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중국 황제도 반한 고조선의 젓갈 본문
"오뉴월 보리밥엔 새우젓이오 한겨울 김치국엔 어리굴젓이오
장장 나지 않는 꼴뚜기젓이오 막걸리 안주 삼는 갈치젓일세."
-노동요 <새우젓 파는 소리>-
○수천 년을 이어온 바다의 감칠맛
고대인들의 식생활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유물이 바로 조개무지(조개더미, 조개무덤, 패총貝冢)이다.
원래 조개무지는 고대인들이 집 근처에 만든, 일종의 쓰레기터이다.
음식물쓰레기 가운데 특히 조개껍데기(조개껍질)은 세월이 흘러도 썩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고대 바닷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에서는 조개껍데기만 수북이 쌓여 있는 흔적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개무지에는 조개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쓰레기도 같이 버려졌기 때문에 조개무지는 고대인의 생활을 제대로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조개무지가 영어로 shell midden(조개껍데기더미), shell kitchen midden(부엌쓰레기더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개는 예로부터 별미 음식으로 대접받아왔다.
조개의 주성분인 아미노산 amino acid이 주는 감칠맛 덕분이다.
하지만 북구 유럽을 제외한 연체동물 및 패류에 대한 의존도가 크지 않은 유럽 식문화의 영향으로 식량으로서의 조개는 다소 평가절하되어 있다.
최근까지도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인 Slavic들은 조개와 연체류 동물을 일절 먹지 않았다.
최근 일본의 초밥문화가 확산되면서 식습관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체 식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다.
사실 조개무지 발굴은 고고학자들에게는 힘든 과제 중 하나다.
작업 자체가 워낙 까다롭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조개껍데기와 생선뼈들을 일일히 분석해야 하는 아주 지루하고 긴 시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즐거움은 있다.
조개의 껍데기는 알칼리성이라서 일반적인 발굴에서는 볼 수 없는 뼈나 나무 같은 유기물질이 꽤 많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조개무지 발굴을 처음 경험한 곳은 1990년대 초,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 근처였다.
벌교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떤 주민이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오리구이 음식점을 만들면서 집을 개축했고, 그 과정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되었다.
굴껍데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꽃삽 대신에 호미로 살짝 긁고 굴껍데기 사이사이의 생선뼈와 유물들을 거둬야 했다.
자잘한 생선가시들은 핀셋으로 집거나 나중에 흙을 체질해서 수거했다.
지금은 이런 생선뼈와 동물뼈를 전문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전문가가 드물어서 그 조개무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대 관심 있는 학자들의 손을 기다리며 일단 잘 정리해서 유물수장고에 보관해두었다.
조개무지가 주는 고대에 대한 정보는 실로 방대하다.
조개마다 번식하는 수온이 다르기 때문에 당시의 기후를 알 수 있으며, 조개무지에서 발견되는 조개는 당시 사람들이 즐겨 먹던 것들이니 그들의 식성도 알 수 있다.
또한 조개껍데기 사이에서 발견되는 다른 동물뼈 흔적을 통해서 다른 식생활의 자료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조개무지 자체의 위치는 바로 당시의 해안선을 뜻한다.
그러니 조개무지가 나온 지점을 이어보면 그 당시에 바닷물이 어디까지 올라왔나를 알 수 있다.
파전으로 유명한 부산 동래의 동래시장 근처에도 조개무지가 있고, 김해 시내 북쪽 언덕에 위치한 봉황대에도 조개무지가 있다.
부산 동래나 김해 봉황대처럼 지금은 시내 한가운데처럼 보이는 곳에 조개무지가 있었다는 것은 예전에는 해안이 그 근처에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조개무지와 옛날 기후에 근거한 지리학 연구를 참고하면 2000년 전의 현재 김해 시내 대부분은 바닷물이 들어왔거나 개펄 같은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해 봉황대는 바다 위에 언덕처럼 솟아 있어 배를 대기가 쉬웠기 때문에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기 좋았다는 뜻이 된다.
