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1: 서론, 루터의 봉기 본문
13장 서론
200년 동안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소용돌이를 거친 유럽은 1500년에 접어들어 완연한 회복 추세에 있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는 확대되었으며 도시는 성장했고 프랑스 France, 잉글랜드 England, 에스파냐 España, 스코틀랜드 Scotland, 폴란드 Poland 등 국민적 군주국가의 왕권은 모두 확고해졌다.
유럽 각국의 정부는 신민의 삶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 강화하고 있었다.
14세기 말의 휴지기를 거친 뒤 유럽은 상업적 팽창과 식민지 확대를 다시 시작했다.
16세기가 밝아오면서 가톨릭교회의 세력도 나날이 커졌다.
교황청은 이탈리아 Italia에서 영토 전쟁의 흙탕물 속에 빠져 있었지만 교회 자체는 15세기 내내 교회를 휘감았던 폭풍우를 뚫고 나아갔다.
롤라드파 Lollards는 진압되었고 후스파 Hussites는 교회 안에 흡수되었다.
공의회公議會 수위설首位說 Conciliarism(교회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며, 필요하다면 교황을 폐위할 수 있다는 이론)을 둘러싼 투쟁에서 교황은 유럽의 모든 주요 지배자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고, 공의회주의자를 파리 대학의 학문적 영역 안에 고립시켰다.
한편 교구 평신도의 신앙적 헌신은 전에 없이 드높았다.
교구 성직자의 교육수준이 전에 비해 높아지기는 했지만, 개혁가들은 수많은 사제가 여전히 자리를 비우고 있으며 영적 의무에 무지하거나 소홀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수도원 제도는 대체로 영적 활기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대중적인 종교 열기는 신자들을 형편없는 미신과 교리적 오류로 이끌곤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유럽의 전망'은 지난 수백 년에 비해 가장 밝아 보였다.
1500년의 그 누구도 앞으로 50년 이내에 유럽의 종교적 통합이 새롭고도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그리스도교도敎徒 또는 개신교도改新敎徒 또는 신교도新敎徒) 종교개혁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엄청나고도 비범한 사건은 놀랍게도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1483~1546)라고 하는 한 독일 수도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죄, 은혜, 그리스도교적 구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향한 루터의 개인적 추구는 전 유럽에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수백만 유럽인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게 했고,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불문하고 유럽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종교 관행에 영향을 미쳤다.
루터가 촉발한 종교 운동은 루터 한 개인보다 훨씬 거대했다.
마르틴 루터 개인의 영적 탐색 과정을 프로테스탄티즘 전체의 축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종교개혁 (Protestant) Reformation 운동이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시작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종교 운동이 초래한 비범한 격동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루터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루터의 봉기
독일 Germany에서 루터의 반란이 성공한 이유를 설명하려면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에 답변을 해야 한다.
첫째, 루터의 신학 사상은 왜 그로 하여금 로마와 단절하도록 만들었는가?
둘째, 왜 수많은 독일인이 그의 주장에 동조했는가?
셋째, 왜 그토록 많은 독일 군주와 도시가 자기 영지에 새로운 종교를 영입했는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루터를 추종한 사람들에게 루터의 메시지는 각기 다른 이유로 호소력을 지녔다.
농민은 새로운 종교가 영주의 강탈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도시와 군주는 새로운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강화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민족주의자는 새로운 종교가 중부 이탈리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사복私腹(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심)을 채우는 외국인 교황의 요구로부터 독일을 자유롭게 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루터 추종자는 자신이 새롭게 받아들인 루터파 그리스도교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지만, 동시대 가톨릭은 구원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개혁'이란 말은 루터가 출발시킨 운동에 대해 잘못 붙인 이름이다.
루터는 동시대 그리스도교의 타락을 정화하고자 하는 개혁가로서 출발했지만, 즉각 가톨릭의 믿음과 관행의 근본 원리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 옮아갔다.
