습니다."
북산의 그림을 보면 화필이 워낙 민첩하다는 고람의 말에 고개가 끄덕인다.
북산은 고람의 또 다른 친구인 형당 유재소와 더불어 셋이서 잘 어울렸다.
형당은 북산보다 열대여섯 살 아래였으니 북산이 큰형뻘 된다.
≪형당화의첩衡堂畵意帖≫에는 북산의 큰형님다운 평이 하나 실려 있어 마치 베일 속 화가의 목소리를 듣는 듯 반가운 마음이 일어난다.
"지금 형당의 산수화 소폭을 보니 두세 그루의 나무 아래 한가로운 정자 하나를 더했구나. 푸른 하늘은 평야를 대하고 먼 산은 물들었으니 담묵의 붓끝으로 가을의 모습을 능히 드러냈구나. 이것은 모두 원나라 문인화가 예찬과 황공망 사이에 전하는 바인데 ········· 집집마다 얻고자 하나 일일이 응할 수 없으니 어찌 이를 초수初手의 그림이라 하겠는가."
북산의 행적 중 가장 확실한 것은 1849년에 열린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서화 경진대회에 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와 함께 '화루畵壘(화가 조) 8인'으로 출전한 것이다.
이때 추사 김정희는 북산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봄비 속에 가는 나그네)> : 구도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에 막힘이 없다. 다만 채색이 세밀하지 못하고 인물 표현에서 속기를 면치 못했다.
<계당납상도溪堂納爽圖(계곡가 초당에서 시원하게 더위를 식힌다)> : 대단히 잘 된 곳이 많으니 요즘의 아무렇게나 쓱쓱 그리는 법(솔이지법率易之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채색을 지나치게 한 것이 흠이다.
<풍엽심유도風葉尋幽圖(낙엽 휘날리는 그윽한 곳을 찾아가다)> : 필의가 약간 거칠고 너무 쉬운 느낌을 준다. 구도가 자못 좋다.
추사의 눈에는 북산의 그림이 잘 그린 것 같으면서 부족함이 있고,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아리송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예림갑을록≫ 당시 북산의 나이는 서른 남짓 되어 아직 그림이 무르익지 않은 때였고, 또 추사의 출제 문제가 ≪개자원화보≫ 등에 나오는 고전적인 화제였기 때문에 북산은 자기 기량을 한껏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산의 초년 시절에 그림 <방원인필의倣元人筆意 산수도>를 보면 추사의 평이 그럴 수 있었다고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북산의 멋과 개성, 매력이 잘 살아 있는 산수, 화훼 그림을 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답답한 문인화풍의 굴레를 시원스럽게 벗던졌다.
북산은 산이고 바위고 꽃이고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변형시키면서 이미지를 강조(데포르마시옹 화법)했다.
북산이 서른 살일 때 환갑이던 우봉 조희룡은 후배의 이런 자유자재한 모습이 대견한 듯 북산의 <매우행인도>에 다음과 같은 화제를 넣었다.
"산을 그리면서 진짜 산처럼 그리니 (화산여진산畵山如眞山)
진짜 산이 그림 속 산과 같네 (진산여화산眞山如畵山)
사람들은 진짜 산을 좋아하지만 (인개애진산人皆愛眞山)
나만은 그림 속 산을 사랑하다네 (아독애화산我獨愛畵山)
북산은 산수도도 잘 그렸지만 화훼도가 더욱 일품이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화훼10곡병>은 그의 초년작으로 일찍부터 꽃 그림에 마음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폭마다 화제를 달았는데 <작약도>에는 다음과 같은 화제를 달았다.
"간들간들 봄바람에 봄빛이 무르익고
안개는 자욱한데 행랑채에 달 비치네
이대로 밤이 깊어 꽃들이 다 잠들까봐
은촛대에 불을 붙여 단장한 얼굴 비쳐본다네"
북산은 이런 사랑의 감정으로 꽃을 대하며 데포르마시옹 기법을 구사하여 많은 명작을 남겼다.
간송미술관 소장 ≪북산화첩≫은 '기미년(1859) 가을날 석곶전사石串田舍에서 그렸다'는 관기가 들어 있다.
북산 나이 40세 무렵으로 사실상 그의 만년작인 셈인데, 대단히 아름다운 꽃 그림이 여러 폭 실려 있다.
북산은 어떤 인간상을 갖고 있었기에 이처럼 간일簡逸(간략하고 뛰어남)하면서도 아름다운 화훼도를 남겼을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춘방春舫 김영金瑛은 북산의 <석죽도>에 제를 쓰면서 그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고인(북산)은 옛것을 좋아하고 취미 또한 담박하여 기암괴석과 그윽한 피리 소리를 마음 깊이 좋아하였다오.
그를 위하여 서재 아래서 운림의 경치를 그리노라니 밝은 달 봄 이슬에 옷과 수건 적신다오."
북산이 즐겨 그린 꽃은 매화, 국화, 작약, 백합 그리고 연꽃이었다.
특히 연꽃 그림에서 감각과 기량을 한껏 발휘했다.
연꽃, 연잎, 연줄기 모두 속필로 이미지만 요약하고, 꽃잎에 악센트를 찍듯 산뜻한 분홍빛을 살짝 가하여 더욱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줄기는 먹으로 스스럼없이 그어 올린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유탄柳炭으로 스케친한 엷은 자국까지 들어 있다.
그의 노란 <국화> 그림과 극사실 화풍의 <밤송이> 그림을 보면 북산의 현대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이동주는 북산을 '신감각파'라 했고, 안휘준은 '이색화풍'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북산 김수철이 보여준 '신감각의 이색화풍'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얼핏 떠오르는 것은 형상보다 사의寫意(그림에 담긴 뜻)를 중시했던 문인화풍의 정신, 개성으로서 괴怪가 용인되었던 추사 시대의 분위기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근대라는 시대감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북산 김수철은 자신의 감성과 시대감각을 저버리지 않은 화가인 셈이다.
감각에도 천분이 있다면 북산 김수철은 감성의 천재화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0. 1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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