또 부산의 경우도 지금은 도시 한가운데인 동래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다는 뜻이 된다.
얼마 전 외국학자들과 함께 동래조개무지를 찾은 적이 있다.
시내 한가운데라는 내 말에 반신반의하다가 주택과 아파트들 사이에 위치한 조개껍데기가 쌓인 동래조개무지 유적을 보여주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
고대인들의 바다에 대한 지식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러시아의 원로 고고학자 브로댠스키 Brodyanski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러 국경인 두만강 근처에 있는 6000년 전 신석기시대의 보이스만 Boisman 조개무지를 분석하고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당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굴을 양식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보이스만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굴의 껍데기를 검토한 결과 당시 사람들이 석호潟湖 lagoon(동해안 영랑호처럼 모래부리나 모래섬 따위가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분리되어 생긴 호수로서, 지하를 통해 바닷물이 섞여들어 일반 담수호에 비해 염분이 높은 것이 특징) 근처에서 굴을 따서 먹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굴껍데기에는 자란 지 1년 이내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당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일부러 굴을 양식해 다 자란 굴을 땄다는 주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굴 양식은 지금과 같은 현대화된 양식과는 조금 다르다.
굴을 지속적으로 먹기 위해서는 굴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하다.
그러니 어린 굴을 마구잡이로 남획할 경우 굴의 생산량이 떨어져서 결국 그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의 생활도 위험해진다.
즉 굴의 집산지를 보존하고 이미 성숙한 굴을 따고, 또 굴이 자라는 곳을 적절히 관리했다는 뜻이다.
○젓갈의 역사
한국에서 젓갈이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이다.
신문왕이 결혼을 할 때 왕비가 가져온 음식 목록에서 '해醢(젓갈 해)'라는 글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젓갈을 뜻한다.
이 음식은 놀랍게도 러시아에서 널리 먹는 음식이다.
날생선살로 만든 샐러드이고 명칭도 '혜'이다.
'해'의 발음이 전이된 것이다.
'혜'라는 발음 때문에 처음 들으면 생선회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음식은 저민 생선살을 삭혀서 식초와 고춧가루 등을 섞은 것으로, 한국음식으로는 강원도 지역에서 먹는 가자미식해와 가장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의 혜는 바다생선이 아니라 주로 민물농어류를 재료로 쓴다.
사실 이 러시아의 혜는 함경도 지역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이 주로 먹던 음식이었다.
지금도 러시아의 전통시장에서는 고려인의 음식 사이에 이 혜가 어김없이 끼어 있다.
이러한 생선젓갈류는 내륙지방보다는 한반도를 포함한 황해 연안 일대에서 발달했다.
감칠맛과 식욕을 자극하는 향으로 인기가 높았던 생선 젓갈은 약 2000년 전 중국의 제왕을 반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을 비롯하여 여러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대 중국의 서적에서는 한무제의 입맛을 사로잡은 동이족의 젓갈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한무제가 동이를 쫓아 해안을 거닐다 구미를 돋우는 냄새가 코를 찔러서 그 사연을 알아보니, 어부들이 생선 내장을 땅속에 묻어서 발효시키는 토굴에서 나는 냄새였다.
한무제는 젓갈을 맛보고 그 감칠맛에 반했다.
원문에는 '자미滋味'라고 되어 있는데, 단순히 맛만 있는 게 아니라 영양이 풍부하고 고소하다는 뜻이다.
젓갈에 반한 한무제는 오랑캐를 쫓다가 찾아낸 진미라고 하여 축이鱁鮧(창난젓: 오랑캐를 쫓아낸다는 뜻)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동이족들은 산둥(산동)성 또는 고조선 부근에 살고 있는 부족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 한무제 재임 시절에 있던 주요 전쟁이 바로 서기전 109~108년에 벌어진 대고조선 전쟁이었다.