수많은 루터 추종자는 한층 더 급진적 성향을 띠었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 운동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말기 종교생활의 근간을 겨냥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루터의 종교적 확실성 추구
마르틴 루터는 궁극적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 그는 부친에게 끔찍이도 실망을 안겨주었다.
루터의 부친은 독일 튀링겐 Thüringen의 농민 출신이었지만 광산을 임대해 재산을 모았다.
그는 똑똑한 아들이 출세하기를 희망해서 어린 루터를 에르푸르트 대학 Erfurt University에 보내 법학을 공부시켰다.
그러나 1505년 마르틴은 아우구수티누스 수도회 Augustinian Monastery의 수도사가 됨으로써 부친의 기대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루터는 한미寒微한(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부친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전 생애를 통해 마르틴 루터는 소박하게 살았으며 독일 농민의 질박質樸/質朴한(꾸민 데가 없이 수수한) 속어로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종교사에 등장한 많은 위대한 인물처럼 루터는 극적인 개종改宗 경험을 통해 종교적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다.
수도사 시절 젊은 루터는 갖가지 전통적 수단을 동원해 열정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는 꾸준히 금식과 기도를 실행하는가 하면, 어찌나 고해를 자주 했던지 고해 청취에 기진맥진한 고해 사제가 정말 고해다운 고해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간음 같은 죄다운 죄를 저지르고 오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음에도 루터는 영적인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구원이라는 큰 은사를 얻을 만큼 충분한 선행을 결코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1513년 그는 내면에 큰 위로가 될뿐더러 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게 될 깨달음을 얻었다.
루터를 통찰로 인도한 것은 신神의 의義와 관련된 문제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신이 공정치 못하다는 생각으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루터가 보기에 신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계명誡命(종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을 내렸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간을 영원한 저주로 벌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텐베르크 대학 Wittenberg University에서 성서 신학 교수가 된 후(그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사들 중 상당수가 이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루터는 성경 연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다.
특히 "주님의 의義 righteousness 가운데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시편詩篇> 구절을 묵상하던 중, 그는 신의 의義가 신의 징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믿음을 통해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신의 긍휼矜恤 compassion(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과 관계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나중에 루터가 썼듯이, "마침내 신의 긍휼로 말미암아 나는 신의 의가 신의 긍휼 가운데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여기에 이르자 나는 마치 새롭게 태어나 활짝 열린 천국의 문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루터가 이 운명적인 계시를 접한 곳이 수도원의 탑 꼭대기 방이었으므로 이 체험은 흔히 '탑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그 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1513년 이후 몇 년 동안 비텐베르크에서 바울 Paulus(영어 Paul) 서한을 강의하면서 루터는 성 바울의 <로마서>에 나오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1:17)는 구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앙만에 의한 의인義認(하나님이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인정함)'이라는 그의 핵심 교리에 도달했다.
루터는 신의 '의義'는 구원을 위해 끝없는 선행과 종교 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선행에 의해 구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구원받도록 예정된 자에게 공로 없이 주어지는 신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이 은혜는 믿음의 은혜를 통해 인간에게 오기 때문에,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즉 구원에 합당하게 된다.
믿음을 통해 신에 의해 의롭게 여김을 받은 사람들은 경건과 자선을 행함으로써 그 사실(의롭게 되었음)을 입증하게 되지만, 그런 선행 자체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경건과 자선은 신자 개개인의 보이지 않는 영적 상태―오직 신만이 그것을 안다―의 가시적 표지일 뿐이다.
루터가 독창적으로 이 교리의 핵심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400년 무렵 성 아우구스티누스 Sanctus Augustinus(영어 Saint Augustine)의 예정설로 되돌아간 것이었다(아우구스티누스는 루터가 속한 수도회의 수도성인이었다).
그러나 12·13세기를 거치는 동안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Petrus Lombardus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 같은 신학자들은 (성서를 통한) 교회 자체의 역할과 신자 개인이 (경건과 자선의 행위를 통한) 구원 과정에서 행할 수 있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매우 상이한 구원관을 발달시켰다.
