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질병의 위치를 찾아라 본문
○질병은 우리 몸 장기에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 의사 조반니 바티스타 모르가니 Giovanni Battista Morgagni(1682~1771)가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 Università degli studi di Padova(UNIPD)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을 때는 베살리우스 Vesalius에 의한 근대 해부학의 시대가 시작된 지 어느덧 100년이 지난 시기였다.
베살리우스는 과거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직접 지도하면서 고대 갈레노스 Galenos의 해부학을 극복하고 근대 해부학이라는 문을 당당하게 열어젖혔다.
하지만 아직 한계가 있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은 인체 장기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려주었을 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질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질병이 생기는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병리학病理學 pathology이라 하며, 이 가운데 인체 체액體液 humor/(body) fluid(사람 몸에 든 액체를 말하며, 혈액·림프액·뇌척수액·눈물·오줌·침 등)의 부조화를 중심으로 질병을 설명하는 학문을 체액병리학 humoral pathology이라 한다.
모르가니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체액병리학이 대세였다.
체액은 몸 전체를 순환하므로 어느 한 부위나 어느 한 장기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았다.
인체 장기들은 그저 체액이 잠시 머무르는 임시 정거장 같은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르가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돌본 환자들의 생전 진료 기록과 사망 후 부검 기록 약 700건을 분석해 환자들이 생전에 불편했던 부위와 사망 후 그 부위를 부검했을 때의 소견을 연결시켜 보았다.
그 결과물이 그가 79세 때 발간한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1761)였다.
2,500쪽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책에서 모르가니는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질병은 우리 몸의 특정 장기에 자리 잡고 있다."
질병이 체액을 따라 우리 몸을 도는 것이 아니라 몸의 일부 구역 또는 특정 장기나 기관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 모르가니의 병리학을 국소병리학 또는 장기(기관)병리학이라 한다.
또한 체액병리학과 대조되도록 고체병리학이라고도 한다.
이제 의학자들은 인체의 다양한 장기에서 질병을 찾기 시작했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 의학자인 갈레노스는 서양 의학에서 자신의 역할은 완전히 끝이 났다.
그의 해부학은 베살리우스가, 그의 생리학은 하비 Harvey가, 그리고 4체액설이라는 병리학마저 모르가니에 의해 무너졌다.
후배 의사들이 비록 늦고 실수하긴 했지만 결국 대선배의 잘못된 이론을 바로잡고 스스로 우뚝 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병명 중 인체 부위와 질병 이름이 조합된 것은 국소병리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코곁굴염(부비동염)은 코곁굴(부비동副鼻洞: 머리뼈에 있는 공기구멍으로 얇은 점막으로 싸여 있다)에 생기는 염증이고, 폐렴은 폐에 생기는 염증, 뇌출혈은 뇌에 발생한 출혈이다.
○프랑스 혁명과 임상의학의 탄생
환자 옆에서 환자를 직접 관찰하며 치료하는 의학을 '임상의학臨床醫學 clinical medicine'이라 한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임상의학의 필요성은 점점 커졌지만, 문제는 임상의학이 제대로 꽃피울 공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환자의 집을 방문해 진료하고 자신의 집에서 소소하게 실험을 통해 의학을 연구했다.
의사를 집으로 부르는 환자들은 대부분 지위가 높은 부유한 사람들이라 의사보다 환자가 더 우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겠는가?
하지만 상황이 바뀌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점이 수감되어 있던 바스티유 감옥 Bastille이 혁명 세력에게 습격당했다.
국왕 루이 16세 Louis XVI(재위 1774~1792)는 처형당하고 프랑스는 공화국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에게 과학은 귀족의 사치품이었다.
그들은 혁명의 시대에 과학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위대한 과학자들을 처형했다.
라부아지에 Lavoisier도 그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의학도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다.
의약품 제조공장과 기존 병원, 의과대학들이 귀족체제의 잔재로 폄하되면서 모두 폐쇄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환자는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귀족정을 유지하는 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의사와 군의관이 더욱 필요해졌다.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의학 시스템을 만든 사람은 혁명 세력의 의사 앙투안 프루크루아 Antoine François Fourcroy(1755~1809)였다.
그는 세 개의 대형 의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의학 역사의 시작이 될 프랑스 의학교의 방침을 세 가지로 정했다.
