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발해인들도 돼지고기를 좋아했을까 본문
"당신은 무엇을 먹는지 말해보시오, 그러면 난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보지요"
-브리아 사바랭 Brillat-Savarin, ≪미식의 생리학≫ 중에서-
음식의 맛만큼 복원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맛이라는 건 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맛을 선호하는지는 한 개인의 특색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예전의 맛을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때의 사람들, 그 시대를 복원하는 건 고고학의 큰 과제이기도 하다.
인류의 진화를 밝히는 수많은 연구 가운데서 인간이 동물의 골수를 먹음으로써 뇌지질이 획기적으로 발달되었다는 설이 최근 제기되었다.
또한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 Robin Dunbar는 초기 현생인류가 모닥불 옆에서 같이 고기를 굽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서 사회적 활동을 촉진시켰다고 보았다.
이처럼 음식에 대한 탐닉은 단순히 먹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를 담보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선조들이 지난 몇백만 년 동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고 함께 나눈 결과물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맛을 똑같이 재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대만에서는 고대 상나라와 주나라 때의 제사 음식을 재현하는 모임이 있었다.
본토에서 밀려 나왔지만, 중화 문명의 정통성을 잇고 싶어 했던 대만사람들은 다양한 갑골문과 기록에 나와 있는 제사음식의 조리법을 복원시켜 음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음식이 너무 맛이 없었던 것이다.
점점 참여자들이 줄어들자 결국 현대적인 요리법을 더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소: 머리부터 꼬리까지 사랑 받는
소(우牛)만큼 한국의 음식문화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동물은 없다.
소는 전통적으로 농사의 원천으로, 가축 중 최우선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소를 요리하고 도살하는 문화가 세계 어디보다도 발달했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부위를 이용하여 소 요리를 즐긴다.
머리끝에서 꼬리까지 버리는 부분이 없이 다양한 요리 재료로 사용하고, 심지어 소뿔마저 약재로 쓴다.
러시아에서 유학했던 시절 필자의 하숙집 주인은 도살장에서 일했다.
소꼬리, 내장, 도가니 등을 잔뜩 들고 와서 요리를 하곤 했다.
별다른 조리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 그냥 삶아서 먹었다.
러시아인이 일반적으로 먹는 요리는 안심, 등심, 갈비 정도로만 분류되었다.
특수부위를 꼽자면 삶은 뒤 차갑게 해서 먹는, 보드카 안주로 사랑받는 우설牛舌(소의 혀) 정도다.
소를 흔하게 키우는 러시아도 이 정도이니,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소를 키우고 먹었을까.
이 문제는 야생소가 언제부터 가축화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고대의 동물뼈에서도 DNA를 추출해서 분석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요리에 사용된 동물뼈는 요리 과정에서 세포 안의 DNA가 대부분 파괴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연구가 몇 개 진행되었다.
헤이룽장성(흑룡강성黑龙江省/黑龍江省: 중국의 가장 동북쪽의 위치한 성으로, 만주 북쪽에 위치한다)에서는 1만 년 전에 산 것으로 추정되는 야생소의 뼈에서 재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야생소는 같은 시기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야생소와는 다른 계통임이 DNA 분석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만의 야생소들이 신석기시대부터 생존했음이 밝혀졌다.
2015년에는 지린성(길림성吉林省) 농안農安 하목가투下木戛套에서 발견된 약 6000년 전의 야생소뼈에서도 비슷한 유전자가 나타났다.
지난 1만 년 동안 만주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야생의 소를 잡아 가축화해 키웠다는 뜻이다.
한반도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농장을 만들어 이 야생소를 사육했을 가능성은 없다.
우유를 활용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본격적인 가축소는 적어도 열국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제주도에서 발견된 3~5세기의 소뼈를 조사한 결과 현대 제주도의 흑우와 큰 차이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청계천에서 발견된 조선시대의 소뼈도 현대의 소뼈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제까지 국내에서 소뼈를 분석한 것은 이 두 사례가 전부다.
열국시대의 유적에서 가축소를 실제로 농사에서 사용한 증거는 열국시대의 밭과 논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진주 남강 유역에서 발견된 평거동 유적이다.