이들 신학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인간이 선행만으로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세 말기 교회는 구원 과정을 정량적으로 환산해 제시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그와 같은 오해를 조장했다.
예를 들어 신자가 순례나 경건한 기부 같은 특정한 공덕을 실천함으로써 신에 대한 고해의 횟수를 정해진 만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었다.
14세기부터 교황은 그러한 특별 은사를 '공덕의 창고'―천국의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놓은 잉여 산행의 창고―에서 꺼내 산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476년 이후 교황은 연옥을 신속히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그런 여분의 은혜를 죽은 자에게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대개의 경우 창고에서 꺼낸 은혜는 면벌부를 통해 필요한 죄인에게 배급되었는데, 그것은 사제가 고해성사의 일부로서 그리스도교도에게 부과한 참회 의무의 특별 면제를 의미했다.
11·12세기에 면벌부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는, 십자군 같은 영적 훈련 참가에 의해서만 면벌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면 교황이 지지한 캠페인에 금전을 납부한 대가로 빈번히 면벌부가 허용되었다.
많은 개혁가들에게 이것은 마치 성직 매매처럼 보였다.
그것은 은혜를 돈으로 판매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 Erasmus 같은 16세기 초 교회 개혁가들은 이런 식의 악습을 폭넓게 비판했다.
그러나 면벌부 및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에 대한 루터의 반대는 한층 급진적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루터의 반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전제―그것을 논리적 귀결까지 밀고 가면 동시대 가톨릭 종교 관행의 상당 부분이 폐지되어야 했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첫 걸읆을 떼었을 때 그것이 로마와의 결별로 귀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닌 사상의 함의가 명료하게 드러났을 때 루터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적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달리 할 수 없나이다."
○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의 기원(1450~1528년) | |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들의 개혁 요청 독일 대학의 성장 루터, 95개조 논제 써 붙이다 루터가 이단 혐의를 받다 루터의 신학적 전제 출간 보름스 국회, 루터로부터 법의 보호를 빼앗다 농민반란 패배 루터, 츠빙글리와 결별 |
1400년대~1500년대 1450~1517년 1517년 1519년 1520년 1521년 1525년 1529년 |
루터는 자신의 신학 사상을 처음에는 대학 강의에서 설파했으나,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교회의 몇몇 관행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마침내 공격에 돌입했다.
1517년 독일에서 있었던 면벌부 판매는 매우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
지극히 세속적인 성직자인 호엔촐레른 가문 Haus Hohenzollern의 알브레히트 Albrecht(1490~1568)는 브란덴부르크 Brandenburg 선제후選帝侯 Princeps Elector(영어 Prince-Elector: 신성로마제국에서 1356년에 황금문서에 의하여 독일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의 동생이었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로 엄청난 빚에 허덕이고 있던 그는, 1513년 마그데부르크 Magdeburg와 할버슈타트 Halberstadt 두 곳의 주교직을 유지―그는 당시 23세로 주교가 되기에는 나이가 턱없이 모자랐다―하는데 필요한 교황의 허가를 얻기 위해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듬해 마인츠 Meinz 대주교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 자리를 얻으려면 더 많은 돈을 로마 Roma(영어 Rome)에 납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알브레히트는 그 자리에 올랐다.
필요한 자금을 독일의 금융 재벌인 푸거 Fugger 가문으로부터 대출받은 알브레히트는 교황 레오 10세 Pope Leo X(재위 1513~1521)와 흥정을 벌였고 교황은 그의 교구 안에서 면벌부 판매를 허용했다.