첫째는 이론보다 실제를 강조했다.
따라서 실제 진료에 도움을 주는 실습을 늘리고 기초 이론 수업을 줄였다.
둘째, 병원에서 하는 의학 실습을 장려했다.
따라서 의대 강의실을 나와 실제 병원에서 환자를 접하는 교육을 우선시했다.
마지막으로 내과와 외과의 구별을 없앴다.
프랑스 혁명 정신을 반영해 귀족 신분 내과의사 physician과 평민 외과의 surgeon의 구분을 없애 의사가 되려는 사람은 이제 내과와 외과를 모두 공부해야 했다.
기존 내과의사의 반대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 세 가지 방침은 의학의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바로 프랑스 병원 의학의 시작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재위 1804~1814)은 프랑스 병원 의학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켰다.
전쟁 시기에 군사들의 건강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나폴레옹은 연전연승했고, 안정을 찾은 프랑스 의학의 정부의 지원 아래 더욱 발달했다.
프랑스 병원의 모든 설비가 최신식으로 갖추어졌고, 그곳으로 능력 있는 의학자와 의대생들이 몰려들었다.
19세기의 파리 Paris는 '새로운 알렉산드리아'라 불렸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처럼 파리에서도 사체 해부와 연구가 장려되었고, 빈민들은 장례를 대신 치러주는 조건으로 가족의 시신을 기꺼이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프랑스 의사들은 한 환자의 진료 → 사망 → 부검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형 병원이 생겨 여러 명의 의사가 한 장소에서 다양한 환자들을 진료하게 됨으로써 의사들이 서로 경험을 교환화고 토론할 수 있게 되었다.
병원 의학 수준이 급속도로 향상되면서 왕진하는 의사보다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퍼져나갔고, 부유한 사람들도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이제 의사의 조언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의사와 환자의 관게가 역전된 것이다.
프랑스의 임상의학은 이때부터 의학의 발달을 주도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의사들을 '파리 임상학파 Paris clinical school'라 불렀다.
사비에르 비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질병은 조직 속에 있다 ― 비샤와 조직병리학
샤비에르 비샤 Xavier Bichat(1771~1802)는 1793년부터 맨눈과 작은 확대경, 현미경을 이용해 어두운 부검실에서 무리할 정도로 연구를 했다.
남은 생이 짧은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사망 후 시신을 치료비로 지불한 프랑스의 가난한 환자들 덕분에 비샤는 1년에 600건 이상 해부하며 의학을 연구했다.
엄청난 수의 부검 연구 끝에 그는 '조직 tissue'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생명체(개체 individual)의 기본 단위인 세포 cell(예: 심장세포)들이 모여 특정 기능을 가진 조직 tissue(예: 심장조직)을 이루며, 조직들이 모여 기관 organ(예: 심장)이 되고, 여러 기관이 모이면 기관계 organ system(예: 순환계)를 이룬다].
그는 인체 장기의 여러 곳에서 비슷한 특성을 가지는 조직들을 발견해 그것들을 21가지로 분류했다.
뼈조직, 신경조직, 섬유조직, 섬유조직, 점액조직 등등(비샤는 정맥, 동맥도 특별한 조직으로 분류).
그리고 분류한 조직들의 특징을 과학 실험을 통해 확인해나갔다.
비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801년 '조직이 우리 인체 기능의 최소 단위'임을 주장했다.
장기(기관)의 종류와 무관하게 조직의 종류가 같다면 병리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이론이었다.
장기병리학 organ pathology의 창시자인 모르가니는 어떤 특정한 '장기(기관)'에 어떤 질병이 위치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장기에 비슷한 병이 생기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직병리학 tissue pathology의 창시자인 이를 비샤는 설명할 수 있었다.
비록 다른 장기지만 같은 조직에 질병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육안 해부학이 장기병리학으로, 조직병리학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1802년 7월 평소 결핵을 앓아 몸이 허약했던 비샤는 병원 계단을 내려오다 기절해 쓰러졌다.
그는 심한 두통을 호소했고 구토가 이어졌고, 나중에는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이슬람 의학자 아비센나 Avicenna(또는 이븐 시나 Ibn Sina)가 남긴 명언처럼 비샤는 인생을 길게 살지는 못했지만 진정으로 깊게 산 의학자였다.