이 평거동 유적의 밭에서 소와 함께 밭을 가는 농부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비가 온 다음 날 질척한 땅에서 밭을 갈 때 그 발자국이 깊숙이 박히고, 그대로 땅이 굳어서 지금까지 남은 것이다.
당시 소를 끌고 다닌 농부나 소나 꽤 고생했을 것 같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눌지왕 때(438년)에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했고, 지증왕 때(502년)에는 공식적으로 우경牛耕(소로 밭을 갊)을 실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5세기 이후에는 소로 밭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뜻이다.
소는 단순한 농경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숭배나 제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소를 통째로 묻은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는데, 마한의 중심지였던 나주 복암리 근처의 저습지에서다.
웅크린 소의 전신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매장을 한 것이 분명했지만 특이하게도 머리가 없었다.
2017년, 카자흐스탄 Kazakhstan에 있는 고분에서도 소머리의 뼈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고분 돌무더기 위에 놓인 소뼈는 눈 주위에 붉은 색을 칠한 흔적이 있었다.
고분을 쌓고 나서 소의 머리를 바치는 제사를 지낸 흔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소고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부위별로 소고기를 먹기 시작한 건 연산군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병의 창궐로 인한 도살, 우금牛禁 정책(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인해 소고기 수요는 급증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부위를 먹는 방법이 발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고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것과 다양한 부위를 골고루 활용하는 것은 다소 다른 맥락이다.
고기가 풍부하면 오히려 다양한 요리가 발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버리는 부위가 없이 골고루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대상으로 하는 고기가 귀할 때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 양반 계급의 급격한 확대가 생활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그중 하나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소고기를 그 외 계급의 사람들도 쉽게 즐기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소고기의 수요가 확대되면서 좀 더 저렴하게 소고기를 즐기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고, 이에 따라 백정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도살해서 판매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소의 수요가 늘어났다고 해서 갑자기 소고기의 요리법이 다양하게 증가할 수는 없다.
그 이전부터 사용되던 요리법이 소의 요리법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 소는 사슴과 요리법이 아주 흡사하다.
양념 및 가공방법이 사슴고기와 아주유사하다고,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적혀 있다.
사슴 목축을 하며 사는 에벤키 Evenki 족(흔히 퉁구스 Tungus 족이라고도 하며,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서 사슴을 치는 원주민)의 경우 그 피도 섭취하는 것은 물론, 뿔부터 다리 끝까지 발골拔滑(동물을 도살하여 뼈와 고기를 분리하는 일)을 해서 다양한 용도로 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사슴 고기와 그 부산물을 통해서 추운 툰드라 Tundra 지역(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에서부터 시베리아 북부, 알래스카 및 캐나다 북부에 걸쳐 타이가 지대의 북쪽 북극해 연안에 분포하는 넓은 벌판을 말하며, 순록의 유목으로 생활한다)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음식과 생필품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슴의 목축과 도살 기술은 동북아시아에서는 말갈 계통의 사람들에게로 이어졌다.
이후 고려로 흘러들어와 일정한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며 천한 일을 하던 양수척楊水尺(수척, 화척 등으로도 불리며, 후삼국·고려 시대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로서, 이들에게서 광대, 백정, 기생 들이 나왔다고 함) 등을 거쳐서 조선 시대의 백정白丁에게로 계승되었다.
고대인의 고기사랑을 남아 있는 뼈로 밝히는 방법도 있다.
좋은 예로 미국 황금광 시대(골드러시 The Gold Rush) 시절인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 California의 한 신생 마을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감옥, 하급식당, 바 bar, 부자를 위한 호텔 등에서 나온 소뼈를 분리해 분석했다.
그 결과 호텔 구역에서는 갈빗대/허리 부위의 뼈가 많았고, 감옥은 앞다리 부위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서부 사람들이 선호하는 부위가 어디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돼지(돈豚): 신에서 더러운 부의 상징으로
돼지만큼 다양한 이미지가 교차하는 동물은 없다.
일단 불결함이 먼저 떠오른다.
때로는 탐욕의 상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금이야 돼지고기가 닭과 함께 대한민국의 양대 국민고기로 통하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심지어 돼지고기를 경시하는 풍조마저 있어서 "여름에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돌기도 했었다.
워낙 쉽게 부패되기 때문에 잔칫집에서 누군가 식중독에라도 걸리면 대부분 돼지고기가 원인이었던 게 그 이유였다.