면벌부 판매 허락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수입금의 절반은 성 베드로 바실리카 예배당 Basilica Sancti Petri(이탈리아어 Cappella della Basilica di San Pietro, 영어 St. Peter's Basilica Chapel) 건립을 위해 로마에 지불하고, 나머지 절반은 푸거 가의 빚을 갚기 위해 알브레히트의 몫이 된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알브레히트의 지저분한 거래 내막을 상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도미니쿠스 Dominicus(영어 Dominic) 수도사 테첼 Tetzel이 푸거 가의 대리인을 데리고 다니며 북독일 전역에서 면벌부 행상을 하고 다닌다는 것, 그리고 면벌부를 사기만 하면 본인이나 이미 죽어 연옥에 있는 친지까지도 즉각 천국으로 오르게 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을 알았다.
루터가 보기에 이것은 이중으로 잘못이었다.
테첼의 설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루터의 확신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돈 주고 면벌부를 사기만 하면 사제에게 죄를 고해할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첼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구원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가톨릭의 면벌부 교리를 반박하는 95개 조 논제를 대학 동료들에게 제시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루터의 95개 조 논제에서 출발한 것으로 간주된다.
루터는 처음에는 테첼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반박문을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로 썼는데, 이것은 그가 비텐베르크 대학 내부에서의 학문적 토론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루터의 논제를 번역해 출간했고, 이 때문에 이름 없던 이 수도사는 일약 악명을 얻게 되었다.
대학 밖에 있던 테첼과 그의 동조자들은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하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는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용감하게 교회 정부에 공격을 퍼부었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1519년에 벌어진 라이프찌히 토론 Leipzig Debate(독일어 Leipziger Disputation)에서 루터는 대담하게도 교황과 성직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며 한 개인의 양심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위는 성경의 진리뿐이라고 주장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 수도사를 이단자로 기소하는 것으로써 대응했다.
그 후 루터에게는 가톨릭교회와의 완전한 결별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창조적인 활동은 1520년에 있었다.
그해에 그는 자신의 세 가지 신학적 전제前提(먼저 내세우는 것)인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또는 칭의稱義), 성경의 수월성, '만인 사제주의' 등을 설파한 일련의 소책자(팸플릿 pamphlet)를 작성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첫 번째 전제—신앙에 의한 의인—의 의미에 관해 살펴본 바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성경에 나와 있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전승보다 중요하며 성경에 분명한 근거를 두지 않은 믿음(연옥 등)과 관행(성인에 대한 기도 등)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 번째 전제로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교도가 신 앞에 영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는 사제, 수도사, 수녀가 그 직분에 의해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갖는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만인 사제주의'를 주장햇다.
이러한 전제들로부터 여러 가지 실제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선행은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었으므로 루터는 금식, 순례, 유물 경배가 영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선언했고, 모든 수도원과 수도회의 해체를 요청했다.
또한 그는 교회 의식의 비신비화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교회 예배의 라틴적 요소를 독일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성사聖事의 수를 일곱에서 둘(세례와 성찬, 1520년에는 고해도 성사에 포함시켰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꿨다)로 줄였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성만찬의 성별된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한다고 여전히 믿었지만, 미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재현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했다.
루터는 성사가 오직 신자 개개인의 믿음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신에게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직자에게 아무런 초자연적 권위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을 사제司祭라 부르는 대신 목사牧師 또는 목자牧者라고 부를 것을 주장했다.
그는 또 교황, 주교, 부주교 등 교회의 계서제 전체를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끝으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아무런 영적 구별도 없다는 굳은 확신을 품을 루터는 목사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그 자신도 1525년에 아내를 얻었다.
○로마와의 결별
인쇄술의 힘으로 널리 유포된 루터의 논쟁적인 1520년 소책자들은 많은 독일인을 흥분시켰고, 루터는 이 소책자들 때문에 대중의 광범하고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소책자들은 교황에 저항하는 국민적 종교 반란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매우 투박한 독일어 구어체로 루터는 이렇게 선언했다.
"만일 교황청을 99퍼센트 축소시킨다 해도 신앙 문제를 결정하기에는 여전히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
"추기경들은 이탈리아를 다 빨아먹더니 이제 독일을 빨아먹으려 한다."