○질병은 세포 속에 존재한다 ― 피르호와 세포병리학
비스마르크 Bismarck가 독일을 통일하기 전, 프로이센 Preußen/Preussen 영토였던 오버슐레지엔 Oberschlesien에서 발진티푸스가 발병했다.
발진티푸스는 이가 사람을 물면서 병원체를 옮기는 열병이다.
전염병 조사를 위해 한 젊은 병리학자가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의 이름은 루돌프 피르호 Rudolf Ludwig Karl Virchow(1821~1901)였다.
그런데 피르호가 본 것은 전염병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 불평등, 불결한 위생, 심한 영양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 개인을 치료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1847년 조사를 마친 피르호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자세히 적어 정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발진티푸스 같은 질병을 예방하려면 국가를 주체로 하는 위생 상태의 전반적인 관리, 체계적인 사회복지제도, 그것을 위한 민주주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출내기 의사의 다소 무례하고 과감한 제안을 프로이센 정부는 당연히 묵살했다.
하지만 청년 피르호의 가슴은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정세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체제의 물결은 프로이센의 구체제와 대립했다.
열정이 넘치는 피르호는 신체제를 지지하기 위해 혁명 세력에 참여해 혁명 내용을 전파하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혁명은 1년 만에 실패하고, 혁명의 중심부에 있던 피르호는 몸담았던 베를린 의대 병원에서 쫓겨나 변두리 대학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그의 열정은 의학으로 옮겨 붙었다.
1800년대 초부터 과학자들은 생물체가 작은 주머니 vesicle(세포 cell)의 기본 단위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세포는 식물학자들이 먼저 발견했다.
식물에는 세포벽 cell wall이 있어 동물세포보다 관찰이 쉬웠다.
세포라는 단어는 1665년 로버트 훅 Robert Hooke이 만들었고, 그후 세포 연구가 지속되어 1838년에는 독일의 슐라이덴 Matthias Jakob Schleiden(1804~1881)이 모든 식물은 각각 독립된 세포들이 모인 공동체임을 최초로 주장했다.
이른바 식물세포설이었다.
1년 뒤에는 독일 생리학자 슈반 Theodor Schwann(1810~1882)이 슐라이덴의 주장을 동물을 포함한 생명체 전반에 대한 것으로 확장시켰다.
이를 동물세포설이라 한다.
이렇게 "모든 생물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세포설이 완성된 것은 1830년대에 현미경 렌즈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덕분이었다.
그 무렵 정치에서 물러나 지방에서 온전히 학문에 집중하던 피르호의 책이 세상에 등장했다.
1858년 작 ≪세포병리학≫이었다.
피르호는 세포가 생명체의 최소 단위인 것처럼 질병 상태의 최소 단위 역시 세포이며, 질병은 세포가 비정상적인 상태로 된 것이고, 따라서 모든 질병은 세포에 국소적으로 발생함을 증명했다.
오랜 역사를 거쳐 의학을 지배했던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와 갈레노스의 액체병리학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기관―조직―세포로 연결되는 '고체병리학'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정치적 활동을 활발히 했던 사람답게 세포 이론은 정치적 의미로 확장하기도 했다.
"우리 몸은 각각의 세포가 시민인 국가이고, 질병은 국가 안의 시민 세포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써 의학사의 '4대 의서'가 모두 등장했다.
루돌프 피르호 Rudolf Virchow의 ≪세포병리학≫(1858) 외에 근대 해부학의 시작을 알린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의 ≪파브리카≫(1542), 혈액 순환의 원리를 밝혀낸 윌리엄 하비 William Harvey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1628), 그리고 근대 병리학의 시작을 알린 조반니 모르가니 Giovanni Morgagni의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1761)이다.
피르호는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원래 무대였던 베를린 의대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도 다시 시작됐다.
이 시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적 도구이며, 저치는 '국가'라는 큰 병원의 의료 활동이다."
이어서 오늘날 피르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말이 나온다.
"의사는 가난한 자를 대변하는 변호사이고, 사회문제의 해결책은 대부분 의사에게서 나온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마음에 담아두길 바라는 명언이다.
○몸을 두드려 질병을 찾는다 ― 아우엔브루거와 타진법
장기병리학의 모르가니에 의해 질병이 우리 몸의 특정 위치에 자리 잡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질병이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 찾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질병으로 사망하면 부검을 통해 질병이 자리 잡았던 부위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원인을 찾았다고 해도 치료에는 도움이 안 되었다.