돼지는 부富의 상징이기도 하다.
100여 년 전 유럽에서 발행한 새해 기념 엽서를 보면 돈을 쏟아내는 돼지의 그림들이 많다.
서양에서도 돼지는 돈을 상징했던 것 같다.
돼지가 부를 상징한다는 이런 생각이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도 한다면 아마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돼지는 인간과 한 집에서 살 정도로 동아시아 문명의 발달과 함께 한 동물이다.
북방 지역에서는 대체로 사슴과의 동물들을 목축했지만, 정작 농경권에서는 돼지를 집안에서 쳤다.
중국에서는 약 9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허난성(하남성河南省) 우양현(무양현舞陽縣/舞阳县) 지아후(가호賈湖) 유적에서 처음으로 집돼지의 흔적을 찾았다.
이후 중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와 무덤에서 돼지의 머리뼈나 턱뼈가 발견되었다.
네이멍구(내몽골內蒙古) 자치구 동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8000년 전 유적으로 추정)으로 싱룽와(흥륭와興隆窪/兴隆洼) 유적[현재 츠펑(적봉赤峰)시 근처의 초기 신석기시대 문화로서 유명한 홍산문화가 발달하기 전에 있었던 문화. 빗살무늬토기를 만들고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이 있다.
비록 행정구역은 내몽골이지만, 실제로는 만주 지역과 근접하고, 주요한 유물도 빗살무늬토기여서 한반도 및 만주의 신석기시대와 관련성이 많다.
싱룽와 사람들은 튀르키예 Türkiye 차탈 후유크 Çatalhöyük 사람들처럼 집자리 안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데 차탈 후유크와 달리 싱룽와 사람들은 따로 무덤을 파헤치거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마도 계속 그 무덤을 관리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싱룽와 118호 주거지 안에 만들어진 무덤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은 50대의 남자로서, 무덤 양 옆에 암퇘지와 수퇘지가 같이 묻혀 있었다.
가끔 선사시대 무덤 유적에서는 개와 같은 애완동물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암수 한 쌍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이 무덤에 묻힌 암수 한 쌍에는 주술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무덤뿐 아니라 싱룽와의 집자리와 무덤에서는 돼지뼈들이 제법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미 원시적인 농업을 했기 때문에 곡물이 비교적 풍부했을 것이고, 야생의 돼지를 마을로 들여서 사육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무덤에서의 돼지는 사람들의 숭배대상이 된 세계 최초의 돼지일 것이다.
그리고 돼지를 묻는 풍습은 사회 규모가 더 커지는 5000년 전, 신석기시대 후기로 보이는 산둥성山東省/ 山东省의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에서 더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곳 무덤에는 돼지의 턱뼈만이 같이 부장되어 있었다.
턱뼈의 수가 다 달라서 한 개도 없는 무덤이 있는가 하면 37개의 턱뼈가 부장된 경우가 있었다.
부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돼지 턱뼈였던 것이다.
이렇게 신석시시대에 돼지는 풍요를 약속하는 신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당시 부의 불평등이 시작되면서 무덤의 규모와 껴묻거리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러시아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 가운데 살로 salo라는 것이 있다(새샘 블로그 2024. 9. 30 게재 '삼겹살 - 녹진한 돼지비계 속에 담긴 민초들의 애환'을 읽어 보세요).
살로는 돼지의 비계 부분을 소금에 염장해서 얇게 잘라먹는 음식이다.
'salo'라는 단어는 말의 안장을 뜻하는 'Sadlo'(영어로는 saddle)에서 나왔다.
살로는 7세기의 하자르 칸국 Khazar Khanate(현재 러시아 흑해와 우크라이나 일대에 있었던 나라이며, 돌궐 계통인 하자르인Khazars들이 건국했다)에서 그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살로는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해온 전통적인 음식이지만 러시아는 기후 조건 때문에 돼지를 키우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몇 배나 비싸다.
그럼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잘 먹지 않는 돼지 비계로 만든 음식이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돼지고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로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꽤 유용하다.
살로는 열량이 높고 영양도 풍부해서 추운 겨울을 버티는 원동력이었다.