로마의 부패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적敵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는 대상)의 권세라 해도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루터의 저항적 언사가 널리 확산되면서 그의 소책자들은 출판계에 일대 선풍旋風(센세이션 sensation)을 일으켰다.
1520년 이전에 간행된 출판물의 평균 발행부수는 1,000권 정도인데 비해 ≪독일 그리스도교도 귀족에게 고함≫은 초판이 4,000권이나 발행되어 불과 며칠만에 모두 매진되었고 그 후 수천 권이 추가로 인쇄되었다.
그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교황을 조롱하고 루터를 추켜세운 목판화들이었다.
수만 장이 팔려나간 이 그림들은 무식한 사람도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루터의 교황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교황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불만을 반영해주는 것이었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 Pope Alexander VI(재위 1492~1503)는 추기경들을 매수해 교황이 되었고, 1500년의 성년聖年(가톨릭에서 특별한 대사大赦를 베푸는 해)에 거두어들인 돈을 자기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의 군사원정 지원 자금으로 사용했다.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그는 친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와의 근친상간 혐의를 받을 정도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 Pope Iulius II(재위 1503~1513)는 재위 기간 내내 무력에 의한 교황령 국가의 확대에만 관심을 가졌다.
한 동시대인은 그가 세속 군주였다면 최고의 영예를 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루터와 대립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의 메디치 가문 House of Medici 출신으로, 유난히 타락하거나 부도덕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도취적인 탐미주의자로서, 현대의 한 가톨릭 역사가의 말을 빌리면 "사도使徒 시대 Apostolic Age(예수의 12 제자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교회당의 문지기로도 적합지 않았을 인물"이었다.
교황에 대한 비판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가담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1511년 초판이 간행되고 그 후 여러 차례 인쇄된 ≪우신예찬愚神禮讚≫에서 에라스무스 Erasmus는, 만일 교황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면 그들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1517년 바젤 Basel에서 익명으로 출간된 소책자 ≪추방된 율리우스≫에서 에라스무스는 좀 더 대담한 어조로 천국의 문 앞에서 성 베드로 Sanctus Petrus(영어 Saint Peter)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나누는 대화 과정을 상상적으로 서술했다.
이 글에서 베드로는 율리우스의 천국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베드로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갑옷을 걸친 허영심 많은 인물이 설마 교황이라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교황에 대한 분노가 유독 강하게 표출되었다.
왜냐하면 15세기의 독일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분열되어 있어서, 독일 안에서의 교황권 행사를 제한하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협정—종교 협약—이 없었기 때문이다(반면 교황은 에스파냐, 프랑스, 잉글랜드의 지배자들과는 종교 협약을 맺었다).
1500년에 이르러 독일 군주들은 교황이 거두는 세금이 너무 많아서 독일 내 동전을 죄다 싹쓸이해간다고 불평을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돈을 로마에 납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은 교화의 정책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프랑스인, 에스파냐인, 이탈리아인이 추기경단과 교황청 관료를 장악하고 있었고, 교황은 예외 없이 이탈리아인이었다(이런 현상은 197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독일 대학의 졸업생들은 로마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많은 사람들은 루터의 지지자 대열에 합류해 새로운 종교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보름스 국회
루터의 인생 드라마는 바야흐로 급속히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1520년 말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하는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를 받자,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교서뿐만 아니라 교회법전 전부를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집어 던졌다.
교회의 입장에서 루터는 골칫거리 이단자였다.
교회는 루터의 처벌 문제를 그의 세속 군주인 선제후選帝侯 Princeps Elector 프리드리히 현명공賢明公 Friedrich der Weise에게 정식으로 '이관'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이 교황 반대자의 입을 막고 싶지 않았다.
루터를 이단 죄로 화형시키기는커녕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개진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1521년 초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보름스 시에서 개최되는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의 국회 즉 '보름스 국회(또는 보름스 의회) Diet of Worms'에서 심문받도록 조치했다.