당시 한나라는 육군과 수군을 각각 출병시켰다.
수군의 출행지는 산둥반도 끝이었고, 육군은 요서 지역을 따라서 고조선으로 갔다.
고조선과의 1년 전쟁 끝에 결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켰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 '오랑캐를 쫓아낸다'라는 뜻의 이 음식은 고조선과의 전쟁 과정에서 얻어낸 젓갈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의 전리품인 셈이다.
축이의 또 다른 해석으로는 고조선이 아니라 산둥반도 일대를 순행하던 차에 산둥 지역 해안가 사람들의 별미를 맛보았다는 뜻도 된다.
'축이'를 '오랑캐의 문화를 따라가다'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그 맥락은 비슷하다.
산둥 지역에서 랴오둥(요동)반도, 나아가서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발해만 일대는 같은 어로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을 포함하여 황해 연안을 따라서 널리 젓갈문화가 있었고, 그것이 한나라의 황제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에서도 젓갈을 만들었던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로 이와테현(암수현岩手県) 미야노(궁야宮野) 조개무지[일본 도후쿠에 있는 조몬(승문繩文)시대(한반도 신석기시대에 해당)의 조개무지]가 있다.
미야노 조개무지에서는 몸 전체 길이가 10센티미터가 안 되는 멸치, 정어리와 고등어 새끼 같은 뼈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생선들의 등뼈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멸치류의 뼈는 2만 7000마리분에 해당한다.
우연히 큰 생선의 뱃속에서 떼로 남아 있었던 흔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보통 이 지역의 가다랑어 같은 대형 물고기의 뱃속을 조사하면 50개 내외의 자잘한 뼈들이 발견된다.
학자들은 여러 검토 끝에 이 자잘한 생선뼈들은 바로 젓갈을 만들어낸 흔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생선뼈가 남게 되었을까?
바로 현대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먹는 생선 액젓에 그 해답이 있었다.
생선 젓갈은 내장이나 전체 생선의 살을 삭혀서 먹기도 하지만, 액체 형태로 만들어서 음식의 조미료나 소스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베트남 Vientnam의 유명한 생선젓갈인 느억맘 nướcmắm(영어 Nuoc Mam)에서 한국의 까나리, 멸치 액젓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액젓들은 공통적으로 자잘한 생선으로 만든다.
생선이 기름지고 크기가 작을수록 발효가 잘 되어서 젓갈 만들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젓갈을 만드는 기본 원리는 생선을 발효시킨 뒤 액젓만 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젓갈을 만들고 나면 수많은 자잘한 생선의 뼈들은 버려진다는 얘기다.
미야노 조개무지의 비밀은 바로 수천 년을 이어온 젓갈에 있었다.
○5000년 전의 식중독
한편, 조개무지는 엉뚱한 증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1930년대에 일본 지바현(천엽현千葉県)의 오야마(대산大山) 조개무지(동경 북쪽 바닷가에 있는 조몬시대의 조개무지)에서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부부와 어린이를 포함한 5기의 사람뼈가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
집 안에서 사람뼈가 발견되는 일은 많지는 않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
전염병이나 적의 침입으로 한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몰살되는 경우 시신을 두고 집을 버리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뼈에는 폭력의 흔적 같은 것이 남는다.
전염병이 원인인 경우 시신과 함께 집을 통째로 불태운다.
병균이나 인플루엔자의 존재 자체는 몰랐어도 역병의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오야마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사람뼈에는 그런 흔적이 없었다.
특이하게도 집 안에서 대량의 복어뼈도 함께 확인되었는데, 이 때문에 복어의 독에 의한 식중독 설이 대두되었다.
복어의 알과 내장에 있는 테트로도톡신 tetrodotoxin의 위험성은 고대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복어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생선으로 사랑받았다.