환자는 이미 부검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환자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질병이 자리 잡은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모든 의사의 목표가 되었다.
1722년 오스트리아 Austria에서 태어난 레오폴트 아우엔브루거 Leopold Auenbrugger(1722~1809)는 여관집 아들이었다.
여관집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술통에 술이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술통을 두드려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
의사가 된 아우엔브루거는 어릴 적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려 그런 원리를 인체에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폐는 정상일 때 공기로 가득 차 있지만 염증이 생기면 분비물이 늘어나 술이 약간 남은 술통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아우엔브루거는 검사하고자 하는 폐의 부위에 한 손을 펼쳐 올리고 다른 손 손가락으로 의심스러운 부위를 덮고 있는 손가락을 퉁퉁 두드렸다.
건강한 폐는 공기가 차서 맑은 음색인 '텅텅' 소리가 나지만, 염증이 있어 폐에 분비물이 많으면 탁한 음색인 '텁텁'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이처럼 질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부위를 일정한 힘으로 가볍게 타격해 진단하는 방법을 타진법打診法 percussion이라 한다.
음악적인 소양이 있던 아우엔브루거였지만 아주 작은 소리의 차이로 병적인 상태를 구분해야 해서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아우엔브루거는 7년이란 시간 동안 타진법을 연구한 뒤 1761년 ≪타진의 새로운 고안 및 신발견≫이란 책을 발표했다.
모르가니의 장기병리학 책인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가 발표된 해와 같은 해였다.
모르가니가 사망한 환자의 부검을 통해 질병이 자리 잡은 장기를 찾았다면, 아우엔브루거는 타진법으로 살아 있는 환자의 질병이 자리 잡은 부위를 찾았다.
그렇지만 그의 연구는 크게 관심받지 못했다.
95쪽의 얇은 책 안에서 소리를 글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엔브루거가 7년 동안 익힌 것을 다른 의사들이 단기간에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환자의 몸을 두드리는 것을 품위 없는 행동이라 생각했던 내과의사에게 타진법은 의미가 없었다.
1809년 아우엔브루거가 세상을 떠나자 타진법은 곧 잊히고 만다.
하지만 아우엔브루거의 이론은 임상의학의 열풍이 불던 프랑스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타진법의 재발견 ― 코르비자르
프랑스 내과의사였던 코르비자르 Jean-Nicolas Corvisart(1755~1821)는 오스트리아 의학서를 공부하던 중 아우엔브루거의 책을 만났다.
당시에는 생소한 타진법이라는 짧은 내용의 책이었는데, 코르비자르는 그 책에 담긴 타진법의 큰 의미를 깨닫고 환자들에게 타진법을 꾸준히 적용해 임상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는 20년 동안 타진법을 사용하면서 많은 도움을 얻었지만, 그의 동료 의사들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타진법의 창안자인 아우엔브루거가 쓴 원본이 친절하지 않았던 데다 프랑스어 번역본의 품질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동료 의사들에게 타진법을 알리고 싶었던 코르비자르는 95쪽의 책 원본을 직접 번역하고 자신의 경험담에다 자세한 해설을 달아 보강했다.
그 결과 1808년 아우엔브루거의 타진법에 대한 짧은 분량의 책이 무려 440쪽짜리 두꺼운 책으로 재출판되었다.
이때부터 타진법이 관심을 받아 많은 의사들이 진단에 이용했다.
동료 의사들이 그를 추켜세웠지만, 코르비자르는 아우엔브루거의 업적을 자신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코르비자르는 병원에서 의학생들과 회진을 돌면서 타진법을 교육했다.
명성이 쌓인 뒤에는 나폴레옹의 주치의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꽤 까다로운 환자였는데 코르비자르는 그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의학은 안 믿어도 코르비자르는 믿는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1815년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코르비자르도 건강이 악화되어 의학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그의 타진법은 새로운 방법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바로 청진법이 등장한 것이다.
○소리를 들어 질병을 찾다 ― 라에네크와 청진법
코르비자르의 자세한 해설서 덕분에 타진법이 폐 질환 진단에 널리 쓰여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비록 신체의 일부분이지만 의사는 처음으로 갈아 있는 환자의 몸속 상태를 타진법을 통해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의사들은 간접적인 타진음이 아닌 폐에서 실제로 나는 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의사들은 직접 환자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과 폐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직접 듣는 방법을 직접 청진이라 한다.