보름스 국회의 주도권은 의장이자 새로 선출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 Karl V(재위 1530~1556)가 쥐고 있었다.
카를 5세는 독일인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국민적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합스부르크가 Haus Habsburg 출신인 그는 조상 대대로 네덜란드 Netherlands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러나 1521년 전혀 예기치 않게 왕가 상속, 결혼, 선거, 행운 등이 한꺼번에 겹쳤다.
그 결과 그는 네덜란드의 지배자일 뿐만 아니라 독일 왕, 신성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Austria 공작, 밀라노 Milano 공작, 그리고 프량슈콩테 Franche-Comté의 지배자가 되었다.
모계 혈통으로 페르난도 Fernando와 이사벨 Isabel의 손자였던 그는 또한 에스파냐 왕, 나폴리 Napoli(영어 Naples)·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사르디니아 Sardegna(영어 Sardinia)의 왕이었고, 신세계에 있는 에스파냐 영토 전부의 지배자였다.
그토록 어마어마하고 다양한 영토를 통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카를 5세의 제국에는 수도도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도 없었다.
공통의 언어도 공통의 문화도 지리적으로 연속된 경계선도 없었다.
그러므로 카를 5세의 제국은 중세 말기 유럽에서 성장을 거듭하던 민족주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국가였다.
카를 5세는 제국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가능한 한 각 지역의 토착 관료 및 제도를 통해 지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제국을 결속시켜주는 두 가지 핵심 요소—황제와 가톨릭교회—에 대한 위협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계산과는 별도로 카를 5세는 독실하고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제국 내에 이단이 등장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름스 국회가 마르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루터가 감히 황제 앞에서조차 물러서기를 거부하자,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명공이 다시 한 번 개입했다.
그는 이번에는 '납치'를 가장해 루터를 자신의 바르트부르크 성 Wartburg Castle으로 감쪽같이 데려가 1년 동안 안전하게 숨겨주었다.
그 후 루터는 일생 동안 다시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보름스 국회는 루터가 법의 보호 밖에 있다고 선언했지만 그 법령은 결코 실행되지 않았다.
루터는 몸을 숨겼고 카를 5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곧 독일을 떠났다.
1522년 바르트부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개선한 루터는 자신이 주장했던 교회 행정 및 예식의 개혁이 대학 내 지지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 후 독일의 여러 제후가 잇달아 루터주의主義 Lutheranism(루터교敎 Lutheran Chrurch)로 공식 개종했고, 그들이 영토 안에서 루터주의를 신봉하도록 했다.
1530년 무렵 독일의 여러 지역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독일 군주들과 루터 종교개혁
여기서 루터주의 초기 역사에 관련된 세 가지 의문 중 마지막 의문이 제기된다.
안정된 권력을 확립하고 있던 독일 군주들은 왜 루터의 말에 귀 기울여 자기 영토에 루터주의의 종교 관행을 확립했을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루터가 아무리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해도 강력한 독일 군주들과 자유도시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의 대의명분은 분명 실패로 끝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1520년에 루터는 독일 전역에서 두루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새로운 종교가 보급된 곳은 지배자가 정식으로 루터주의를 확립한 영토(대개 독일 북부)뿐이었다.
그 밖의 지역에서 루터에 동조한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가톨릭을 받아들여아먄 했다.
자국 영토 내의 종교를 결정하는 군주의 권력은 유럽 사회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500년 무렵 유럽 전역의 정치적 기류는 세속과 종교를 망라한 삶의 모든 부문을 국가가 지배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배자들은 자국 영토 내의 교회 성직자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려 했고, 로마로 흘러가는 돈의 흐름을 차단하려 했으며, 교회 법정의 독립성을 제한하려 했다.
서유럽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들—프랑스 왕과 에스파냐의 왕들—은 교황과 공의회주의자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투쟁을 틈타, 싸움에 골몰하던 교황들에게서 그와 같은 양보를 얻어냈다.