고대의 여러 조개무지들은 물론 한국의 삼국시대 유물에서도 복어의 뼈가 많이 발견된 것이 그 증거다.
대량의 복어뼈가 발견되었으니, 이 가족들도 복어요리를 자주 즐겼던 것 같다.
○신라와 가야인이 사랑한 상어고기
조개무지나 집자리와 달리 무덤에서 발견되는 동물뼈 조각들은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이들은 저승으로 떠난 사람에게 보내는 제사음식의 흔적들이다.
그러니 특정 부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2500년 전 러시아 알타이 Altai 지역의 파지릭인 Pazyryk들은 관 옆에 죽은 사람이 평소에 쓰던 목제 쟁반을 놓고 그 위에 양의 꼬리뼈 부분 고기와 함께 잘라먹을 수 있도록 철제 칼을 같이 놓았다.
거의 대부분의 무덤에서 양의 꼬리뼈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 제사에 꼭 필요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그 옆으로 1~2개의 토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액체를 저을 수 있도록 나무로 된 숟가락도 들어 있었다.
이 토기에 담긴 것은 단순한 우유가 아니라 케피어 kefir(요구르트 yogurt)나 마유주馬乳酒(말젖으로 만든 술) 같은 발효가 된 음료였을 것이다.
심지어는 토기 받침대도 나왔는데, 3개의 고리가 서로 붙어 있었다.
아마 음식을 바칠 때 토기의 순서나 위치를 틀리지 않고 가지런히 놓게 하는 용도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제사음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바로 신라의 대표적인 왕족 고분인 황남대총이다.
황남대총은 부부의 무덤을 연달아 만든 것으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한 5세기의 신라를 대표하는 지름이 가장 큰 고분이다.
이 고분에서는 수많은 황금과 은제 유물들과 함께 수백 점의 토기들도 발견되었는데, 이 토기에는 주로 왕과 왕비를 위한 제사음식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항아리 3개에서 나온 뼈를 분석해보니 소, 말, 닭, 꿩, 오리 등이 나왔다.
해산물로는 바다사자, 참돔, 졸복, 다랑어, 농어, 상어, 조기 등이 나왔다.
바다사자를 제외하면 지금도 수산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어패류로는 전복, 오분자기, 소라, 눈알고둥, 밤고둥, 논우렁이, 홍합, 재첩, 백합, 거북의 조각뼈가 나왔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이 바로 상어고기다.
돔베기(돔배기, 돔바리: 셋 모두 돔발상어의 사투리)라 불리는 상어고기는 경상북도 일대의 제사상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다.
황남대총뿐만 아니라 신라에 편입된 압독국押督國의 귀족들이 남긴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고분유적에서도 상어뼈가 출토되었다.
이제까지 발견된 고분의 상어뼈를 보면 4세기 무렵부터 경주, 울산, 포항 일대에서 상어고기를 제사용으로 쓴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신라의 세력이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대구를 거쳐 안동까지도 확대되었다.
이를 '상어(돔베기) 문화권'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릇에 고깃덩어리를 얹은 흔적으로 발견되지만, 아예 상어가 통째로 무덤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경산 임당동과 함께 또 다른 압독국의 고분인 경산 조영 E-1호 고분에서는 순장자의 발쪽에 머리 부분이 없는 상어를 3마리씩 놓았다.
그 밖에도 방어, 복어, 잉어 같은 생선뼈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당시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상어를 잡으면 곧바로 머리를 제거해 통째로 염장을 한 뒤 내륙 지역으로 운송했던 것 같다.
지금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돔베기가 제사상에 오르곤 한다.
그런데 왜 유독 이 지역 사람들이 상어를 좋아했을까.
단순하게 당시 한반도 동남해안에 상어가 많이 잡혀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에는 그들만의 비법이 있는 법이다.
상어는 주로 내륙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으니 당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독특한 염장기술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옛날 가야와 신라인을 사로잡았던 염장 상어의 맛은 어땠을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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