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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 녹진한 돼지비계 속에 담긴 민초들의 애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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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 녹진한 돼지비계 속에 담긴 민초들의 애환

새샘 2024. 9. 30. 12:55

삼겹살(출처-https://m.banhanu.com/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0246)

 

짭짤하고 고소한 비계가 가득한 삼겹살은 한국을 대표하는 돼지고기 음식이다.

우리나라 외에도 돼지비계 요리를 즐기는 나라는 유라시아 전역에 꽤 많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돼지비계 요리를 만들어 먹는 나라가 있는데, 바로 유라시아 초원 서쪽 끝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Ukraine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염장을 한 생삼겹살 요리가 유명하다.

또한, 삼겹살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유라시아 초원에서 문화적 교류를 이끌어낸 음식이기도 하다.

 
 

○세계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가 돼지비계를 사랑하는 이유

 

우크라이나의 살로(출처-출처자료1)

 

필자는 추운 시베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영하 30~4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를 여섯 해나 경험하는 동안 필자를 추위와 허기에서 지켜준 음식은 단연 돼지비계로 염장한 '살로 salo'였다.
살로를 만드는 레시피 recipe는 지역과 사람마다 정말 다양하긴 하지만 그 기본은 대개 비슷하다.
서늘한 봄이나 가을에 돼지비계 또는 삼겹살을 준비해 큼지막하게 잘라서 항아리에 넣고 그 위에 소금을 넉넉히 뿌린다.
며칠이 지나면 삼투압 현상으로 소금이 비계에 배어들며 염장이 된다.
기호에 따라서 소금과 함께 후추나 고추 같은 향료를 넣기도 한다.
완성된 살로는 얇게 잘라서 빵 위에 얹어 먹는다.
살로는 고열량인데다 각종 비타민이 풍부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살로는 우크라이나의 전통 음식인데,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는 우크라이나 출신이 아주 많기 때문에 그들의 음식이 자연스럽게 시베리아의 토착 음식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돼지비계를 먹는 풍습은 우크라이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 로마의 '라르도 lardo'라는 음식도 돼지비계를 활용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돼지비계는 '포크 스크래칭 pork scratching(또는 포크 크래클링 pork crackling)'이라고 하는 요리에 사용된다.
우리 역사에서는 북방의 추운 곳에 살던 읍루인과 그들의 후손인 만주족들이 돼지비계 요리를 해먹었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돼지비계를 먹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재료의 특성상 상하기 쉽고, 역한 냄새가 강하기 때문에 잡내를 없애고 요리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층이나 고기를 손질하는 일부 사람들만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살로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한때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 Lviv에 살로박물관이 있었을 만큼 이들은 살로를 민족의 음식으로 자부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크라이나는 '체르노젬 chernozem'이라는 흑토 지대가 발달한 세계의 곡창지대다.
쉽게 말해 신선한 곡물과 야채가 풍부하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돼지비계 요리가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힘든 환경을 개척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가 숨어 있다.
 
 

○유목민이 가르쳐준 돼지비계의 맛

 
우크라이나인들의 돼지비계 사랑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약 1,000년 전 '키예프 루스 Kievan Rus' 시절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다.
키예프 루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인 Ukrainian과 러시아인 Russian들의 주류인 슬라브인 Slavic이 882~1240년에 지금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Belarus, 러시아 Russia 모스크바 Moscow 일대에 세운 최초의 나라로 여겨진다.
중국 근처의 만리장성에서 시작한 유라시아 초원은 우크라이나의 동부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키예프 루스 이전부터 슬라브인 외에도 동아시아 초원에서 많은 유목민들이 유라시아 초원을 건너와서 정착했다.
이곳에 정착했던 다양한 민족들의 내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나라 열국시대인 3세기 무렵에는 중국에 패망한 흉노 일파에서 비롯한 훈족이 이 지역까지 대거 밀려왔다.
훈족의 대이동 직후에는 몽골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와도 협력했던 유연柔然의 후예인 아바르족 Avars이 이곳에 선진 기마 문화를 전파했다.
튀르크 Türk(돌궐突厥) 일파가 세운 하자르 칸국 Khazar Khanate은 동유럽과의 교역을 담당하며 크게 성장했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직후 200여 년 동안에는 몽골이 세운 킵차크한국汗國(또는 킵차크칸국) Kipchak Khanate이 이 지역까지 진출해 있었다.
요컨대,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유라시아 초원의 문화가 우크라이나 고대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라시아 초원과 동유럽 평원이 만나는 지점인 우크라이나를 거쳐서 수많은 유라시아의 선진적인 기마 문화와 황금 예술이 전해졌다.
 