그 결과 1482년 교황 식스투스 4세 Pope Sixtus IV(재위 1471~1484)는 에스파냐 왕인 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주요 교회 성직 후보자 지명권을 양보했다.
148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 Pope Innocentius VIII(재위 1484~1492)는 에스파냐 지배자에게 종교 정책을 강제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왕이 통제하는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의 설립에 동의했다.
그리고 1516년 볼로냐 협약 Bologna Process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프랑스의 주교 및 대수도원장 선임권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François I(재위 1515~1547)에게 부여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 왕은 제5차 라테란 공의회 the 5th Lateran Council(1512~1517)에 참석한 공의회주의자들에 맞서 교황을 지지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황제도 군주도 그런 양보를 얻어낼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교황과의 협약을 통해 얻어내지 못한 것을 독일 일부 군주들은 무력으로 빼앗기로 결심했다.
루터의 위상은 이렇게 작심한 군주들을 선동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1520년 이 열정적 개혁가는 군주들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새로운 종교관행을 확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군주들을 은근히 부추김으로써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유도했다.
군주들은 처음에는 눈치를 보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루터가 이미 어마어마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카를 5세가 가톨릭 신앙의 수호를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채자, 독일의 많은 군주들은 영토 내에 루터주의를 도입했다.
각각의 경우에서 군주 개인의 종교 성향이 작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정치·경제적 문제가 한층 더 중대한 고려 사항이었다.
영토 내에 루터주의를 확립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목사들을 임명하고, 로마로 가는 돈을 차단했으며, 교회 법정의 사법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영토 안에서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주와 대립관계에 있던 주교 또는 대주교가 영적 권위를 기반으로 세속 군주의 영토 주권을 침범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비슷한 이유에서 많은 자유도시(영방 군주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에 그렇게 불렀다)가 루터주의를 받아들였다.
시 의회와 길드 장인들은 새로운 종교를 채택함으로써 도시 내에서 최고 통치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루터주의를 채택한 지역에서는 세속 주권자가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하고 그 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새로운 신앙이 가져다준 실질적 이득은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열정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군주권의 보호 아래 비텐베르크에 안전하게 은신한 루터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한층 강력하게 천명하기 시작했다.
1523년에 발표한 ≪세속 권력론≫이란 논고에서 그는 '경건한' 통치자에게는 항상 복종해야 하며 사악한 통치자에게도 적극적으로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폭정은 '저항할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25년 독일 전역에서 농민이 영주에게 반란—어떤 지역에서는 토마스 뮌처 Thomas Münzer 같은 종교 급진파가 반란을 부추겼는데, 뮌처는 '사악한' 권력자에 대항해 불과 칼을 쓰라고 촉구했다—을 일으켰을 때 루터는 맹렬한 적개심으로 대응했다.
그는 1525년 ≪강도, 살인자 무리인 농민을 반박함≫이라는 독설적인 소책자에서, 할 수만 있다면 반란자들을 미친개처럼 때려잡으라고 촉구했다.
그는 반란자들을 "비밀리에든 공개적으로든 두들기고 목 조르고 칼로 찌를 것이며, 반란 가담자보다 더 사악한 자는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반란(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루터주의와 국가 권력의 굳은 결속은 기존 사회 질서의 보존과 유지에 기여했다.
독일에서는 그 후 두 번 다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루터는 만년에 접어들어 젊고 좀 더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과의 토론에, 그리고 원하는 모든 이에게 영적인 조언을 베푸는 일에 전념했다.
놀라울 정도로 왕성한 문필활동을 한 그는 25년 동안 평균 2주일에 한 편 꼴로 소책자를 작성했다.
죽는 날까지 그는 자신의 신앙에 흔들림이 없었다.
1546년 임종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와 당신이 가르친 교리를 확고히 믿습니까?'라는 물음에 그는 단호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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