코르비자르의 제자인 르네 라에네크 René Laennec(1781~1826)도 직접 청진을 했다.
하지만 병원을 찾는 청결하지 않은 하층민이나 체중이 많이 나가는 과체중 환자 여성 환자의 가슴에 직접 귀를 대고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라에네크의 시야에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 아이가 긴 나무통을 귀에 대고 다른 아이는 반대쪽 나무통 끝부분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라에네크는 아이들의 놀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편지지 묶음을 둘둘 말아 환자의 심장에 대보았다.
심장 소리는 매우 똑똑히 잘 들렸다.
게다가 환자의 호흡 소리도 아주 잘 들렸다.
라에네크는 지름 2.5센티미터, 길이 22센티미터의 속이 빈 나무관을 만들어 진료에 사용했다.
최초의 청진기를 만든 것이다.
아우엔브루거의 타진법에 이어 살아 있는 환자의 인체 내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진단 방법인 청진법이 이렇게 개발되었다.
라에네크는 3년에 걸쳐 사체의 해부 소견과 그가 살아 있을 당시의 청진 소리를 비교 연구해 1819년 ≪간접 청진법 및 폐와 심장 질병의 개론≫을 펴냈다.
라에네크의 청진법은 환자의 몸에 직접 귀를 대지 않고 청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간접 청진이라 한다.
타진법을 이용해 진료하던 의사들은 자연스럽게 청진법을 받아들였다.
전 유럽의 의사들이 청진법을 배우러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라에네크는 건강이 악화되어 1826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폐결핵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연구했던 질병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병리학 발전을 위 그림으로 정리해 보았다.
근대 이후 병리학의 발전은 질병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이탈리아의 모르가니는 그곳을 인체의 장기(기관)라고 생각했다(장기병리학/기관병리학).
하지만 다른 장기에서도 같은 질병이 나타나자 프랑스의 비샤는 여러 장기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조직에 질병이 위치한다고 생각했다(조직병리학).
그리고 현미경 관찰 기술이 발달하면서 독일의 피르호는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에 질병이 위치할 것이라는 이론은 내세웠다(세포병리학).
하지만 여기까지의 병리학의 단점은 환자의 부검을 통해 알아낸 연구라는 점이었다.
즉 부검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가 몸속 어디에 있는 질병으로 사망했는지 밝히는 과정이었다.
환자가 살아 있을 때 질병을 찾아 치료에 이용할 수는 없을까?
우연히도 그런 시도가 모르가니가 장기병리학을 발표했던 그해에 동시에 발표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아우엔브루거가 환자 몸의 일부분을 두드려 질병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타진법을 창안한 것이다.
프랑스의 코르비자르는 타진법을 대중화시켰으며, 그의 제자 라에네크는 아이들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최초의 청진법과 청진기를 만들었다.
이제 의학자들은 또 다른 진단 장비를 찾아나섰다.
그중 의학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엑스레이를 만나보자.
○찾지 못하는 질병은 없다. 다만 그 방법을 못 찾았을 뿐 ― 뢴트겐과 엑스선
위 사진처럼 생긴 밀폐된 유리관의 내부 공기를 모두 빼어 진공 상태를 만든 뒤 옆(음극)과 아래(양극)에 있는 단자에 전기를 연결하면 음극 쪽에서 보이지 않는 광선이 나와 관을 밝게 만든다.
이런 현상은 매우 오래전부터 알려졌는데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고, 음극에서 나오는 광선이라 음극선 cathode ray이라 불렀다.
음극선관 실험은 19세기 후반 서양의 이공대에서 많이 했던 첨단 실험이었다.
실험기구를 만든 사람이 영국 과학자 윌리엄 크룩스 William Crookes였기 때문에 크룩스관 Crookes tube 실험이라 불리기도 했다.
크룩스는 실험을 위해 크룩스관에 전기를 연결하면 유리관 안에서 빛이 날 뿐 아니라 실험실에서 묘한 미지의 먼지 같은 빛이 맴도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빛을 혼령으로 생각하고 심령술에 심취했다고 한다.
만일 크룩스가 과학적으로 생각했다면 X-선 X-ray을 먼저 발견했을 것이다.