살로의 어원도 이처럼 동쪽에서 지속적으로 밀려온 유목민들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살로는 '말안장 saddle'이란 뜻을 가진 고대 슬라브인의 언어 'saldo'에서 나왔다.
돼지 속살 위에 얹어진 지방이 마치 푹신한 안장 같아 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유럽에서는 육회의 일종인 타르타르 스테이크 Tartar steak가 기마민족이 말안장 밑에 말고기를 넣어 육질을 부드럽게 만든 것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은 살로를 잘못 이해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살로는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담긴 음식이다.
16세기 이후 우크라이나는 코사크인 Cossack들의 발흥으로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초원 유목민의 오랜 풍습인 변발辮髮/編髮(남자 머리를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인 머리)의 일종인 '추드(체두剃頭)'를 하고, 강인한 기마민족으로서 독립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체두변발은 코사크인의 강인함을 상징하는데 1962년 개봉되었던 추억의 영화 율 브리너 Yul Brynner 주연 '대장 부리바 Taras Bulba'에서 볼 수 있다.
 
살로가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것도 코사크인들의 발흥했던 무렵인 16세기 이후였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무슬림 muslim인 튀르크나 유대인 Jews/Jewish people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였던 돼지비계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값은 저렴하지만 열량 공급원으로 돼지비계가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마치 한국전쟁 직후 유행한 부대찌개나 부산의 먹장어長魚(곰장어, 꼼장어) 요리처럼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식재료를 바탕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다른 듯 같은 매력, 삼겹살과 살로

 
우리나라에서 삼겹살 구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하지만 비계가 낀 돼지고기에 대한 사랑은 그 역사가 무척 오래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요리책에도 '세겹살(삼겹살)은 돼지고기 중에 최고'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겹살 구이가 비교적 최근에야 유행하게 된 데는 비계가 가진 특유의 잡내가 한몫했다.
지방이 가득한 비계는 고기의 여러 부위 가운데서 인기가 없는 부위다.
자연스레 값도 싸다.
하지만 돼지 종자 개량을 통해 특유의 잡내를 없애고 비계 사이에 살이 들어가도록 만든 결과, 삼겹살 구이라는 맛있는 음식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돼지비계 요리를 사랑하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여러 모로 공통점이 많다.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유목문화의 영향이 강하다는 점, 주변 강대국들의 침탈로 인한 질곡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또한,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으나) 두 나라 모두 오래전부터 농업이 주요한 산업이었지만 다양한 육가공 문화가 발달했다.
육류 단백질은 농경민들에게 결핍되기 쉬운 영양소다.

그렇기 때문에 돼지비계처럼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부위를 가공해서 육류 단백질 영양분을 섭취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살로나 삼겹살 구이 같은 요리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살로와 삼겹살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최고의 술안주라는 점이다.

삼겹살에는 소주이듯이 살로에는 보드카가 제격이다.
여기에 상큼하고 아삭한 양배추 절임까지 곁들이면 우크라이나에서는 가히 최고의 안주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살로와 삼겹살 구이가 각각 우크라이나와 대한민국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살로와 삼겹살 구이 속에는 척박한 역사와 가난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내고자 했던 두 나라 민초들의 강인한 생존력이 담겨 있기에 서민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9. 30 새샘