이처럼 추운 지방에서 돼지고기를 선호하는 경향은 한국을 포함하여 유라시아 전역의 북반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부여의 북쪽에는 다소 생소하지만 읍루挹婁(2000년 전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북부에서 거주하던 호전적이며 사냥을 좋아하던 주민들)라는 동이족의 일파가 있었다.
호전적이고 사냥을 좋아했던 읍루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후에 말갈을 거쳐 여진, 만주족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읍루를 이들의 조상으로본다.
이 읍루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돼지기름을 뽑아내어 연고처럼 목에 발랐다고 한다.
본초학에서는 돼지기름이 종기, 동상, 육독肉毒(썩은 고기에 생기는 독)을 다스리는 데에 특효라고 한다.
실제로 돼지기름은 동상과 추위에 갈라진 피부를 다스리는 데에 효과적이다.
하지만 읍루인들이 살았던 지역은 돼지를 치기에는 너무 추운 북쪽이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100여 년 전에 읍루인의 후손인 만주족을 연구한 러시아 학자 쉬로코고로프 Shirokogoroff는 만주족이 중국인(한족)에게서 돼지 치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추운 지역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은 다르게 나와 있다.
실제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읍루인들이 돼지를 잘 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보아도 양돈의 증거는 아직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양돈의 증거가 발견될까?
그냥 멧돼지들을 잡아서 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698년, 읍루인의 후예인 말갈인의 땅에서 건국한 발해의 주민들 역시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발해의 위치가 러시아 땅이거나 읍루가 거주했던 워낙 추운 지역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발해인의 돼지고기 사랑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일본의 어느 화장실이었다.
8세기에 발해는 일본과 교류했고, 몇 차례 사신을 파견했다.
당시 발해를 통해 대륙의 선진문화를 전수받고 싶었던 일본의 열망 때문이었다.
발해와 일본의 외교 초기에는 20~30명 정도가 왕래했지만, 후기에는 100명이 넘는 사신이 오고 갈 정도였다.
발해의 사신이 일본에서 머문 곳은 지금의 아키타현(추전현秋田県)에 해당하는 데와(출出羽)와 후쿠이현(복정현福井県)에 해당하는 에치젠(월전越前) 일대였다.
8세기에 아키타성(추전성秋田城) 터에서는 우리나라의 백제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수세식 화장실이 발굴되었다.
그 화장실 바닥의 흙을 조사해보니 돼지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기생충인 갈고리촌충 pork tapeworm의 알이 발견되었다.
이 기생충은 돼지와 사람에게서만 기생하는 것으로, 이 기생충에 감염된 돼지고기를 덜 익혀 먹었을 때 그 알이 인간의 내장벽에 알을 까고 살게 된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는 거의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대부분의 단백질은 생선을 통해서 얻었고, 불교가 널리 성행하여 육식 자체를 금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당시 홋카이도(북해도北海道) 북쪽의 원주민인 오호츠크인 Okhotsk people들은 돼지를 사육해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일본의 남쪽 사람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던 북쪽의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수세식 화장실은 성 안에 만들어진 것으로 귀족들이나 귀한 손님들만 쓸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아키타성의 화장실을 쓰고, 돼지고기를 주로 먹으며, 그래서 기생충 알까지 남겨 놓았을 사람은 발해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먹는 건 우리 몸속에 쌓인다.
고고학은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먹은 음식을 밝힌다.
거기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아마 몇천 년 뒤에 한국의 요릿집이나 정육점 자리를 분석한다면 지금의 한국인들이 좋아했던 고기 부위와 숨겨진 식성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뼈들을 부위와 종류별로 일일이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먹는 것으로 당신을 밝히겠다는 사바랭의 말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고학은 너무도 흥미로운 학문이다.
그러니 한 끼 먹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길.
자, 그럼, 오늘은 무엇을 먹으러 가볼까나.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물론 그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0. 4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고기 - 편견을 딛고 이어진 우리의 별미 (7) | 2024.10.09 |
---|---|
질병의 위치를 찾아라 (15) | 2024.10.08 |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5: 북유럽 르네상스 및 12장 결론 (15) | 2024.10.03 |
고람 전기 "계산포무도" (4) | 2024.10.01 |
삼겹살 - 녹진한 돼지비계 속에 담긴 민초들의 애환 (10) | 2024.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