빌헬름 뢴트겐 Wilhelm Conrad Röntgen(1845~1923)은 그리 유명한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독일의 지방 대학인 뷔르츠부르크대학 Julius-Maximilians-Universität Würzburg(영어 University of Wurzburg)에서 수십 년 동안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물리학 연구소장을 맡아 하루하루 물리학 실험을 했을 뿐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1895년 11월 8일, 뢴트겐은 실험실에서 당시 이공계 대학에서 관심이 많았던 크룩스관을 이용한 음극선 발생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음극선에서 발생하는 빛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실 안은 어두운 상태였다.
그런데 크룩스관에 전기를 연결하자 1.8미터 거리에 형광물질을 발라놓은 스크린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실험을 하기 위해 실험실 구석에 놓아둔 스크린이었다.
뢴트겐은 스크린을 빛나게 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음극선이 거기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다.
혹시 몰라서 뢴트겐은 크룩스관을 검은 종이로 완전히 감싼 뒤 다시 전기를 연결했다.
크룩스관에서 음극선이 나오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스크린은 여전히 빛이 났다.
"스크린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음극선이 아니야. 뭔가 새로운 미지의 빛이 틀림없어. 이것을 미지의 광선 X-선이라 부르자."
뢴트겐은 스크린 앞에 물체가 있어도 스크린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X-선이 물체를 투과하는 성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카드, 나무판자, 벽돌, 아주 두꺼운 책을 스크린 앞에 두어도 X-선은 모두 통과해 스크린을 빛나게 했다.
반면 납은 통과하지 못했다.
"X-선이 납은 통과하지 못하는군. 그런데 ······?"
뢴트겐은 납을 든 자신의 팔이 스크린에 뼈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관찰했다.
충격이었다.
뢴트겐은 증거를 얻기 위해 스크린 위에 사진 건판을 올려놓고 아내의 손을 엑스선과 건판 사이에 놓았다.
그러고나서 사진을 현상했더니 아내의 반지 낀 손의 뼈가 정확히 찍혔다.
뢴트겐은 자신의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해 곧바로 스타 과학자가 되었다.
엑스선 발견의 업적으로 뢴트겐은 1901년 제1회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 후에도 그는 이렇다 할 삶의 변화 없이 조용히 연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엑스선으로 물리학계는 혁명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방법(음극선관, 스크린)이 있다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현상(엑스선)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볼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의 변화를 유발한 것이 뢴트겐의 엑스선이었다.
엑스선은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다양하고 재미있는 변화를 주었다.
엑스선이 옷을 통과하는 것이 알려지자 일부 여성들은 엑스선이 통과하지 못하는 속옷을 찾아나섰고,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부 속옷이 인기리에 팔리기도 했다.
사이좋은 커플이나 부부는 자신들의 해골 사진을 찍어 사랑을 기념하기도 했다.
아마 사진을 방에 걸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국, 유럽의 구두가게에서는 맞춤 구두 제작을 위해 엑스선 사진 p(a)edoscope(내시경)을 찍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다.
엑스선은 당연히 의료 진료에도 활용되었다.
영국의 한 병원은 엑스선 검사를 통해 손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여성의 손가락 깊이 박힌 바늘을 찾아 제거하는 수술에 성공했다.
미국에서는 총상을 입은 한 청년의 다리에 박힌 총알을 엑스선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제거한 일도 있었다.
발명왕 에디슨 Thomas Alba Edison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광투시기 fluoroscope를 개발하자 엑스선이 더욱 다양한 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엑스선을 활용한 진료가 늘어나면서 1896년 의학계의 새로운 전문 분야인 방사선과 radiology가 신설되었다.
이 모든 일이 X-선을 발견한 지 1년 안에 일어났다.
하지만 모두가 열광할수록 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일부 과학자들이 엑스선에 오래 노출된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며 인체를 통과하는 엑스선의 인체 영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형광투시기를 만든 에디슨의 조수는 반복적으로 손과 손가락이 엑스선에 노출되어 그 부위에 암이 발생했고, 양팔을 모두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는데도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과학자와 의사들은 위 사진에서처럼 보호용 고글과 몸을 막는 차폐장치를 사용했고, 엑스선은 더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우리의 건강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한때 유행했던 구두 맞춤 엑스선은 1970년 이후 미국에서 법으로 금지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0. 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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